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미안 허스트. 이름만으로도 세상이 시끄러운 인물이다. 돈에 미친 예술가라는 꼬리표가 항상 그의 등 뒤에 따라다닌다. 자본주의의 정점에서 예술을 소비품으로 전락시켰다는 비판은 늘 유효하다. 나도 어느 정도 동의하는 바다. 하지만 그를 비난하며 소비하지 말자는 외침은 역설적으로 그가 얼마나 거대한 시장인지를 증명할 뿐이다. (욕을 먹는다는 건, 그만큼 영향력이 있다는 뜻이니.)
나는 보통 궁금한 건 참지 않는다. 대체 어떤 대단한 것을 만들어냈기에 전 세계가 이 난리인가 싶었다. 누군가 보지 말라고 말릴 때일수록 더 눈으로 직접 확인해야 직성이 풀린다. 한국에서 그의 작품을 직접 감상할 기회는 흔치 않다. 기회가 왔을 때 잡는 것, 그 타이밍을 놓치지 않는 것이 중요하다.
아내와 함께 삼청동 국립현대미술관으로 향했다. 인파가 몰리는 주말을 피해 평일 퇴근길에 서둘러 발걸음을 옮겼다. 매표소 앞의 긴 줄은 허스트에 대한 대중의 양가적인 감정을 보여주는 듯했다. 기다림 끝에 티켓을 손에 쥐었다. (전시는 역시 평일 저녁에 봐야 제맛이다.)
현대 미술은 볼 때마다 참 '뻔뻔하다'는 생각이 든다. 물론 내가 무식해서 일 수도 있겠다. "일단 유명해져라, 그러면 당신이 똥을 싸도 사람들은 박수를 칠 것이다"라는 앤디 워홀의 격언이 계속 머릿속에 떠올랐다. 일단 유명해진 후, 아무거나 전시장에 가져다 놓고, 근사한 텍스트를 발라내면 그것이 곧 예술이 되는 시대다. 여전히 적응은 안 되지만, 그렇다고 고개를 돌리진 않는다. 모르는 것과 알고도 보지 않는 것은 엄연히 다르기 때문이다. 열심히 보다 보면 경험이 쌓여 취향이 생길 테지.
전시장 안은 예상외로 쾌적했다. 작품과 작품 사이의 간격이 넓고 층고가 높아 숨을 고를 여유가 충분했다. 밀도가 낮은 공간은 작품의 무게감을 온전히 느끼기에 적합한 환경이다. 복잡한 생각들을 잠시 내려놓고 오직 눈앞의 오브제에만 집중하기로 했다. 관조의 시작.
드디어 그 유명한 상어와 마주했다. 제목은 <살아있는 자의 마음속에 있는 죽음의 물리적 불가능성>이다. 거대한 포름알데히드 수조 속에 갇힌 죽은 상어는 삶과 죽음 그 사이 어디쯤에 있어 보인다. 기묘한 생동감을 뿜어낸다. 입을 쩍 벌리고 있어서 그런가 싶다. 죽음을 박제함으로써 역설적으로 삶의 유한함을 들춰내는 방식이다. (죽음은 멀리 있지 않다. 바로 옆 수조 속에 있을 뿐.)
<천 년>이라는 작품 앞에서 발길이 좀 무거워졌다. 뭔가 싶었다. 유리 상자 속에서 썩어가는 소 머리와 그 위를 맴도는 파리 떼, 그리고 살충기가 놓여있다. 파리는 생존을 위해 피 냄새를 쫓지만, 그 끝에는 살충기의 허망한 죽음만이 기다리고 있다. 탄생과 섭식, 그리고 소멸로 이어지는 잔인한 순환의 고리. 이것이 우리가 외면하고 싶은 생의 적나라한 민낯이다. 구역질이 나는 작품 앞에서 나는 무언가 조금 느낄 수 있었다.
징그러운 것만 보다가 만난 벚꽃 시리즈는 의외의 위로를 건넸다. 반갑다. 캔버스 위에 두껍게 덧칠해진 물감의 질감이 눈을 즐겁게 한다. 회화와 조각의 경계가 무너진 느낌. 이렇게 물감을 아주 두껍게 칠해서 입체감을 살리는 방식을 '임파스토(Impasto)' 기법이라고 부른다던데. 나는 이렇게 이미지와 물성이 중첩된 상태를 좋아한다. 사람도 마찬가지다. 명확하게 규정되는 이보다, 그 경계의 틈새가 모호한 사람이 훨씬 매력적인 법이다.
수천 개의 알약이 줄지어 도열한 선반 앞을 지났다. 데미안 허스트가 약에 집착하는 이유는 현대인이 종교 대신 과학과 의학을 맹신한다는 점을 꼬집기 위해서라던데. (종교 맹신은 괜찮고?) 약이 우리를 구원해 줄 것이라는 믿음이 강하기 때문인 것 같다. 그렇게 몰핀에 중독되고, 인간은 서서히 약에 의존하게 되었다. (미국의 현재 상황을 보라.) 전시된 메스나 의료기기 역시 같은 맥락의 도구들로 보인다. 결국 인간은 무엇에라도 의지해야만 죽음의 공포를 견디는 존재인가 보다.
2008년작 <천사의 해부학>은 대리석의 차가운 미학을 보여준다. 고결한 천사의 형상을 하고 있지만, 가까이 다가가 보면 한쪽 면은 근육과 장기가 적나라하게 드러나 있다. 성스러움과 세속적인 육신이 한 몸에 공존하는 아이러니. 사치품을 휘감은 겉모습이 아무리 화려해도 우리 내면은 결국 단백질과 지방의 덩어리일 뿐임을 상기시킨다. 기억하자. 인간도 결국 동물일 뿐.
자신의 가죽을 벗겨 팔에 걸치고 서 있는 동상은 <성 바르톨로메오, 절묘한 고통>이다. 순교의 고통을 예술적 승화로 표현해 낸 작품이다. 살갗이 벗겨진 채, 자신의 피부를 들고 서 있는 그 당당함은 처절하면서도 어쩐지 숭고하다. 우리는 각자의 삶에서 얼마나 많은 껍데기를 벗겨내며 버티고 있는가. 고통은 때로 가장 단단한 인격체를 빚어내는 재료가 된다.
전시의 정점은 역시 그 유명한 <신의 사랑을 위하여>였다. 8,601개의 다이아몬드로 뒤덮인 인간의 해골. (모형이 아니라 실제 인골을 사용했다.) 죽음의 상징인 두개골이 자본의 상징인 보석으로 치장된 모습은 기괴하지만 아름답다. 끝없는 욕망의 끝에서 우리는 무엇을 남길 것인가에 대한 허스트 식의 냉소다. 겉은 화려하고 비싸 보이지만, 결국 죽은 자의 머리뼈일 뿐이다. 우린 그걸 이해해야 한다.
결국 누군지도 모르는 인간의 해골일 뿐인데. 인골을 둘러싸고 열심히 사진을 찍는 수많은 사람들. 이 모습 자체가 묘하고 재미있다. (물론 나도 이들 중 한 명이었다.) 데미안 허스트도 이런 장면을 의도했을까. 나에겐 기묘한 이 광경 자체가 현대 미술로 보였다.
불교의 근간이 되는 가르침 중, 제행무상(諸行無常)이 있다. 세상의 모든 것은 변하고 결국 소멸한다는 진리다. 태어난 모든 존재는 예외 없이 죽음이라는 마침표를 향해 간다. 우리는 이를 망각하고 허영에 찌든 돈과 명예를 좇고 되지도 않는 영원을 꿈꾸며 스스로를 고통 속에 가둔다.
소멸은 끝이 아니라 자연스러운 순환의 일부이며, 비워짐을 통해 새로운 흐름을 만드는 필연적인 과정이다. 그 누구도 피할 수 없다. 형체가 사라진 자리에 남는 것은 허무가 아니라, 찰나의 생을 더욱 귀하게 여기라는 귀중하고 무거운 가르침이다. 영원한 것이 없음을 담담히 받아들일 때, 비로소 현재라는 유일한 실체를 마주할 용기가 생긴다. 무엇에 이 소중한 시간을 할애해야 할지 명확해진다. 결국, 죽음은 삶을 가장 선명하게 증명하는 도구다.
전시는 결국 '메멘토 모리'라는 한 문장으로 수렴된다. 죽음을 기억하라는 그 오래된 경고를 허스트는 가장 자극적이고 비싼 방식으로 외치고 있다. 덕분에 비워진 머릿속에 삶에 대한 미련 대신 올바른 태도로 하루하루를 소중히 살아야겠다는 각오가 차오른다. 잊지 말자. 우리는 늘 죽음을 생각해야 한다.
오늘도 잘 봤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