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년 동안 미술관을 찾아다녔습니다

살면서 한 번은 숨을 다듬어야만 하는 순간이 올지도 모르니까요.

by 사이

한참 오래전입니다. 대학을 갓 졸업하고 직장을 구하기 전, 1년 간 유럽의 미술관을 찾아 여행을 떠난 적이 있어요. 작게나마 개인 채널에 그 경험을 공유한 덕분인지 한동안은 예술에 조예가 깊은 사람 이미지가 각인되어 있더라고요.


이미지의 힘은 꽤나 세서, 여행의 기억이 희미해져 갈 즈음 친구의 친구에게 한 통의 연락을 받았습니다. 회사 밖의 다양한 분야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는 스터디를 함께 만들어보지 않겠냐면서요. 이공계 또는 상경계열을 전공으로 한 직장인 친구들 사이에서는 그나마 제가 제일 잘 안다며 강제로 미술, 건축, 음악 등 예술 분야를 담당하게 되었습니다.




이 친구들과 처음 미술 주제로 스터디를 하기로 했을 때, 미술에 전혀 흥미가 없는 친구들과 어떤 이야기를 해야 할까 고민을 많이 했습니다. 완전히 저관여 아니 관여도가 없는 사람들을 대상으로 어떻게 해야 할지 참 난감했습니다. 아무리 생각해도 주제 선택 자체가 잘못된 게 아닌가 싶었어요. 그러다 왜 전공자도 아닌 평범한 제가 미술을 좋아하기 시작했는지에서 출발하기로 했어요.


성인이 된 이후로, 아니 어쩌면 그 이전부터 줄곧 근대와 현대 사이에서 방황하고 있습니다. 단순하고, 명료한 정언명령에 집착하는 나와 구체적이고 파편화된 에피소드에 몰입하는 나. 자본주의 사회에 단단히 서기 위해 누구보다 빠르게 문제를 해결하는 나와 기계적인 세상에 계속해서 불편함을 느끼고 반항하고 싶은 나. 늘 그 사이에서 괴로웠어요.


아마 미술을 처음 즐기게 된 것은 현실에 발붙이고 싶지만, 매 순간 나부끼는 마음을 달래기 위해서였던 것 같아요. 부모님이나 친구들, 그리고 스스로조차 이해받지 못하는 ‘세상을 향한 알 수 없는 반항심’을 어찌해야 할지 모를 때, 몇백 년 앞서 비슷한 고민을 한 예술가들에게 제 마음을 이해받는 기분이 들었어요. 계속해서 세상을 불편해하고 질문을 던져왔던 사람들의 이야기와 작품이 내게 나만 이상한 건 아니라는 안도감과 세상을 계속해서 불편해할 수 있는 용기(?)를 주었달까요.


양서류는 호흡기관이 피부에도 있다고 하더라고요. 온몸으로 숨을 쉬려면 좀 피곤하지 않을까 인간의 마음으로 오지랖 넘치게 생각했어요. 한편으로는 온몸으로 불편함을 느끼는 내가 포유류가 아니라 양서류인 건 아닐까 말도 안 되는 상상을 하기도 했고요. 감히 예술가들도 비슷한 생각을 하지 않았을까 생각합니다. 보통 사람 눈에는 유별나고 피곤한 중2병처럼 보일지도 모르지만, 불편함을 알아채고 표현하지 않으면 숨쉬며 살아갈 수 없는 걸 어쩌겠어요.




사람마다 시점은 다를 수 있겠지만 보통 사람에게도 세상이 불편한 날들이 온다고 생각해요. 누군가는 그것을 기민하게 알아채고, 표현하겠죠. 또 다른 누군가는 애써 묻어두고 피하려고 할 테고요. 세상 또는 자신을 파괴해버리기도 하고요.


저는 사실 피할 수 있다면 피해도 좋고, 없애버릴 수 있다면 그래도 된다고 생각하지만 그런 행운(?)은 아무에게나 주어지지 않는 것 같아요. 대부분의 사람에게 살면서 한 번 혹은 그 이상으로 의식적으로 숨을 다듬어야만 하는 순간이 오는 것 같아요.


그런 날에 예술가들의 호흡법을
알고 있는 것이 도움이 될지 몰라요.

쓸데없다고 치부했던 사람들의 이야기가
어느 날 삶에서 맞이한 절망 속에서
난 데 없는 위로가 될 수 있지 않을까요.


여기까지 생각이 미쳤고, 우리 일상에서 가장 가까운 예술은 마음을 터놓을 수 있는 친구들과의 대화가 아닐까 생각했어요. 불편함에 대해 가치판단을 배제한 이야기를 나눌 수 있다면, 그래서 나만 이상한 건 아니라고 공감받을 수 있다면 그게 제가 미술에 빠진 이유니까요. 복잡다단한 미술사를 잘 몰라도 그런 대화가 있는 시간으로도 충분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바로크와 로코코 시대의 작품 이야기를 꺼내자 여기저기 내적 하품이 시작되었어요. 그래도 마지막 토의 시간에 각자 일상에서 느끼는 불편한 경험을 꺼내 보여주고 서로의 이야기에 공감하는 모습을 보며 이만하면 충분하다고 자족했습니다.


집으로 돌아와 친구들이 각자 좋았다고 공유해준 작품을 찾아보며 남은 주말을 보냈어요. 로스코의 그림을 찾아보고, 요가가 끝나고 요가원 앞 카페에 앉아 영화 <소공녀>를 보면서요.


영화의 주인공 미소는 월세방을 포기하더라도 위스키와 에쎄, 그리고 남자 친구는 포기할 수 없다고 했어요. 제게는 아마 불편함을 마주하고 그에 대해 이야기 나누고 쓰는 행위가 술과 담배만큼 소중한가봐요. 휘발되는 일상의 경험들을 좀 더 자주 남겨두어야겠습니다. 언젠가 이유 없이 또 숨 쉬는 게 어려워지는 날이 오면 꺼내볼 수 있게요.


2020년 4월 27일에 쓰고, 2022년 9월 16일에 편집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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