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각지 화랑거리, 동대문 생선골목 등 지역의 역사를 품고 있는 가게들.
삼각지에는 박완서 작가의 소설 ‘나목’의 배경이 된 화랑 거리가 있다. 모든 것이 부족했던 시절, 작가는 미 8군 PX 초상화부에서 미군 손님들을 끌어오는 일을 했고, 그들이 의뢰한 4달러짜리 초상화를 그리며 생계를 이어가는 화가들 중에는 박수근 화백도 있었다. 전쟁 후 폐허 속에서 유일하게 물자가 풍부했던 용산 미군 기지 앞에는 의뢰받은 초상화나 풍경화, 명화 모작 등을 그리는 화가들이 자연스레 모여들었고, 화실과 화방이 골목을 이루게 되었다. 1990년대 중국으로부터 더 값싸게 그림을 구할 수 있게 되면서 화실들은 많이 사라졌지만, 그림 도구들을 파는 화방들은 여전히 남아 지난 이야기들을 들려주고 있다. 이 인근에 있는 삼각지 대구탕 골목 역시 지역의 역사를 알려준다. 지금은 전쟁기념관이 되었지만 이전 육군본부가 있던 시절, 군인들을 위한 먹거리로 1979년 원대구탕이 처음 문을 열었다. 한국관광공사에서 발행한 <대한민국 구석구석> 자료에 따르면, 육군본부의 군인들이 단골이 되어 다른 지역으로 파견 근무를 가서도 가게를 기억했고, 전역한 이후에도 가족들을 데리고 다시 찾아와 맛을 소개하면서 삼각지 대구탕이 알려졌다고 한다. 이후 자원대구탕, 참대구탕 등 4곳의 식당들이 나란히 들어서면서 이 일대는 대구탕 골목을 이루게 되었다. 평범한 가게들이 모여 특색 있는 골목을 이루어내는 것도 흥미롭거니와 그 골목들이 지역의 생태계를 반영하고 지난 역사를 말하고 있다는 사실이 익숙하게 걷던 골목길을 다시 바라보게 만든다.
도시 계획에 의해 만들어진 길은 넓고 쭉 뻗은 직선이라면, 서민들에 의해 형성된 골목길은 좁고 구부정하지만 다채롭다. 새로운 가게가 생기면서 길의 모양이 달라지기도 하고, 다음 집에 가려져 골목의 방향을 예측할 수 없지만, 산길처럼 걷기 좋은 길인 듯하다. 골목길이 좋은 이유로는 크게 3가지를 꼽을 수 있다.
첫 번째, 골목은 그 자체로 역사적인 공간이라는 점에서다. 로버트 파우저 전 서울대 교수는 <서울의 재발견>(승효상, 로버트 파우저 외 공동저자, 페이퍼스토리 출판, 2015년)이라는 책에서 자동차라는 교통수단이 생기고 난 이후부터는 전 세계적으로 도로를 닦을 뿐 골목을 만들지 않았다며, 골목길은 출발부터 역사적인 공간이라고 말하고 있다. 지도를 통해 그 도시의 길들만 살펴보아도 오래된 도시인지 신도시인지 구분할 수 있을 정도로, 골목이 많다는 것은 역사적인 도시라는 것을 반증한다. 서울에서 특히 종로는 좁은 골목이 많은 곳이다. 예로부터 이곳에는 ‘피맛길’이라 불리는 뒷골목이 있었는데, 조선시대 고관들이 말을 타고 행차하는 행렬을 피하는 길이라는 뜻의 피마(避馬)에서 유래한 것이다. 당시 말을 탄 벼슬아치들이 지나가기까지 서민들은 엎드려 있어야 했기 때문에, 이것이 싫어 차라리 좁은 골목으로 다니는 사람들이 생겨났다. 서민들이 자주 골목길을 애용하다 보니 끼니를 때울 수 있는 음식점들이 들어서게 됐고, 600년간 서민들의 애환을 담는 곳이 되었다. 2000년대 들어 재개발이 이루어지면서 전통적인 거리의 모습들을 많이 잃어버려 아쉽지만, 어르신들의 홍대라 불리는 낙원동 국밥 골목에서부터 동대문시장 상인들의 식사를 책임지는 ‘생선구이 골목, 닭 한 마리 골목’에 이르기까지 아직 남아있는 좁은 길들은 서울이 오래된 도시임을 체감하게 한다.
두 번째, 골목의 다양성은 그 자체로 도시를 재미있게 만든다. 일단 좁은 길이 보이면 들어가 보라고 말하고 싶다. 특히 충무로 인쇄 골목이나 을지로 금속 골목, 종로 4가 시계 골목은 오랜 세월에 걸쳐 사람들의 자발적인 활동들로 형성되어서인지, 길들이 참 촘촘하다. 제조업 분야의 장인들만 있을 것 같지만, 그 속에 들어가 보면 매일 다른 반찬으로 한 끼를 책임지는 백반집, 겨울엔 따뜻한 커피를 여름엔 시원한 칡즙을 배달하는 다방, 포장마차의 역할까지 하는 슈퍼들이 군데군데 들어서 있다. 모서리마다 생활에 꼭 필요한 곳들이 하나씩 하나씩 붙어가면서, 이렇게 다양한 길의 방향을 일구어냈구나 싶다. 분명 다양한 갈래지만 연결을 위해서 만들어진 탓에 길을 잃어버릴 염려는 없다. 을지로 금속 골목을 따라가면 어느새 청계천 앞에 다다르고 충무로까지 이어지며, 실핏줄처럼 서울의 중심을 연결하고 있음을 느낀다. 터널을 만들듯 뚫어버리는 것보다 이런 게 자연스러운 길 같다. 그저 빠르게 이동하며 지나가 버리는 길이 아니라, 걷고 싶고 머물고 싶은 길이라는 점에서다. 그래서 그토록 제인 제이콥스는 좁은 길의 중요성을 말한 것이 아닌가 싶다. 1950년대 미국은 자동차 소유의 급증으로 교통 체증을 해소하기 위한 고속도로를 만드는데 열광하고 있었고, 그녀가 살았던 뉴욕 그리니치 빌리지도 고속도로를 만들기 위한 개발 지역으로 지정되었다. 그녀는 원주민이 쫓겨나고 자동차가 점령하는 것은 오히려 도시의 쇠퇴를 부르고, 네모반듯한 공간들은 도시를 따분하게 만들며 활기를 잃게 한다고 강조했다. 그녀는 1961년 출간한 <미국 대도시의 죽음과 삶> 책을 통해 다양성이 도시가 발전할 수 있는 원동력이라고 말했다. 길 역시 마찬가지다. 커다란 한 줄기로 끝나지 않고 잔뿌리 같은 골목들의 연결, 연결을 통해 움직인다면 그 도시는 훨씬 매력적으로 보일 것이다.
세 번째, 골목은 그 지역과 관계를 맺고 있다는 것이다. 골목은 물리적으로 집과 집이 연결되어 만들어지기 때문에 작게는 이웃한 공간과 관계를 맺고 있고, 크게는 그 지역과 연계되어 있다. 다양한 상점들이 모여있지만 위로 올라가는 백화점과 옆으로 퍼져있는 골목 상권을 비교해 보자면, 백화점의 경우 목적지가 되는 실내 안에만 머무는 경향이 있다. 주차를 하고 상점들을 돌아보다가 곧장 차를 타고 돌아가는 것이다. 백화점의 외벽은 주변과 어우러져 길이 되기보다 아늑한 실내를 만들기 위한 담에 가깝다. 하지만 골목에 있는 가게를 갈 때에는 목적지가 되는 공간뿐만 아니라 그 지역 곳곳을 걸어 다니게 된다. 망원동 서점을 가보고 싶다고 가정했을 때, 사람들은 그곳만 찾지 않고 주변의 먹거리와 가볼 만한 곳들을 동시에 검색해 본다. 찾아오는 방문객뿐만 아니라, 온라인 검색 유입도도, 동네에 대한 관심도 함께 증가하지 않을까 추측해 본다. 즉 골목에 있는 개성 있는 가게는 그 지역 전체에 활기를 가져오는 것이다. 거대한 빌딩은 아무리 오랜 세월이 흘러도 ‘하나의 건물’이지만, 작은 가게들은 이어져서 ‘하나의 길’이 된다. 식당, 약국, 사진관 등 오래된 가게들은 그 자리를 지키며, 또 이웃한 가게들과 공존하며 하나의 방향을 이루고 있다. ‘그대에게 기쁨 가득! 오늘도 베리 나이스!’라고 적힌 골목 식당을 지나며, 사장님의 손글씨부터 사람들의 표정까지 살필 수 있는 좁지만 가까운 길이라는 생각이 든다. 바쁘게 이동만 하며 살지 않기를, 둥글게 관계를 맺으며 살아가야 함을 알려주는, 좁아도 좋은 길목이 되어준다.
* <사라지지 않는 간판들> 책에는 비록 수록되지 못했지만, 골목을 이루는 작은 가게들에 대해 생각해 볼 지점이 있는 것 같아 공유합니다. 오래된 가게는 그 업종과 이름에서부터 시대와 사회상을 보여주고, 가게의 시작을 살펴보면 자연스레 주변 지역의 역사를 알게 됩니다. 더 많은 이야기가 궁금하신 분들은 <사라지지 않는 간판들> 책을 읽어주세요. 지역 도서관에 희망도서 신청하기를 통해, 더 많은 분들과 책을 공유해 주신다면 더더욱 감사드리겠습니다 :)
* <사라지지 않는 간판들> 책 소개
2011년부터 오래된 간판에 매료되었고 필름카메라로 천천히 기록해 왔습니다. 사진가도 아니고 학생도 아니고 직장인이었던 제가 휴일마다 틈틈이 거리를 누비며 5천 장이 넘는 간판 사진을 찍었습니다. 왜 계속 기록했고 무엇에 그토록 매료되었는지를 말하고 싶어 <버리지 않는 마음>, <사라지지 않는 간판들>이라는 책을 엮었습니다. 한 마디로 말하자면, 겉과 속 둘 다가 아름다워서 반했던 것 같습니다. 폰트가 나오기 이전 간판 장인의 손글씨로 디자인해 수작업으로 제작한 간판들의 고유함이 좋았고, 또 생계를 넘어 사명감을 가지고 자리를 지키는 사장님들의 모습이 감동이 되었습니다. 오래된 가게와 사장님들께 존경을 표하고 싶다는 마음으로 작업을 이어가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