- 빨강약
신조어 빨간약을 처음 본 곳은 드라마 <무빙>의 댓글에서였습니다. "빨간약 먹고 나서는 더욱더 남성향 콘텐츠가 재밌기 힘든 것 같음." 이해가 안 돼서 검색을 해봤는데 영화 <매트릭스>가 나오더군요. 매트릭스의 빨간약이라면 알고 있었습니다. 영화를 안 보신 분들을 위해서, 빨간약은 진실과 고통, 파란약은 허구와 안정을 의미합니다.
<무빙>은 여성을 수동적이고 연약하게 묘사하는 남성향 작품이어서 작가의 성향을 의심해야 한다는 의견이 있었습니다. 성향이란 남성우월주의를 말하는 것 같습니다. 젠더갈등을 한쪽으로 치우고 빨간약이 채택된 흐름을 알아봅니다. "남녀평등을 믿으며 살았는데(파란약) 성차별이 만연한 진실(빨간약)을 깨달았다. 진실의 눈으로 시청한 <무빙>은 매트릭스에 갇힌 것처럼 고통스럽다." 이러한 맥락에서 차용된 듯 보입니다. 찬반이야 어쨌든 빨간약에 부합하는 예시라고 봅니다.
젠더갈등의 빨간약은 커뮤니티 용어에 가까웠습니다. 2024년 3월 기준이면 이 쪽이 활용도가 높습니다. 버튜버를 아시나요? 버츄얼 유튜버의 약자인데 외국에서는 브이튜버(Vtuber)라고 말합니다. 3040 이상이면 사이버 가수 '아담'을 떠올리면 됩니다. 2030은 하츠네 미쿠와 펭수가 있겠네요. 최근 버튜버 시장이 급격하게 성장하고 있습니다. 국내에는 대형 채널이 생겨나고 세계 시장 구독자는 우리나라 인구보다 많습니다.
버튜버는 가상의 아바타로 콘텐츠를 이끕니다. 아바타 뒤의 본체는 공개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이런저런 경로로 신상이 공개되는 일이 있는데, 그것을 '빨간약'이라 말합니다. 본체가 아이돌 같은 분들도 있지만 대부분 일반인에 가깝습니다. 버튜버는 아바타 콘셉트에 충실한 편이어서 본체는 목소리, 성별, 성격 모든 것이 다를 수 있습니다. 아바타 제작 기술이 발전하고 본체의 연기력이 늘어날수록 둘 사이의 갭은 무한대로 커집니다. 빨간약의 충격이 클 수밖에 없습니다.
빨간약은 진실과 고통입니다. 표면적 고통은 본체의 외모에 실망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진짜 고통은 다른 곳에 있습니다. 아바타의 본체를 알면 콘텐츠에 집중하기 어렵습니다. 즐길 수 없는 지경에 이르면 본인만 고통인 겁니다. 이것이 '버튜버의 빨간약' 핵심입니다. 초기에는 빨간약을 발굴하는 움직임이 많았지만 요즘은 굳이 찾아보지 않는 흐름입니다. 영화 스포일러와 같은 선상에 올리는 분위기도 있습니다.
버튜버 시장이 발달한 일본에서는 빨간약 살포가 지탄받는 행위로 여겨집니다. 만화가 이말년이 유튜버 침착맨이라는 빨간약은 공개 정보지만 버튜버의 빨간약은 신상 털기입니다. 버튜버 회사가 빨간약 게시자 정보 공개 청구 소송을 제기하여 300만 엔 이상의 손해배상금을 지불하게 한 사례도 있습니다. 명예훼손과 초상권침해는 물론이며 '업무방해'를 인정받은 것입니다. 조만간 우리나라도 비슷한 판례가 나올지도 모르겠습니다.
빨간약은 사연이 있어야 합니다. 무색무취 빨간약은 펙트체크에 불과합니다. 모든 빨간약이 부정적 결과를 초래하진 않습니다. 오히려 좋은 빨간약도 있지만 어원으로 알려진 매트릭스에 부합하지 않습니다. 뽀로로의 본체가 브래드 피트라면 파란약에 가깝울 겁니다. 통상적으로 쓰이는 빨간약은 진실과 고통입니다. 따라서 빨간약의 뉘앙스는 판도라의 상자와 유사합니다. 신조어도 결국 어휘라고 생각합니다. 제대로 느끼고 사용하려면 정확한 이해가 필요합니다.
빨간 x 빨강 o
빨간색 o 빨강색 x
? 빨간약 o 빨강약 x
빨강 자체가 색을 담고 있기 때문에 '빨강+색'은 '역전+앞'처럼 이중구조입니다. 그런데 빨간약과 빨강약은 확신이 없습니다. 찾으면 찾을수록 복잡합니다. '빨강/빨간'과 '약'을 띄어 쓴다는 견해가 있습니다. 모든 약이 빨간색은 아니며 '빨간색 약'을 '빨간색약'으로 붙여 쓰지 않으니까요. 사람마다 말이 다르고 맞춤법 검사기도 다릅니다. 이런 경우는 다수의 표현이 낫다고 생각합니다. '빨간약'이 압도적으로 많긴 합니다. 도움을 못 드려 죄송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