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허 베드로 Nov 26. 2020

 배움의 향기

                                       

나는 재능은 없으면서도, 하고 싶은 것이 왜 그렇게 많았는지 모르겠다. 비행기 조종이 그 첫째였고, 이 외에도 가수, 아나운서 등 여러 가지가 있었다. 가난하고 어렵기만 했던 어린 시절과 성장기에는 늘 주린 배 채우기에 급급했었고, 이후 가족을 거느린 가장으로서 힘겨운 삶을 이어 오다 보니, 취미와 같은 여유 따위를 찾기가 그리 쉬운 일 만은 아니었다.


고맙게도 나는, 부모님이 선천적으로 물려주신 목소리 덕분에 일찌감치 성당 성가대에 소속되어, 노래 부르기로 그나마 취미 생활을 해 온 것이 전부였다. 성인이 된 후 내 목소리는 더욱 세련되어, 여느 성학과 출신 못지않을 정도로 그 실력을 인정받아, 단골 solist로 활동은 계속되었고, 한 때 일부 공중파 TV 방송의 전파를 타기도 했었다.


그것은 불과 몇 번으로 끝이 났지만, 그때부터 나는 주제넘게도 합창단 Conductor를 꿈꾸기 시작했다. 그것이 그렇게도 하고 싶었다. 당시 신세계 백화점에서 판촉용으로 나눠주던 ‘드보르작’의 신세계 교향곡 L.P 판을 틀어놓고, 열심히 팔을 휘저어 보며, 나 나름대로의 만족감을 느껴 보기도 했었다.      


1991년 6월 우리 가족은 지구 남반구 Argentina로 이주하게 되었고, 그곳에서 나는 엉뚱하게도 지휘를 할 수 있는 기회와 우연히 맞닥뜨리게 된다. 내가 속해 있던 한인성당 성가대 지휘자의 갑작스러운 유고로 인해, 얼떨결에 그 지휘를 내가 떠맡게 된 것이었다.  

    

평소 해보고 싶은 생각은 있었지만, 막상 내 앞에 들이닥친 엄한 현실 앞에서, 나는 심히 두렵고 당황스럽지 않을 수 없었다. 나의 욕심과(?) 주위의 권고에 떠밀려, 얼떨떨한 상태에서 수락은 했지만, 그런데 이를 어쩌나? 내 주제에 언감생심도 유분수지. 이미 엎질러진 물을 담을 수도 없고 해서, 나는 막막하고 어찌할 바를 몰라 그냥 허둥거리고 있었다.   

   

음악을 전공한 사람들조차도 지휘는 따로 공부를 해야 할 만큼 어렵다고 하는데, 이 일을 어떻게 해야 하나 하고, 고민에 고민을 하고 있던 중, 진짜 우연치고는 적절한 시기에 특별한 한 사람으로부터 도움을 받게 되는 기회를 가지게 된다.


가톨릭 사제수품 후 미국에서 종교음악을 전공하시던 한 신부님을 만나게 되는데, 이곳 본당 신부님과는 신학교 동창이었으며, 휴가를 이용해 이곳에 오셨다고 했다. 그런데 웬걸, 막상 만나고 보니 내 친구의 친구이기도 했으니 말이다.  이런 인연이 또 어디 있단 말인가?


대학생 시절 대구 가톨릭합창단에서 같이 활동했던 그 친구는, 당시 신학생 신분이었고, 방학 때마다 우리와 함께 시간을 보낼 만큼 가까운 사이었다.


우리의 만남은, 절묘한 시기에 하느님이 내려주신 절대적인 좋은 기회가 아니었을까, 하고 나는 생각했다.    

 

나에 대한 친구 신부님의 레슨은 급속도로 진행하게 되었다. 왜냐하면 그 친구 신부님의 휴가 일정에 맞추기 위해서는 강행군이 될 수밖에 없었고 또, 내 입장을 생각해서라도 마음이 촉박하기는 마찬가지였기 때문이다.


그렇게 나의 공부는 시작되고, 때로는 밤늦은 시간까지의 강행군도 불사하며, 배움을 이어나갔다. 당연히 중간중간 실기를 병행하면서, 나름대로의 실력을 조금씩 쌓아 나가게 되었다.


물론 오랜 성가대 생활을 통한 갖가지의 음악 기초지식과, 특히 악보 독해력은 나에게 많은 도움을 가져 다 주었다. 친구 신부님은 무엇보다 4부 혼성 합창단의 각 파트별 성량과 음감을 catch 할 수 있는 귀를 열어야 한다는 것을 누누이 강조하며 나를 독려했고, 그에 대한 효과도 서서히 나타나기 시작했다.     


또 지휘자는 비주얼도 좋아야 한다면서, 지휘봉 사용에 대하여도 세심히 설명하기도 했었는데, 나에게는 8분의 6박자 지휘하기가 제일 어려웠던 기억이 지금도 새록새록하다. 반주 소리까지도 귀에 담아야 하는 정말 어려운 고비도 있었지만, 각고의 노력을 멈출 수는 없었다.


나의 레슨은 이렇게 마무리되었고, 이어서 나는 홀로서기를 시도하게 된다. 시간이 흐름에 따라 내 지휘는 차츰 성숙되어 가는 듯했고, 시나브로 그리고 서서히 제자리를 찾아가고 있었다.


그 후 나의 지휘자로서의 활동은 별문제 없이 그런대로 진행하게 된다. 이 배움의 열매는,  다시 한국으로 돌아온 뒤에도 계속되었으며, 이후 서울의 oo동 성당에서도 그 활동은, 얼마 동안까지 이어지기도 했었다.


배움의 효과가 이렇게 크고 오래갈 줄은 나도 예상하지 못했다.  이렇듯 내  황금시대에 괄목할만하고 특별했던 그 배움은, 내 생애의 한 획을 긋게 되고, 비록 교회 내 활동으로 국한된 것이기는 하나, 지휘자로서의 생활은 나 자신을 더 풍요롭게 만들었으며, 은퇴와 함께 그 활동은 자연스럽게 마무리되었다.     


‘호기심은 나이 들지 않는다’라는 82세 한 일본 할머니의 말에 나는 전적으로 동의한다.


은퇴 후 2년이 지난 지금도 나의 호기심과 욕심은 여전히 현재 진행형이다.     

은퇴 직 후부터 시작된 글쓰기는 오늘도 계속되고 있음은 물론이고, 그동안 나의 호기심은 모 신문사 명예기자 모집에 응시할 수 있는 용기를 주었으며, 현재도 그 직함을 유지하고 그에 따른 활동도 하고 있다.


호기심은 행동을 유발하게 하고 그 행동에 배움이 접목되면, 작은 희망들이 실제 열매로 응답할 수도 있다는 사실을 알았다.     

 

일찍이 하고 싶은 것이 많아도 할 수 없었던 지금의 우리 세대들은, 해보지 못한 것에 대한 앙금을 풀기 위해서라도, 늦었다고 생각하는 지금이 가장 빠른 시기임을 자각하고 한 번 시도해 볼 일이다.  

   

배움에는 노소가 따로 있을 수가 없다. 오로지 배움의 열매에서 뿜어져 나오는 그 아름다운 향기만이 있을 뿐이고, 그 향기는 이 세상을 밝고 윤택하게 할 것이다.    

그래서 선대를 살면서 뒤 따라올 우리의 후손들을 위해 무엇을 할 것인가를 생각하는, 정말 개념 있고 배움의 의지가 충만한 선배들이 되었으면 하는 마음 간절하다.  

                             2020.10월의 마지막 날

작가의 이전글 그대들 있었음에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