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름 없는 가게였지만 항상 그 자리에 있던 작은 가게들.
부산 중앙동에는 빨간 간판에 흰 글씨로 ‘양장 맞춤옷 수선’이라고 적힌 가게가 있다. 특별한 가게 이름은 없다. 다만 어떤 일을 하는 곳인지 ‘양장 양복 옷 수선 전문’이라고 적어놓았을 뿐이다. 이렇게 오래된 가게들 중에는 ‘도장, 만화, 세탁, 참기름, 추어탕’과 같이 빨간 글씨로 업종만 적은 곳들이 많다. 아무래도 간판은 알리기 위한 목적으로 만들다 보니, 눈에 띄는 빨간색으로 만드는 것은 이해가 가는데 왜 이름이 아닌 파는 품목만 덩그러니 적어둔 것일까? 부산 ‘양장 맞춤옷 수선’ 사장님의 말씀을 듣고 나서 조금은 그 이유가 짐작이 됐다. “이 동네에 살다 보니 여기서 가게를 시작했죠. 10년 정도 의상실을 하다가, 기성복이 많이 나오다 보니까 잘 안 돼서 옷수선집으로 바꾸게 됐어요. 그래도 이 가게로 아이들을 다 키웠어요” 37년 전 의상실로 시작했던 가게는 세월이 흘러 옷수선집으로 업종을 변경하게 됐는데, 새 간판으로 바꿔 달지 않았다. 동네 사람들 모두 사장님을 알고 있기에, 기존 간판 위에 변경된 업종만 덧붙이면 그만이었다. 영업을 하고 있다는 표시만 하면 될 뿐 간판으로 눈에 띄게 홍보할 필요는 없었다. 이름 없는 가게였지만, 항상 그 자리에 있는 가게로, 그 사람이 있는 가게로 동네 사람들에게 알려져 있었던 것이다.
또 한 곳의 옷수선집을 만나며 ‘빨간 간판’에 대한 호기심은 더욱 커졌다. 서울 연남동에서 본 빨간색의 ‘소금창고’ 간판에는 ‘맞춤 수선’이라고 적혀 있어 옷 수선을 하는 곳이란 걸 알 수 있었다. 음식점과 카페가 많은 연남동에 옷 수선집이라니. 관광객이 아닌 동네 사람들을 위한 가게가 아직 남아있다는 것만으로도 의미 있게 느껴졌다. 간판의 외형만 놓고 본다면 옛날 간판들은 빨간색에 커다랗게 업종만 적은 비슷한 형태들이라고, 획일화되어 있다고 생각하기 쉽지만, 그 속을 들여다보면 훨씬 다채롭고 풍요롭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상업화된 강남과 홍대에서는 보기 힘든 ‘수선집, 목공소, 철물점, 카센터, 목욕탕’ 등 생활에 필요한 다양한 종류의 가게들이 예전에는 동네 안에 있었다. 무언가를 소비해야만 하는 곳이 아니라 무언가를 고치고 생산해 내는, 그 동네를 풍요롭게 해주는 다양한 공간들이 있었다. 지역에서 난 햅쌀과 곡물들을 팔던 쌀가게, 직접 만든 판두부와 야채들을 팔던 부식점 등 작은 규모로 조금씩 팔고 조금씩 수입을 얻던 가게들은 글로벌 유통 업체, 대형 마트, 프랜차이즈 식당과 같이 생존 피라미드 최상위에 있는 거대한 기업들에 밀려 사라져 갔다. 기계화, 대량화의 매끈하고 편리한 시스템 뒤로 다양성이, 작은 가게들의 개성이 짓이겨진 것은 아닐까. 오히려 옛날 동네들에 업종의 다양성이 있었음을, 오래된 가게들에 업종의 고유성이 있었음을 돌아보게 된다.
서울 청계천변에 있는 ‘강산옥’을 방문하고 나서 이 생각은 더욱 확실해졌다. 강산옥은 1958년부터 60년이 넘는 시간 동안 사랑받아온 노포인데, 입구에는 빨간색 붓글씨로 ‘콩비지’라고만 적혀있다. 이곳의 메뉴는 콩비지와 콩국수로 단출하지만, 직접 콩을 갈아 비지를 내려 만들기 때문에 어디서도 찾을 수 없는 고소한 맛을 자랑한다. 친숙한 양철 쟁반에 뜨끈한 콩비지와 밑반찬을 담아 건네주셨는데, 콩비지의 담백한 맛을 느낄 수 있게 반찬들은 자극적이지 않았다. 사장님께 간판 사진을 찍고 싶다고 말씀드리자, “비지 먹으러 왔다가 간판 건졌네요?” 하시며 다 먹고 나서 천천히 찍으라고 하셨다. 3대째 가업을 잇고 계신 사장님은 어렸을 때부터 빨간색으로 적은 ‘콩비지’ 붓글씨를 보았다며, 적어도 40년은 넘은 간판이라고 알려주셨다. 집밥을 먹은 듯한 익숙한 메뉴에, 인테리어를 전혀 신경 쓰지 않은 꾸밈없는 가게인데, 분명 달라 보였다. 요즘의 가게들은 세련돼 보이는데, 들여다보면 어딘가 비슷비슷한 느낌이 든다. 경쟁이 치열해지면서 외면을 치장하느라 고유한 맛을 찾을 겨를이 없었던 것은 아닐까. 체인 카페, 체인 세탁소, 체인 치킨집 등 점점 비슷해져 가는 동네 풍경을 보며 이름 없는 가게들이 그리워진다. 사업이라기보다 생업이었던, 한 자리에서 하나의 품목만 고수했던 사람들. 입소문으로 신뢰로 장사를 했던 작은 가게들. 이제는 이름 없는 빨간 간판을 만드는 사람이 없다는 사실이 씁쓸하게 다가온다. 빨간색의 강렬함만 남고 강조하고자 했던 내용은 잃어버린 기분이 든다.
* 이 글은 우리 주변에 있던 이름 없는 작은 가게들에 대한 글입니다. <사라지지 않는 간판들> 책을 쓰며 그동안 찍었던 사진들을 정리했는데요. 유독 품목만을 강조한 빨간 간판들이 많다는 사실을 발견했습니다. 책에는 비록 수록되지 못했지만, 우리에게 생각해 볼 여지를 주는 것 같아 공유합니다. 도시의 간판은 그 자체로 시대와 사회를 보여주는 풍속화와 같고, 우리 주변의 이야기를 담고 있습니다. 더 많은 이야기가 궁금하신 분들은 <사라지지 않는 간판들> 책을 읽어주세요. 지역 도서관에 희망도서 신청하기를 통해, 더 많은 분들과 책을 공유해 주신다면 더더욱 감사드리겠습니다 :)
* <사라지지 않는 간판들> 책 소개
2011년부터 오래된 간판에 매료되었고, 필름카메라로 기록해 왔습니다. 사진가도 아니고 학생도 아니고 직장인이었던 제가 휴일마다 틈틈이 거리를 누비며 5천 장이 넘는 간판 사진을 찍었습니다. 왜 계속 기록했고 무엇에 그토록 매료되었는지를 말하고 싶어 <버리지 않는 마음>, <사라지지 않는 간판들>이라는 책을 엮었습니다. 한 마디로 말하자면, 겉과 속 둘 다가 아름다워서 반했던 것 같습니다. 폰트가 나오기 이전 간판 장인의 손글씨로 디자인해 수작업으로 제작한 간판들의 고유함이 좋았고, 또 생계를 넘어 사명감을 가지고 자리를 지키는 사장님들의 모습이 감동이 되었습니다. 오래된 가게와 사장님들께 존경을 표현하고 싶다는 마음으로 작업을 이어가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