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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만에 얼굴 보니 좋아 보이네. 규인."
신속희는 정종을 헬렌의 잔에 따랐다. 헬렌이 술을 마시지 않는다는 걸 잊은 모양이었다.
"이렇게 만나자고 한 건, 특허 때문이야. 회사 매각 조건 중 가장 핵심이 특허 때문이었어. 특허만 보고 인수했다고 해도, 무방하지. 그런데 그 보따리 속이 비었다는 사실을 자네와 나는 알잖아. 그 사실이 드러나면, 인수자를 기망한 죄로 무척 곤란하게 돼."
낮은 목소리로 신속희가 말했다.
"자네도 거짓으로 특허 낸 걸로 징역을 살 수도 있어. 아니면 벌금을 내겠지. 지금 회사에 남아 있으면 계속 특허와 관련해서 질문받을 거야. 전전긍긍하면서 버티다, 징역에, 벌금에, 해고까지 당할 수도 있어. 모두 시간문제야. 그럴 바에는 차라리 지금 천만 원 받고 다른 일자리 찾아보는 게 낫지 않을까."
비열한 목소리로 신속희가 말했다.
"친구가 운영하는 회사가 있어. '리세일러'라고. 알지?"
리세일러는 동명의 패션 리커머스 앱을 운영하는 회사였다. 품질 관리 부분에서 이슈가 있긴 하지만, 전반적으로 서비스 만족도가 타 리커머스 플랫폼에 비해 높은 앱이었다. 전문 스포츠 브랜드에서부터 SPA 브랜드까지 다양한 종류의 옷을 최대 90% 할인된 가격으로 구매할 수 있었다. 비싼 옷을 저렴한 가격으로 구매하는 것이 앱의 주된 셀링 포인트였지만, 헬렌과 아내는 전적으로 저렴한 옷을 더 저렴한 가격으로 구매하는 목적으로 앱을 이용했었다. 지금 입고 있는 셔츠도 리세일러를 통해 구매한 만 원짜리 셔츠였다.
"거기에 마침 백엔드 개발자 자리가 비었어. 내가 이미 괜찮은 사람 안다고 말해뒀어. 간단히 인터뷰만 하면, 무리 없이 받아줄 거야."
모든 불행의 근원이 다시 모든 불행의 근원이 될 제안을 던졌다. 하지만 신속희의 가정은 모두 옳았다. 퇴사를 하면 특허에 관해서 질문받을 필요도 없고, 의심을 사지 않을 수 있다. 다른 곳으로 이직하는 것이 자신을 지키는 가장 안전한 방법이었다. 문제는 이직이 가능한가였다. 아내는 임신했다. 월급이 잠시라도 끊기면 안 된다. 지금 당장 천만 원을 받는다고 해도, 다시 일하지 못한다면, 의미가 없었다. 리세일러에 넣어주겠다는 말도 장담할 수 없었다. 백엔드 개발자 자리가 났다는 사실이 거짓일 수 있었고, 간단히 인터뷰만 하면 받아줄 거라는 말이 거짓일 수 있었다.
무엇이 최악인지 가늠하기 어려웠다.
"쉬운 선택은 아니라고 생각해. 그래도 아버지 이름에 빨간 줄 그이는 것보다는 뭐든 낫지 않을까."
비열하게 신속희가 말했다.
차려진 음식은 먹을 기회가 거의, 어쩌면 전혀 없는 값비싼 음식들이었지만, 입맛이 싹 사라졌다. 그러나 그렇게 무뎌진 혀도 음식이 맛있다는 걸 느낄 수 있었다. 그만큼 훌륭한 전복 튀김에, 연어회, 광어 지느러미, 초당옥수수 깨두부였다. 헬렌은 하나하나, 꼭꼭 씹어 먹었다. 허기진 배로 돌아가다, 쓸데없이 간식으로 배 채우는 일을 막기 위해서였다. 그 돈도 아까운 상황이었다. 식사를 마치고, 신속희가 카운터로 가 계산했다. 회사가 쓰러졌어도, 전 대표는 아직도 사치를 부릴 수 있었다. 가게를 나가기 전 대표는 메신저로 천만 원을 헬렌에게 보냈다. 헬렌은 송금받기를 누르지 않았다.
"3일까지 열어둘게."
돌아오는 길, 지하철이 유난히 흔들거렸고, 집으로 가는 골목길 오르막에서, 헬렌은 무릎 꿇고 화단에 토했다.
불과 몇 시간 전까지 최고급 요리였던 것들이 일그러진 모습으로 흘러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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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차 회의에서 라선이 고객 인터뷰를 통해 검증한 사실을 공유했다.
"여기 인터뷰 내용을 바탕으로 짠 MVP의 IA예요."
라선은 리코가 제시했던 핵심 기능에 매물 정보 및 임장 노트 내용 검색 기능과 필터링 기능을 추가한 구조도를 스크린에 띄웠다.
"그러니까 단순히 매물 정보를 끌어오는 것에서 끝나는 게 아니라, 각 정보로 필터링을 걸 수 있어야 하고, 노트 검색 시에도 같이 떠야 한다는 거죠?"
세안나는 스크린 대신 노트북에 띄운 자료를 보며 말했다.
"네 단순히 매물 정보를 끌어들이는 것만으로는 고객을 만족시키기에 부족해요."
불편을 쏟아낸 인터뷰이의 대답을 떠올리며, 라선이 대답했다.
"그럼 위 구조도를 바탕으로 실제로 작동 가능한지 이제 PoC를 해보면 되겠네요."
"UX와 UI는 어떻게 하면 될까?"
고론이 자신 없는 목소리로 라선에게 물었다.
"개발팀이랑 소통하면서 최적화시켜야 할 듯해요. 저도 물론 같이 보면서."
"완전히 처음부터 하려고 하니, 너무 막막한데. 이걸 어쩐다..."
고론이 웨일을 힐끔힐끔 보았다.
"제가 가이드를 드릴게요."
고론과 눈이 마주친 웨일이 말했다.
"부자고고 디자인 요소를 최대한 살려주세요."
"네?"
무슨 뜻이 알 수 없다는 표정을, 고론이 지었다.
"부자고고의 플러그인처럼 보일 정도로 말이죠?"
라선은 웨일의 의도를 알아차리고 말했다.
웨일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표절 시비에 걸리지 않을까요?"
고론이 조심스럽게 말했다.
"서비스 성격도 다르고, 경쟁사도 아니에요. 보완하는 앱에 가깝죠. 윤리적인 측면에서는 죄책감을 느낄만해요. 하지만 디자인 컴포넌트가 유사한 정도로는 동종 분야가 아닌 이상, 표절은 아니에요. 법적으로 다툴 수는 있겠지만, 실소득 없는 무의미한 행위라 판단할 거예요."
자세하게 웨일이 설명했다. 라선도 어느 정도 파악은 하고 있었다. 비겁한 행위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색상이나, 버튼 모양이 같은 것 이외에는 앱 목적과 기능이 다르기 때문에 완전히 다른 UI가 나올 수밖에 없다. 웨일은 최악의 경우를 상정하고 주의를 준 것이다.
"그럼 로고는 어떻게?"
"물론 로고는 명백하게 달라야 하죠. 거긴 시비가 붙을 수 있으니까요."
고론이 아니라 웨일을 보며 라선이 주장했다.
"그렇게 하는 게 좋겠네요."
웨일이 수긍했다.
고론이 몸을 덜덜 떨었다. 라선도 아슬아슬한 줄타기라는 것을 알았다. 그러나 분쟁이 발생한다면, 반발하지 않고, 변경하면 된다. 애초에 부자고고를 위협할 목적은 없으니까. 오히려 노이즈 마케팅이 될 수도 있었다. 그러니 무엇보다 '기능'이 중요했다. 노이즈가 발생했는데, 기능이 형편없으면, 욕만 먹을 것이다. 기능이 뛰어나다면, 노이즈로 '주목' 받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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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의가 마치고 라선은 계피차를 마시기 위해 휴게실로 갔다. 휴게실에는 헬렌이 소화제를 따고 있었다.
"오랜만이네요. 규인 씨."
라선이 반갑게 인사했다.
"이젠 헬렌이죠."
희미한 웃음을 지으며 헬렌이 답했다.
"어디 아파요?"
"어제 과음을 좀 해서요."
"술 안 드시잖아요?"
"그걸 기억하시네요."
"프레시가 회식 때, 너네 둘도 당장 술 마셔라고 혼냈었잖아요. 저만 술 안 마시는 게 아니라 얼마나 다행인지 몰랐어요."
"아, 그런 적이 있었나요. 옛날 일은 요즘 통 기억이 안 나네요."
"조심하세요. 건강 잃으면 다 잃는 거잖아요."
"고마워요."
헬렌이 병을 들이켰다.
"들었어요. 특허 개발한 사람이 헬렌이라면서요?"
부끄러웠는지, 헬렌의 뺨이 붉어졌다.
"덕분에 MVP가 빠르게 나올 것 같아요."
"그렇지 않을 수도 있어요. 아직 많이 부족하거든요."
"알아요. 기술이란 게 다 그렇죠. 그래도 기본은 깔고 가는 거잖아요."
헬렌이 다 마신 병을 쓰레기통에 넣었다.
"노력해 볼게요."
"오늘은 무리하지 마세요."
라선이 걱정했다.
헬렌은 신경 써줘서 고맙다는 말을 남기고 휴게실을 나갔다.
헬렌이 떠나고, 휴게실에 혼자 남은 라선은 계피차를 마시며 손가락으로 개발팀과 디자인팀 인력을 세었다. WBS(Work Breakdown Structure)를 짜야한다. 일을 받아만 봤지, 전체 일정을 기획하고 업무를 배분한 적은 없었다. 얇은 긴장감이 살갗을 타고 올라왔다.
새로운 역할에, 새로운 사업이었다.
늦지 않게 MVP를 시장에 내는 것이 중요한다. 빠른 실패와 빠른 수정을 반복하며 나아가야 한다. 라선이 취할 수 있는 가장 효율적인 전략이었다.
다행히 기술 구현엔 세안나와 헬렌이 있어서, 큰 걱정은 덜었다.
세 가지 가설은 검증되었고, 핵심적은 특허는 이미 완비되어 있다.
라선은 아직 리코의 회사를 다니는 것 같았다. 보이지 않아도, 이미 많은 것을, 리코는 먼저 보았다. 창업가는 언제나 미래에 산다는 말이 떠올랐다.
한 치 앞도 못 보는 라선은 남은 계피차를 마시러 잔을 꺾었다가 물을 흘려 옷을 버렸다. 사람은 다 제 분수가 있다니까. 현재에나 집중하자.
컴퓨터를 켜고, 라선은 개발해야 할 기능 리스트와 인력 현황을 확인하고, 빈 간트 차트 위에 일정과 업무를 배열하기 시작했다. 시장 반응 확인이 목표이기 때문에 사용성 테스트는 제외하였다. 모든 인력이, 맡은 몫을 다해 진행하는 것으로 가정할 때, 최소 개발 기간은 1개월이었다. 대략적인 틀을 짠 라선은 작성 가이드라인을 메모로 달아 전사에 뿌렸다. 디자인팀 기본적인 UX, UI를 만들면, 개발팀이 가능 여부를 확인 후 지속적으로 소통하면서 제작에 들어간다. 디자인 시스템을 구축해 시작하면 좋겠지만, 그러기엔 여유가 없다. 고론이 어떻게 프로젝트를 수행할지 걱정되었다. 라선의 기억 속에서의 고론은 뚜렷한 결과물 낸 적이 없었다. 남들이 버린 일을 마무리 짓느라 고생하는 모습을 본 것이 전부였다. 눈에 보이는 일은 거의 하지 않은 것이다. 전에 있던 디자인팀원은 사라지고, 지금은 라선도 처음 만나는 사람들만 있었다. 확실하지 않은 것이 많았다. 생각해 보니, 지금껏 삶에서 확실한 것은 하나도 없었다. 앞으로의 생이 그리 밝지 않을 거라는 추측 외에는.
이런 추측은 좀 빗나가도 되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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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전부터 면담이 이어졌다. 마케팅팀과 경영지원팀을 모두 끝낼 생각이었지만, 쉽지 않았다. 마케팅팀 직원 한 명이 하소연도 그런 하소연을 오래 할 줄은 예상하지 못했다. 허니맨은 부드럽게 대답하며, 경청했다. 이전의 퀵펜슬에서 겪었던 서러움을 지금에서야 토해내는 듯했다. 아직 다른 팀에 갑질하는 사람이 남아 있기에, 잘 좀 처리해 달라고 부탁까지 했다. 긍정적인 오지랖이었다. 허니맨도 새로 왔기에, 회사의 권력 지형에 대해서는 전혀 몰랐다. 임직원들의 이야기를 들어주는 것이 이번 면담의 주된 목적이었지만, 내부 사정, 세부적인 정치적 관계를 확인하려는 목적도 있었다. 인간이 한 명 이상 모이면 권력의 저울이 기울어지기 마련이다. 이걸 잘 조정하는 것이 인사팀의 역할이라고 허니맨은 생각했다. 면담 중에 퇴사 의사를 간접적으로 밝힌 둘은, 다행히, 동료 간 관계 문제로 불만을 가지고 있지는 않았다. 회사가 발전하고, 성장하는 모습을 보여주면, 어쩌면 회유할 수도 있지 않을까. 허니맨은 희망을 걸었다. 짧은 시간 내에 연속적인 퇴사는 근로 의욕과 사기를 저하시킨다.
한 명 더 면담을 끝내고 나서, 허니맨은 잠시 눈을 붙이려 했다.
그때 누군가 문을 두드리고, 들어왔다.
헬렌이었다.
"상담 좀 할 수 있을까요."
[다음 화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