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허 베드로 Aug 09. 2022

산골마을 그리고 녹번동

내가 살고 있는 동네 이야기

                                                             

오늘도 역시나 무척 덥다. 베란다 유리창을 통해 엇비슷이 내려 쪼이는 햇볕은, 습하고 후덥지근한 공기를 집안으로 불어넣고, 아직은 이른 아침시간임에도 불구하고, 피부에 와닿는 끈적끈적한 육즙의 느낌은 불쾌하다 못해, 짜증이 날 지경이다. 지구환경의 변화가 걱정이라고 많은 이들이 말을 하고 있었으나, 깨금발 종종거리며, 팍팍한 생활을 이어가는 우리 서민들에게는, 별로 와닿지도 않았던 먼 나라 이야기 같았다. 그런데, 이제 좀 한 숨을 돌릴만한 이 나이에 , 달아오른 지구가  뜨거운 김을 아낌없이 분출시키며, 바로

 코앞에서 우리를 압박하고 있다. “앞으로 우리 손주들이 걱정이야” 평소에 버릇처럼 내뱉던 말을 아내에게 한마디 던지고, 나는 서둘러 집을 나섰다. 하늘은 오늘의 찜통더위를 미리 알려주는 듯 짱짱하고, 땅덩이는 작열하는 태양의 열기를 가감 없이 받아들이기 시작했다.


아파트 입구를 벗어나 ‘북한산 둘레길’ 쪽으로 방향을 잡았다. 시작부터 언덕인지라, 몇 걸음 떼지도 않았는데,  벌써 등줄기로 땀이 베이기 시작하고, 숨이 턱밑까지 차오른다. 의욕은 옛날과 별반 다를 바 없는데, 기력으로는 당할 재간이 없으니, 흐르는 세월을 누가 따라잡겠나? 그렇게 한 5분을 걸어 올라가니, 오른쪽으로 단독주택 몇 채가 나타나고, ‘산골마을’ 안내소의 간판이 저만치 보였다. 왼쪽언덕 담벼락엔 흰색 페인트를 바탕으로  검은 글씨로 정지용의 ‘녹번리’라는 시 구절이 삽화와 함께 씌어있고, 그 위쪽 조그마한 정자 옆에는 역시 그의 대표작이라 할 수 있는 시 ‘향수’ 전 구절이 조각된 현판이 비치되어 있었다. 그제야 이곳이 정지용의 기념초당 건립예정지라고 한 어느 향토신문 기사가 기억이 났고, 그의 마지막 집터가 녹번동 126-10번지(지금의 양광교회 뒤편)였다는 것도 어렴풋이 생각이 떠올랐다.

    

언제 나와 있었는지 웬 중늙은이 한분이 안내소 앞에서 담배를 피우고 있었다. 엉거주춤 서서 쭈뼛거리는 나를 힐끔 쳐다보면서, “누구 찾아오셨소?”하고 묘한 미소와 함께 말을 걸어왔다. “아! 그게 아니고 뭣 좀 여쭤보려 하는데요” 나는 그의 미소 속에 감추어진 속내를 염탐하듯, 그의 눈을 빤히 쳐다보며 대꾸했다. 이곳은 사람들이 찾아오기엔 좀 외진 곳이라 그는 좀 의아해하는 것 같은 눈치였고, 나 또한 생뚱맞기는 마찬가지였다. 녹번동으로 이주하여 가끔 들어 본 산골마을은 과연 어떤 곳일까? 근본적인 이 의문이 결국 나를 이곳으로 오게  만들었다.

며칠 전 주민자치회 분과회의에서 ‘녹번동 마을이야기’의 원고 문제가 화재가 되었었다. 한 동료위원의 말씀인 즉, 책을 출판하기 위해서는 여러 분야의 원고가 많이 나와야 하는데, 접수된 원고가 너무 적어 걱정이 된다 하였다. 그러면서 나를 쳐다보는 그의 눈길이 조금 남다른 것 같아, 괜한 신경이 쓰이고 또 은근히 부담감마저 들기 시작했다. 사실 나는 은퇴 이후 그 시답잖은 글쓰기에 매달려, 겨우 ‘자서전’ 출판을 마지막으로 하릴없는 백수늙은이로 세월만 보내고 있었다. 그나마 모 신문사 명예기자와 브런치 작가의 직함을 유지하며, 간간히 기사와 글을 투고하고 있던 차, 자치회 참여를 권유받고 오늘에 이르게 되었다. 그런데 ‘마을이야기’의 원고 이야기는 이와 또 다른 문제로 내게 다가왔다. 만일  쓴다면, 무엇을? 어떻게 쓸 것인가? 이 결정 또한 쉬운 일은 아니었다. 그러던 중  우연찮게 들리는 ‘산골마을’에 관한 이야기에 나는 순간 솔깃했다. 왜냐하면 평소 그곳에 대한 애기를 가끔 들어왔기 때문이었고, 또 까다로운 그 어떤 장르보다는 쓰기가 쉬울 것 같은 생각이 우선 들었다. 그러나 취재가 곁 들어야 하는 내용이라 조금 망설여지긴 했으나, 살고 있는 녹번동과 산골마을을 매치시켜, 마을이야기로 꾸며보면 어떨까 하는 구상을 하게 되었다. 녹번동에서 보낸 이십여 년의 세월이, 나에게는 가장 큰 격량의 시간이었고, 그것에 대한 자국을 어떤 방식으로든지 남기고 싶은 것이 솔직한 평소의 내 심정이었다. 어디 한 곳에서 이십여 년을 쭉 살아왔다는 것이 토박이를 제외하고는 그리 쉬운 일은 아니지 않은가?

     

1997.8월. 우리 가족은 ‘IMF’ 시대의 소용돌이 정 중앙에 서 있었다. 십 년 만에 다시 찾아온 대한민국은 경제폭풍에 휘말려 허우적거리고 있었으며, 우리 또한 그 와중에서 중심을 잃고 휘청거리기는 마찬가지였다. 어찌어찌하여, 지구의 반대편에서 짧지 않은 세월을 보내고, 이제  새 삶의 희망을 작은 불씨처럼 보듬고 돌아왔는데, 세상은 온통 뒤죽박죽으로 엉망이 되어가고 있었다. 그때 자리를 잡고 둥지를 튼 곳이 우연찮게 이곳 녹번동이었다. 지금도 아스라이 생각나는 당시 녹번동의 인상은 거리나 골목길이나, 그 어떤 곳을 지나가도 무질서를 연상케 할 정도로 지저분하고, 조금은 추하게 느껴졌었다. 검은 기와와 적 벽돌 그리고 초록색 방수시트, 도로 갓길로 늘어선 너저분한 가계들, 분별없이 버려진 각종쓰레기들, 골목길로 들어서면 주택 앞 여기저기 늘브러져 악취를 풍기고 있는 음식물 등, 하여튼 주변여건들이 썩 좋은 편은 아니었다. 당시 주민들의 열악하고, 고단한 삶의 하품들이 배어있는 듯, 곳곳에 그러한 모습들이 산재되어 있었다. 찌든 삶에 축 늘어진 내 모습과 잘 어울릴 것 같았던 이곳에서, 나는 인생의 여장을 하나씩 풀기 시작했다. 이곳에서 두 번째 나의 뿌리를 내리기 위해 삽을 쥔 손에 힘을 실었다.

      

지금은 ‘진흥마트’로 변해버린 ‘도원극장’에서 가끔 본 그때의 그 영화들은, 지친 영육 간의 피로를 풀어주던 유일한 위로거리였으며, 불광동천주교회에서 막 분리된 녹번동 신자들이, 임시로 마련된 가건물에서(현재의 로젠파크 빌라자리), 새 성전건립의 꿈을 키우며 미사를 봉헌하기도 했다. 지금은 진흥마트 옆 건물로 당당히 서있는, 녹번동성당의 모습이 참 자랑스럽게 느껴지기도 한다. 유일한 공공기관이었던 ‘국립보건원’은 지금의 혁신파크에 자리를 잡고 있었으며, 점심시간마다 우르르 쏟아져 나오던 공무원들의 활기찬 모습과, 덩달아 바빴던 주변식당가의 부산한 모습들은 녹번동의 혈류였고, 힘찬 맥박의 소리였다. 지금은 은평 구민들의 휴식공간으로서의 역할을 충분히 하고 있는 이 공원은, 향후 녹번동 최고의 명당으로 무한한 발전가능성을 품고 있다고 할 것이다. 또 한 이 주변으로 메이저급 아파트들이 들어서며, 옛날의 모습은 찾아보기가 힘들 만큼 변해 버렸다. 강산이 두 번이나 변한다는 이십여 년의 세월은, 주위의 환경은 물론이요, 주민들의 의식구조까지 바뀌게 하여, 지금의 자치회와 같이 주인의식의 기초가 되어 보다 나은 녹번동의 발전을 위한 원동력으로 거듭나고 있다. 지금은 잘 정비되어 ‘북한산둘레길’이라고 명명된 주위의 자연환경은, 녹번동을 북에서 남으로 병풍처럼 둘러싸고, 동네의 수호신으로 지금도 그 자태를 뽐내고 있다. 그 남쪽 끝자락에 자리 잡은 곳이 바로 이 ‘산골마을’이었던 것이다.


“마을이름이 산골마을이라고 하여 몇 가지 좀 물어보려 하는데요?” 나는 그를 쳐다보며, 다소 겸연쩍은 모습으로 첫 운을 띄웠다. 퉁명스러웠던 처음과는 달리 그는 조금은 상냥한 말씨와 미소로 나를 대해주기 시작했다. “아! 그 말이라면 나도 자세히는 모르지만 저리로 들어가서 안쪽에 비치된 안내문을 읽어보시면 돼요.” 하면서 왼손으로 한 쪽문을 가리켰다. 그러고 보니 안내간판 왼쪽 밑으로 실내로 들어가는 입구가 보였다. 나는 삐질삐질 배어 나오는 땀을 훔치며, 입구로 들어섰다. 한 세평이나 될까 말까 한 공간에는 특별한 것은 보이지 않고, 회원들의 모임공간으로 활용되는 듯 한 탁자 몇 개와 의자, 또 한쪽 켠 으로는 싱크대가 설치되어 간단한 식사정도를 해결할 수 있도록 되어있었다. 그가 말한 내 질문에 대한 대답은 그곳에서도 찾을 수가 없었으며, 나는 대충 눈인사로 그의 곁을 떠나, 마을 밑에 있는 길로 내려섰다. 이어서 또 다른 마을입구 안내판이 보였고, 그 앞에 서고 나서야, 비로소 나는 그 답을 발견할 수 있었다. 산골이란 한문으로 ‘山骨 ’(뫼산. 뼈골) 로서 뼈에 좋은 약재인 산골이 채취되는 지역이라는 의미에서 유래되었다고 한다. 원래 응암동 쪽과 한마을이었던 이곳은, 1972년 통일로가 개설되면서 둘로 쪼개져 있었는데, 지금은 생태연결다리가 두 마을을 이어주고 있다 하였다. 언뜻 연상되는 ‘산골짜기’의 산골과는 뜻하는 바가 전혀 다른 의미였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렇다면 그 ‘산골‘은 도대체 어떻게 채취되었으며, 지금도 생산이 계속되고 있는지, 또 ‘산골마을‘과의 연결고리는 어떤 지가 궁금했다.

    

나는 그곳을 벗어나 도로를 따라 홍제동 쪽으로 방향을 틀었다. 해는 이미 정수리 위에서 끊임없이 열기를 더해 주고 있었는데, 전부터 보아왔던 ‘산골판매소’를 가보기 위해 나는 경사로를 힘겹게 오르기 시작했다. 지금은 두 쪽으로 갈라진 산의 2부 능선쯤 동굴 같은 구멍이, 산 안쪽으로 난 것을 본 적이 있었으며, 그 입구에는 ‘산골판매소’란 팻말까지 붙여 놓은 것을 기 때문이다. 생태연결다리를 막 지나고, 드디어 그 입구가 눈앞에 나타나고, 산의 침출수가 비 오듯이 떨어지는 2부 능선 위쪽으로, 판매소의 동굴입구가 그 자그마한 입을 열고,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오르막은 돌을 깎은 계단식으로 되어있었으나, 산 위에서 떨어지는 물의 양이 만만찮게 많아서인지 계단은 물에 흠뻑 젖고 미끄러워, 오르기가 무척 조심스러웠다. 다소 음침하기 느껴지는 입구 쪽으로 가만가만 접근을 하니, 그 위쪽 안으로 희미한 불빛이 보이고, 이내 얼기설기한 철문이 나타나고, 그 너머로 오르는 또 다른 돌계단이 보였다.      


조금은 오싹하면서도 이상야릇한 호기심으로 철문을 밀고, 위로 향하는 계단으로 한 발자국 올라서며, “실례합니다.”하고 인기척을 내었다. 위에서는 아무런 기척을 느낄 수 없었고, 나는 동굴천장에서 떨어지는 물을 맞으면서 계단 위로 몇 걸음 올라섰다. 더운 열기가 가시면서 동굴 특유의 냄새와 한기를 느끼는 순간, 비로소 시야가 트이며 한 두 평쯤 되는 공간이 눈앞에 드러났다. 그리고 오른쪽 켠 으로는 책들과 신문뭉치로 잔뜩 쌓인 책상과 함께, 의자에 앉은 한 육십 대의 남자가 스마트폰에 고개를 박고 열심히 뭔가를 하고 있었다. 나의 기척을 느꼈음이 분명한데도 불구하고 그는 고개를 들 생각 없이 그 짓을 계속하고 있었다. 그러던 중 어느 순간  고개를 들어 힐끗 한번 나를 보는 듯하더니, 여전히 폰 만지기를 계속하는 것이 아닌가? 무시당하고 있다는 순간적인 생각에 그냥 갈까? 하는 맘이 안 드는 바는 아니었지만, 그냥 그를 응시하며, 한참을 그렇게 서 있었다. 한참을 더 주무르던 폰을 책상에 팽개치듯 놓은 그가, 이윽고 나를 바라보았고 턱을 추켜올리며 왜?라는 신호를 보냈다. 참으로 경우 없는 발칙한 그 태도가 너무나 황당했다. 치미는 화를 애써 누르며 우선 나의 신분부터 밝혔다. 그리고 찾아온 목적을 말하며, 산골에 대한 여러 가지의 알고 싶은 사항들에 대한, 그의 협조를 요청하기에 이르렀다.

     

결론적으로, 나는 그곳에서는 아무것도 얻을 수 없었다. 아니 애초에 그곳을 방문하는 것이 아니었지 않나 싶다. 그 사람의 무성의한 태도와 시큰둥한 대답은, 그 누구의 말처럼 산골을 판매하는 장사꾼에 불과하고, 좀 더 세세한 그 어떤 것을 기대했던 나의 바람은, 처음부터가 잘못된 것임을 알게 되었다. 산골은 필요한 사람에게 제공되어 접골에 효험이 있다는 것과, 지금도 산골은  채취되고 있다는 것. 그러나 실제로 그러한지는 확인이 안 될 뿐 만 아니라, 그것을 확인할 방법이 당장은 없었다. 山骨마을이라는 묘한 이름이 주는 어감만을 가지고, 그 무엇인가가 있지 않겠나 했던 나의 상상은, 처음부터 무모한 시도였는지도 모른다는 자조적인 생각마저 들었다. 이 마을에 산골이라는 이름을 붙인 시기도 2012년 이후라고 하니, 마을과 산골과는 사실상 아무런 연고가 없는 셈이다. 이리하여 나의 산골마을에 대한 막연한 기대와 상상은 허물어지고, 그 실체는 허상이었음이 드러나고 있었다. 도시재생사업(주거환경관리사업)이라는 허울 좋은 구호아래 몇몇 사욕단체에 의한 구호성 외침으로, 주민들의 마음을 들뜨게 한 적도 있었지만, 이제는 요란하던 그 소리마저 잠잠해지고, 지금은 조용하던 옛 마을의 원래 모습으로 돌아간 듯했다.

    

그러나 여기서 녹번동이라는 이름 유래를 살펴보자면, 산골과의 연관이 있음을 알 수 있다. 자연동(銅)으로 알려진 이 山骨은 원래 녹반(綠礬)이라 했고, 바위틈에 존재하는 철(Fe)이 묽은 황산(H2SO4)에 녹아서 만들어진 녹색의 결정물로서, 예로부터 의약품으로 많이 쓰였고 특히 접골에 효험이 있는 것으로 알려져 왔다. 그런데 이 녹반의 반(礬)은 ‘명반’을 뜻 하며, 옥편에서는 ‘번’으로도 풀이가 되고 있으니, 결국 세월이 흐르면서 녹번동으로 불리게 되었지 않았나 싶다. 또 한문으로도 원래 綠礬이 시간이 흐르면서 자연적으로, 碌磻으로 변했을 것으로 사료되며 또 조선시대에는 이 고개를 ‘녹번이 고개’라고 불렀다 하니, 전혀 근거가 없는 것은 아니었다. 어찌 되었든, 우리의 녹번동과 현재의 산골마을과는 옛날부터 같은 지역으로 명명되어 온 것은 틀림이 없는 사실처럼 보인다. 1955년도에는 녹번동의‘碌’ 자와 신사동의‘新’ 자를 합성한 녹신동이 되었다가, 1964년도에는 녹신 1,2동으로 분당되기도 했었는데, 1970. 5.5. 에 와서야 오늘의 녹번동이 되었다고 한다.

    

많이도 변해버린 현재의 우리 녹번동의 모습은, 옛날과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장족의 발전을 거듭했고, 지금도 그것은 현재진행형임을 실감할 만큼 빠르게 진보하고 있다. 숱한 시행착오와 개선을 통한 끈질긴 관민들의 노력은, 주거환경 개선사업으로 이어졌고 현재와 같은 변모와 일신된 모습의 녹번동으로 재탄생되었다. 우리가 누리는 이 자그마한 행복이 녹번동 전체주민 하나하나에게까지 그 혜택이 주어줬으면 하는 마음 간절하다. 동장님 이하 전주민의 단결된 모습으로 숙원사업인 ‘녹번 천 복원공사’ 및 ‘중학교유치’는 물론이고, 녹번동의 보물 같은 ‘혁신공원’을 활용할 수 있는 획기적인 방안이 하루빨리 제시되어, 서울 서북권의 으뜸 동네로서의 녹번동이 되었으면 한다. 오늘보다 나은 내일의 녹번동을 감히 기대해 본다.


사라지고 소멸되고, 잊혀 가는 모든 것들에 대한 그리움은 앙금처럼 남기 마련이다. 그것이 사람이든 동물이든 또 사물이든 간에 상관없이 말이다. 이것은 인간본능에서 기초한 순수한 마음에서 오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비단 그리움이 아닌 원망과 한이 맺힌 사연이라 할지라도 사라지는 것은 슬픈 것일지 모른다. 지저분하고 너저분했지만 또 이미 많은 시간이 흘러갔지만, 그때의 그 녹번동 모습이 그립고 보고 싶고, 뇌리에서 지울 수 없는 영상으로 남아 있을 수도 있을 것이다. 이 만큼의 거리를 달려 나오면서 빚어졌든 사람들의 그 많은 넋두리들을 일일이 모두 주워 담을 수는 없지만, 그 과정에서 마음의 상처를 받았던 많은 분들과 또 어쩔 수 없이 정든 동네를 떠날 수밖에 없었던  분들의 마음도, 우리 모두가 헤아려야 되지 않나 싶다. 그래서 그분들의 마음속에도 녹번동이 좋은 동네로 오래오래 기억되기를 빌어본다.      


                                                                          2022년 8월.





작가의 이전글 내일을 준비하며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