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이채 Nov 15. 2018

KBS ‘서가식당’: 음식으로 만나는 새로운 책 세상

제작기 2017. 8. 24. 9:30

https://blog.naver.com/kpfjra_/221080476988

“여보세요? 안녕하세요? 여긴 ‘서가식당’이라는 프로그램인데요?” 

“네? 처가식당이요?” 

2016년 가을, 파일럿 4부작을 처음 준비할 때는 많은 분이 KBS ‘서가식당’이라는 제목을 얘기하면, 진짜 밥집 혹은 식당으로 오해했다. 제작진이 막 꾸려지던 초기에 사무용품과 제작 물품을 주문하면 ‘서가식품’ 앞이라는 엉뚱한 이름으로 배달 오기도 했다. 제목에서 오는 어감 때문이었을까. 프로그램을 론칭할 때 가장 많이 들었던 질문이 ‘서가식당’은 “음식 프로그램인가? 책 프로그램인가?”였다.


책과 음식의 결합

이 질문은 출연자 섭외할 때도 계속 이어졌다. 배우 권해효 씨를 동교동 한 카페에서 만났다. 그는 나의 프로그램 취지에 대한 설명을 경청한 후, “음식과 책이 과연 잘 어울릴 수 있을까요? 책과 음식을 기계적으로 결합하면 억지스럽지 않을까요?”하고 물었다. 주변 선후배, 동료들뿐만 아니라 섭외 단계에서 만나는 분들마다 선정하는 책에 음식이 등장하지 않을 때는 어떻게 할 거냐고 걱정 섞인 질문을 했다. 나 스스로도 고민이 많이 된 부분이었다. 오히려 장애물을 하나 더 만드는 것은 아닐까 몇 번을 자문해보았다. 책 내용은 물론이고 음식 자료 조사까지 해야 하니 수고가 몇 배는 들고, 자칫 연결이 부자연스러운 위험부담까지 떠안게 될 수 있었다. 하지만 책과 음식의 결합이라니, 어렵겠지만 재밌겠다는 타인들의 반응 하나에 가능성을 두고 도전하기로 했다. 

프로그램을 시작한 지 11개월이 지난 지금도 이 부분 때문에 회의를 자주 하는 편이다. 일단 제작진이 이야기 주제와 책을 정하면 책에 나오는 음식 이름과 장면을 모두 정리한다. 어떤 장면에서 어떤 음식이 등장했는지, 의미가 있는 장면인지, 음식에 담긴 의미는 있는지 조사한 후 셰프에게 자료를 보내 협의한다. 이 와중에도 생각할 것은 또 있다. 화면만 봐도 시청자의 식욕을 자극하거나 눈요기가 되는 요리, 평소에 식탁에서 보지 못한 새로운 요리, 인문학적 정보 전달이 있을 만한 요리를 찾아내야 하기 때문에 타 책 프로그램에 비해 자료 조사 양이 많다. 출연하는 셰프 역시 바쁘다. 책을 읽고 자신의 생각도 얘기하면서 요리와 관련된 인문학적 정보를 풀어야 하기 때문에 녹화 당일 셰프는 출연자 중 가장 먼저 녹화장에 도착하고, 촬영이 가장 늦게 끝난다. 물론 ‘서가식당’에는 출연하는 셰프(박찬일 셰프, 박준우 셰프, 김소봉 셰프) 뒤에는 푸드팀이 있다. 김언정 교수님 외 푸드스타일리스트 2명이 녹화 전 며칠 동안 제작진과 함께 레시피, 식재료를 협의하고 출연 셰프와 또 한 번 레시피부터 테이블세팅까지 논의한 후 녹화한다. 메인이 되는 책 토크 녹화가 끝나면 며칠 간격을 두고 푸드팀과 요리 과정만 따로 촬영한다. 이때에도 맛있게 보이게 하기 위해 KBS의 ‘요리인류’를 함께 했던 촬영 감독과 스태프들이 한 컷 한 컷 공들여 촬영한다. 보통 하루에 4개의 요리를 촬영하는데 8시간에서 10시간 가까이 소요된다. 

책을 읽는 재미도 있겠지만 책 속의 음식을 통해 또 다른 시각에서 책을 보는 것은 개인적으로도 재미있는 경험이었다. <돈키호테>에서 돈키호테의 조수 산초가 작은 섬의 왕이 되어 나라를 통치하다가 결국엔 한탄하면서 먹고 싶다고 한 ‘가스파초’는 스페인의 대표 서민 음식이고, 만화 <브이 포 벤데타>에서 파키스탄 여인이 훔친 콩 통조림은 1980년대 당시 극빈층이 먹을 수 있는 최소한의 음식이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 일본 소설 <상실의 시대>의 중년 여성 레이코와 스무 살의 와타나베가 하룻밤을 보내기 전에 먹은 ‘스키야키’는 각자 덜어 먹는 일본 식문화를 생각해볼 때, 두 사람의 교감을 미리 예측할 수 있는 음식이라는 숨겨진 의미가 있다. 책에서 잠깐 언급되는 음식도 알고 보면 그 장면과 주인공들의 정서가 더 감각적으로 다가온다. 나는 책 읽는 즐거움이 더 풍성해지는 것을 체험했고, 이제 책을 읽다가 음식이 등장하면 반드시 검색해보는 습관이 생겼다.


‘투사’처럼 책을 읽어내다

주변 친구들은 종종 이렇게 묻는다. 출연자들이 진짜로 책을 다 읽느냐고. 사실 나 역시도 프로그램 덕분에 책을 많이 읽게 되지만, 때로는 스트레스가 될 때도 있다. 아쉬운 점도 있다. 서점에 들렀다가 읽고 싶은 책이 있어 구입한 경우에도, 먼저 읽어야 할 숙제 책, 즉 방송 아이템 후보부터 먼저 읽어야 한다는 것이다. 자연스럽게 개인적으로 읽고 싶은 책들은 나의 독서 순서에서 후순위로 밀려나게 된다. 그렇지만 자랑스러운 점은 (연출자로서 당연한 일이지만) 지금까지 방송 아이템 책은 한 권도 빼놓지 않고 모두 정독했다는 것이다. 이외에 아이템으로 결정하기 위해 훑어본 책까지 포함한다면 지난해 여름부터 읽은 책의 양이 꽤 된다. 

첫 단추부터 두껍고 어려운 책을 선정해 출연자 들에게 본의 아니게 진담 반 농담 반으로 원성을 산 적도 있다. 프로그램 첫 회부터 <삼국지>(10권), <돈키호테>(1,2권 총 1,600페이지), <초한지>처럼 두꺼운 책을 선정해서 출연자와 제작진, 심지어 시청자에게도 고충을 준 걸 인정한다. 하지만 독자들이 분량 때문에 읽을 엄두를 못 내는 책을 방송에서 대신 읽고 얘기한다면, 그만큼 시청자는 대리만족을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은 그때나 지금이나 변함없고, 그런 마음으로 아이템 진행을 강행했다. 지금은 출연자들이 두꺼운 책을 읽어낸 것을 투사들처럼 자랑스럽게 이야기한다. 


사실 ‘서가식당’만 운영하는 나와 제작진도 매주 책을 읽는 것이 고역인데, 본업이 있는 출연자들은 얼마나 스트레스이겠는가? “다음 주까지는 다 읽으셔야 합니다” “오늘 정도면 3분의 2는 읽으셨어야 합니다. 다른 분들은 다 읽으셨습니다” 하며 반(半)협박을 하기도 했다. 약속한 데드라인에 사전 인터뷰를 하려고 전화를 하면, 모 출연자는 일부러 우리를 피하는 게 아닌가 할 정도로 전화를 안 받을 때도 있다. 왜 전화를 피하냐고 귀엽게 잔소리하기도 하지만, 바쁜 일정 속에서도 출연자 모두 책을 읽는 것을 보면 사실 대단하다는 생각이 든다. 녹화 후 술자리에서 슬쩍 물어본 적 있는데, 책을 안 읽고 녹화를 하면 출연자들 사이에서 망신을 당할 것 같아 녹화 전까지는 꼭 읽게 된다고 한다. 

특히 배우 권해효 씨는 타 방송사의 드라마 촬영과 일정이 계속 겹쳤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독하고 자신만의 시각으로 책을 재해석하는 독자 겸 출연자다. 그의 책상과 책장을 휴대전화 카메라로 찍어 보내달라고 한 적이 있는데, 마치 소설가나 작가의 책상이 연상될 정도로 책이 높이 쌓여 있는 걸 보고 깜짝 놀란 적도 있다. 권해효 씨 외에 배우 한은정 씨, 팝칼럼니스트 김태훈 씨, 강승화 KBS 아나운서, 그리고 각 분야 전문가들과도 녹화 전에 모두 모여 1시간 이상씩 읽은 책에 대해 대화를 나눈다. 연령대, 성별, 취향이 각기 다른 출연자들이 ‘독서 토론’ 혹은 ‘책 수다’를 나누는 것을 가만히 듣고 있기만 해도 재밌다. 회식을 할 때마다 이어지는 책 이야기는 마치 또 다른 ‘녹화’를 하는 듯하다. 출연자들이 지치지 않고 끝없이 펼치는 책 이야기, ‘서가식당’이 섭외 하나는 적재적소 인재들로 정말 잘한 것 같다.


책 프로그램의 역할?

방송 후 피드백을 보면 시청자들이 가장 재밌어 하는 코너가 ‘몰래 온 손님’이다. 책을 읽고 온 고정 출연자들이 메인 스튜디오에서 이야기를 나눈다. 호평도 있고 혹평도 있다. 때로는 해당 회차의 책 저자는 이런저런 사람일 것이라는 추측성 뒷담화도 있다. 이러한 뒷담화 현장을 독립된 별도의 공간에서 저자가 몰래 숨어서 지켜본다. 출연자들이 저자 자신의 책을 감명 깊게 읽었다고 하면, 아무리 대한민국의 내로라하는 대작가라 해도 아이처럼 표정이 밝아지지만, 혹평이 나올 때에는 표정이 싹 바뀐다. 당황하기도 한다. 이러한 리액션에서 시청자들은 재미를 느끼는 것 같다. 사실 기획 당시에 나는 <작가를 찾는 6인의 등장인물>이라는 희곡을 관심 있게 읽고 있었는데, 여기서 모티프를 얻었다. 출연자 겸 독자들이 저자의 의도를 받아들이고 배우기보다는 저자가 독자의 생각을 들어보는 콘셉트를 프로그램 포맷에 녹이고 싶었다. 저자와 전문가, 권위자보다는 일반 독자의 독서 취향과 느낌이 중심이 되는 프로그램을 지향하고 싶었다. 

10회 이상 방송된 지금도 출연자들은 저자가 녹화장에 온 사실을 모른다. 이제는 몇 번 당해(?) 보고, 눈치들도 빨라서 녹화 당일에는 저자가 오느냐고 제작진에게 슬쩍 물어본다. 그러나 아직도 007 작전처럼 저자의 동선이 출연자들의 동선과 겹치지 않게 한다. 사실 이런 장치를 두는 게 시간과 비용이 더 들어가기도 하고, 가성비 낮은 거추장스러운 장치일 수도 있다. 하지만 저자가 온다는 사실을 미리 알지 못하는 상황에서 독자인 동시에 출연자인 ‘서가식당’ 멤버들의 솔직한 후기가 나온다고 믿기 때문에, 국내 저자를 모시는 경우에는 초심을 갖고 이 장치를 유지하고 있다. 이 코너를 처음 운영할 때는 PD들이나 방송 작가들 모두 걱정이 많았다. 혹시나 저자가 자신의 책에 대해 거침없는 비난을 듣고 마음 상해 녹화 중간에 나가버리는 것은 아닐까? 고정 출연자들이 사전 인터뷰처럼 수위 높은 입담을 풀어놓는다면 녹화 분위기가 엉망이 되지는 않을까? 녹화 전날까지도 몰래 온 손님-저자를 모시는 포맷을 포기해야 할지, 그냥 밀어붙여야 할지 고민이 많았다. 하지만 성석제, 정유정, 이기주 같은 저자들은 오히려 이 시간을 즐겼다. 국내의 손꼽히는 문장가들이라 조심스러운 부분도 있었다. 하지만 자신이 쓴 책에 대해 한 마디 한 마디 비평이 나올 때마다 긴장하던 저자들도, 마지막에는 “신인으로 돌아간 느낌이었다”고 입을 모았다. 자신의 글이 책으로 세상에 나온 순간부터는 독자에게 맡기는 것이 작가의 본분이라는 말이 인상에 남는다. 

아직도 ‘서가식당’에는 고민이 많다. 작은 출판사에 몸담고 있는 친구를 종종 만나 커피 한잔하다 보면, 단순히 ‘책을 꼭 정답 맞히듯이 읽어야 해? 읽고 싶은 부분만 골라 읽든, 전문가들과는 다르게 내 방식대로 읽으면 되는 것 아닌가?’ 하며 독자 중심의 대중적 프로그램을 만들고 싶었던 나도 생각이 많아진다. 출판계와 독서 문화마저 양극화하는 상황에서, ‘서가식당’은 옳게 나아가고 있는 걸까? 책 프로그램의 역할은 어떠해야 할까? 평소 나답지 않게 진지해진다. 즉석에서 먹는 인스턴트 음식보다는 오랜 시간을 들여 만든 음식을 좋은 사람들과 나누고 싶은 것처럼, ‘서가식당’도 순간의 재미보다는 울림이 있고, 그래서 시청자들이 다시 서가에 꽂힌 책을 꺼내도록 하는 프로그램이 됐으면 좋겠다. 지금은 ‘서가식당’보다는 ‘뮤직뱅크’나 ‘미운우리새끼’를 즐겨 보는 초등학생 딸이 언젠가는 ‘서가식당’을 보고 엄마 아빠 책장의 책을 꺼내 보는 감동적인 순간을 기대해본다.

글 / 이은미 (KBS PD, ‘서가식당’ 기획·연출)


- 본 기사는 <신문과방송> 2017년 8월호(통권 560호) 취재기/제작기 섹션에 수록되어 있습니다. -

[출처] KBS ‘서가식당’: 음식으로 만나는 새로운 책 세상|작성자 신문과방송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