혜화동 전통의 순댓국 강자, '순대실록'을 찾았다. 대학로를 지키는 터줏대감 같은 곳이다. 오래되었다고 해서 노포를 떠올렸으나, 낡은 노포의 정취보다는 프리미엄의 깔끔함이 묻어난다. 가끔은 이런 현대적인 세련됨이 국밥의 투박한 맛을 가리는 게 아닐까 의구심이 들 때도 있다. 이것도 선입견이겠지. (나의 노포 사랑은 집착에 가깝다.)
좀 찾아보니, 순대실록의 뿌리가 꽤 깊고 단단하다. 육경희 대표가 조선 후기 조리서인 <시의전서>를 바탕으로 전통 순대를 복원해냈다고 한다. 1800년대의 레시피를 현대에 다시 세웠으니, 이름 그대로 순대의 ‘실록’인 셈이다. (사실 순대 스테이크라는 이색 메뉴로 더 유명해진 곳이기도 하다.) 브랜딩에서 '이야기'가 얼마나 중요한지 아는 사람들은 흥미를 느낄만한 스토리다. 나도 그래서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입장했다. 공간이 꽤 넓고 쾌적하다. 다닥다닥 붙어 앉아 옆 사람의 대화를 반찬 삼아 먹는 시장 국밥집과는 결이 조금 다르다. 자본의 향기가 물씬 느껴지는 질서 정연함.
밑반찬이 깔렸다. 깍두기, 양파, 부추. 국밥집의 기본이다. 깍두기의 익힘 정도를 보며 이 집의 공력을 짐작해 본다. 새콤하군.
나왔다. 순대국밥. 한 숟갈 떠보니 진한 육수 맛이 혀끝에 닿는다. 오호? 묵직한 내공이 느껴지는 첫인상이다. 이것이 조선의 맛?
다대기가 안에 몸을 숨기고 있다. 풀기 전의 국물은 뽀얗다.
고기가 듬뿍 들어있다. 주인장의 인심인지, 표준화된 시스템의 결과물인지는 중요하지 않다.
순대는 예상대로 일반 당면 순대가 아니다. 선지와 고기(?)가 꽉 찬 진짜 순대다. 근데 이 순대 어디서 맛본 느낌인데, 아 이거 소시지 맛이다. ㅋㅋ 소시지 맛이 난다. (장점이라고 봐야 하는 걸까.)
거침없이 다대기를 풀고 부추를 투하했다. 나는 무조건 부추를 넣는다. 피를 맑게 해 준다는 효능을 굳게 믿기 때문이다. 실제로 효과가 있는지는 알 길이 없으나, 플라시보 효과라도 누리면 그만이다. 이렇게, 나이가 들면 미신에 기대게 된다.
한창 맛있게 먹는데 문득 기시감이 스친다. 이 국물, 분명 어디선가 먹어본 맛과 향이다. 익숙한데 낯설다. 혀는 기억하는데 뇌가 인덱싱을 거부하고 있다. 참 답답한 노릇이다. 나이가 들수록 이런 일이 잦다.
이 집 쌈장이 맛있다. 보통의 시판 쌈장과는 다르다. 자극적이다. 고기의 맛을 탄탄하게 받쳐준다. 야채와도 잘 어울린다. (이런 작은 디테일이 맛집의 한 끗 차이를 만든다.)
고기도 따로 찍어 먹고, 양파도 푹 찍어 베어 문다. 중독성 있는 맛이다. 젓가락질이 멈추지 않는다. 국물과 건더기가 조화를 이루며 입안을 가득 채운다.
다시 국물을 들이켜본다. 아, 이게 뭐지. 백암농민? 약수? 해남? 아니면 청와옥이나 화목? 머릿속 데이터베이스를 뒤져봐도 매칭되는 곳이 없다. 분명 먹어본 맛인데 정체를 모르겠다.
반찬이 떨어지면 직접 리필존으로 가면 된다. 시스템이 잘 갖춰져 있다. 나는 양파를 잔뜩 가져왔다. 국밥의 기름진 맛을 잡아주는 데는 양파, 마늘만 한 게 없지.
이 속도라면 금방 다 먹는다. 이제는 정말 생각해내야 한다. 이대로 문을 나서면 오늘 밤 잠을 설칠 것만 같다. 뇌가 풀스캔한다. 집중하자. 감각의 퍼즐을 맞춰야 한다.
찾았다. 정답을 알아냈다. 이건 삼양라면 맛이다. 삼양라면 스프 특유의 구수하고 짭짤한, 햄 향기와 비슷한 그 맛.(소시지맛이 나는 순대와 연관이 있으려나) 어쩐지, 어디서 많이 느껴본 인스턴트의 친숙함이더라니. 속이 후련하다. 응? 조선 전통의 맛이... 삼양라면? ㅋㅋ
다 먹었다. (내 미각이 찾아낸 최상단 데이터가 결국 라면 맛이었다는 사실이 조금 허탈하긴 하지만.)
어디서 먹어본 맛인데 생각이 안 나면 참 답답하다. 여기저기 맛집을 찾아다니다 보니 머릿속에 데이터는 쌓여가는데, 제대로 인덱싱이 안 돼서 발생하는 에러다. 메모로도 해결이 안 되는 영역이다. 텍스트는 내 미묘한 감각의 결을 온전히 담아내지 못하기 때문이다. ‘안성탕면 맛’이라는 단어 뒤에 숨은 수만 가지 미각의 변주를 어떻게 기록할 수 있겠는가.
나는 메모를 좋아한다. 내 노션은 이미 기록들로 포화 상태다. 하지만 십수 년간 기록하며 깨달은 진리가 하나 있다. '단순히 저장만 하는 것은 의미가 없다'는 것이다. 적재적소에 알맞은 정보를 즉시 꺼내올 수 있는 것이 진정한 정보력이다. 사용할 수 없는 정보는 가비지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국밥 한 그릇 먹고 정보의 인덱싱까지 논하다니, 나도 참 피곤하게 사는 사람이다. 싶다. 그래도, 본질을 잊지 않는 것, 그리고 그 본질을 필요할 때 꺼내 쓰는 것. 인생도 국밥도 결국 그 싸움이 아닐까 싶다. 그래서 우리는 글을 써야 한다. 글을 쓰는 것만큼, 뇌를 정리하고 저장된 정보를 알차게 쓰는 방법은 없다.
아무튼.
오늘도 잘 먹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