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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자가에 대기업다니는 김부장은 왜 일을 안 하는 걸까

한국 시니어 IT 회사원의 현실과 조직의 비효율

by 이서



최근 온라인을 뜨겁게 달구었던 화제의 드라마. '서울 자가에 대기업 다니는 김부장 이야기'. 나는 웹소설로 처음 흥미진진하게 읽었었는데, 넷플릭스 드라마로도 제작되었다. 많은 직장인에게 깊은 공감을 일으키나 보다. 사람들은 그 이야기 속에서 현실 속 꼰대 김부장을 보았다. 소름 끼치는 하이퍼리얼리티.


조금 아쉬운 건, 김부장의 모습을 있는 그대로 그려낸 소설 원작과 달리, 드라마는 어쩐지 엉뚱한 방향으로 흘러가는 느낌이었다. 갑자기 김부장 과거 서사를 넣는다던지, 엘리트 형의 그늘에 가려져 인정욕구가 있다는 설정을 넣질 않나. 한국 드라마 특유의 신파 감성이라고 할까나.


흔한 ‘한국의 아버지’ 서사를 삽입, ‘김부장이 불쌍하다'는 연민을 불러일으키려는 시도로 보이는데. 원작팬으로선 아쉽다.(현재 4화까지 봤습니다.) '김부장이 불쌍하면, 계속 그런 김부장 아래에서 일하면 됩니다.'라고 말하면 너무 'T'같은 태도인 걸까. 그런 의미에서, 원작 소설을 읽으시길 추천드립니다. 훨씬 재미있어요. 아무튼.




왜.

대체 왜.


우리는 현실에서 멋진 시니어 김부장을 만날 수 없는 걸까. 미국이나 유럽 등 선진국 드라마에서 보듯, 지혜와 경험을 바탕으로 팀에 기여하고 다정하고 너그러운, 멋진 시니어 회사원들을 좀처럼 만날 수 없다. 왜 한국 사회와 기업에서는 계속해서 조직의 핵심 동력으로 일하는 존경할만한 시니어를 찾아보기 어려운 것일까. 이 질문을 이해하려면 한국 조직 문화의 깊은 병폐를 쳐다봐야 한다. 싫지만 그래야 한다.


우리가 들여다봐야 할 것은, 바로 한국 기업 문화에 뿌리내린 기형적인 연공서열 구조다. 직급과 급여가 개인의 성과나 역량보다는 나이와 근속연수에 따라 결정되는 비합리적인 구조. 게다가 나이 많은 사람을 공경해야 한다는 유교 사상이 끈적하게 달라붙은 사회 인식이 조직 내 권위를 나이와 직결시킨다.(아.. 이거, 글 쓰면서도 답답하다) 직급과 관계없이 나이가 많으면 선배이고, 선배는 곧 존중받아야 한다는 인식이 강하게 자리 잡고 있는 사회문화.


회사가 급변하는 환경에 맞춰 시니어 팀장급 직원을 팀원으로 내리거나, 혹은 성과가 뛰어난 후배가 먼저 리더로 진급하여 상사가 될 때 바로 '그 문제'가 발생한다. 인사 제도상 있을 수 있는 일이지만, 한국의 문화에서는 나이 어린 리더가 나이 많은 팀원에게 명확하게 업무를 지시하는 것이 심리적으로 매우 어렵다. (니가? 감히? 나한테?) 반면 시니어 팀원 역시 자신의 경험을 실무 역량으로 전환하기보다, '연차가 되면 일을 안 해도 된다'는 생각에 사로잡혀 업무를 회피/전가하는 경우가 비일비재하다.




이런 어색한 위계질서를 피하기 위해 회사들은 기괴한 업무 방식을 만들어낸다. 후배 리더 아래에 있는 시니어에게 본래 실무가 아닌 일종의 '관리' 업무를 시키는 거다. 이들은 공식적으로는 팀원이지만, 실질적으로는 팀원들을 '압박'하는 사람 역할에 머무른다. 주로 엑셀이나 문서로 일정을 관리하고 보고서를 취합하고 실무를 닦달하는 일에만 집중하는 것이다.


<회의시간>
김부장 : 최과장이 ㅇㅇ작성하고, 박대리는 ㅇㅇ챙기고, 이사원은 ㅇㅇ정리하는 걸로 진행하자
박대리 : ....그럼 부장님은요?
김부장 : 나? 나는 너희한테 업무 지시하고 전체적으로 관리하잖아?


결국 팀원들 사이에서는 팀장 밑에 또 다른 소팀장이 생긴 것이나 마찬가지라는 불만이 터져 나온다. 심지어 "팀장이 두 명이야?"라는 볼멘소리도 공공연하게 나오게 된다. 이 관리 역할의 시니어는 종종 "나는 관리하는 사람인데, IT기술이나 실무의 디테일 같은 건 몰라도 되지"라는 말을 스스로의 역할 정당화를 위해 내뱉는다. 서비스 정책엔 관심도 없다. 그런 건 실무한테 시키면 되니까. 결과적으로 팀은 명확한 권한과 책임 분리 없이 두 명의 리더 밑에서 일하는 느낌을 받는다. 비효율성이 극대화되는 건 당연하다. 머리가 두 개인데 일이 제대로 될 리가.


많은 회사, 특히 조직 규모가 크고 변화에 둔감한 대기업(그중 제조 대기업이 특히 심하다)들은 이러한 모호하고 비생산적인 역할을 'PM(Project Manager)'이나 'BRM(Business Relationship Manager)' 등 그럴듯한 이름으로 부르며 이 기형적인 구조를 방치한다.


'응? 우리 회사 PM님은 엄청 바쁘시고 일도 잘하시는데?'라고 생각하실 분들이 있을 수 있다. 혹시 IT서비스 기업에 다니시는 분들은 착각하지 마시길. 여러분들이 생각하는 그런 PM이 아니다. 여러 프로젝트를 동시에 관리하며 인력, 일정, 정책은 물론이고 심지어 종종 기술적인 문제까지 관여하고 책임지며 프로젝트에 대한 오너십을 가지고 스스로 문제를 해결하고 완수를 이끄는 그런 실무형 구루급 PM이 아니다. 기술을 아예 모른다니까요. 그들이 원하는 건 오직, 정년을 꽉 채워 퇴직하는 것.




나이를 중시하는 연공서열, 엄격한 입사기수 문화(공채 몇 기), 그리고 사수/부사수 등 선후배 문화라는 고질적이며 끈질긴 병폐가 사라지지 않는 한, 이 비효율적인 구조는 근본적으로 바뀔 수 없다. (대체 회사에서 '선배님'이라는 호칭이 왜 필요한지 도무지 모르겠다. 심지어 '형님/동생'으로 부르기도 하더라. 맙소사.) 싹 뒤집어엎지 않는 한 절대로 바뀌지 않는다. 대기업일수록, 거기에 제조(공장) 중심 기업일수록 이 문제는 더욱 심각한 상태다. 거의 썩어있다고 봐도 무방하지 않을까.


현재 한국 사회와 기업 문화의 관성으로 보아 이 문제를 단기간에 해결하기는 어려울 것으로 보인다. 문화를 건드릴 수 없으니, 기업들은 속 편하게 희망퇴직이니 구조조정이니 하는 것들로만 정리하고 싶어 한다.


중요한 건 '문화'다. 연차고 뭐고, 리더든 시니어든 이제 모두 같이 실무를 해야 하는 시대다. AI가 이미 우리 옆에 앉아있다니까(?) 우리 곁의 수많은 '김부장'들, 뭐 하루이틀 보아온 일이 아니라 이미 다들 시큰둥해지긴 했지만. 이 문제를 해결하지 않고선 한국 기업이 세계적인 수준으로 올라가긴 쉽지 않을 거다.


명심하자. 앞으로 고령인구가 많아질수록 점점 더 문제는 심각해질 테니.


부디 건투를 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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