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_계획없음
눈 뜨기 전 왠지 모를 싸한 느낌이 든다. 눈꺼풀보다 빠른 속도로 누워 있던 몸이 벌떡 일어났다. 핸드폰을 보니 일곱 시 반. 헉 하고 일어났는데, 아 참 여기 러시아다. 나는 휴가 중이고. 꼭 부지런함은 필요 없을 때 십분 발휘된다. 회사원의 루틴이 아닌 내 맘대로 일정을 움직이려 했으나, 관성에 젖어 몸은 시간을 기억한다. 눈곱도 떼지 않고 커튼을 열고 창가에서 잠시 멍때림의 시간을 가졌다. 뿌듯함에 입꼬리가 올라갔다. 아침에 이런 여유라니, 이 시간을 기념하려 창밖 풍경 사진을 몇 장 찍었다. 어색하던 숙소가 갑자기 내 방처럼 느껴져서 계획에 없었던 조식까지 먹어 보기로 한다.
조식 레스토랑 입구 안내판에는 한국어로 ‘아침을 초대해’라고 적혀 있다. 구글 번역기 네 이 녀석. 귀여움에 긴장이 풀어졌다가 입구를 지키던 직원이 무서운 얼굴로 방 호수를 물어 다시 긴장했다. 잠시 입국 심사의 기시감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녀는 내게 호통 대신 아침 인사를 건넸다.
음식은 놀랍도록 맛이 없었다. 잠을 깰 요량으로 커피만 두 잔을 내리 원샷하고 씨리얼을 아작 씹으며 어디에 갈지 고민했다. 우유 국물을 흘리지 않으려 애쓰면서 여행책도 조금 뒤적였다. 관심 없는 교회나 성당, 의미도 모르는 박물관 소개 페이지를 쭉쭉 넘기다 보니 어느새 끝 페이지. 딱히 가고 싶은 곳도 가야 할 곳도 없다. 서운하기보다는 후련하다.
진짜로 갈 곳이 없구나? 파리에서 루브르박물관을, 로마에서 콜로세움을 보지 않고 돌아온다면 어딘가 개운하지 않겠지만, 블라디보스톡에서 잠수함박물관이나 포크롭스키 성당을 보고 오지 않는다고 나무랄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렇다면 내가 흥미로운 장소를 발견해 보자. 내가 좋아하는 걸 찾아보자.
때는 팔월 중순. 한국은 폭염이 기승을 부리던 때였다. 하지만 ‘블라디보스톡은 가깝긴 해도 러시아이니, 훨씬 춥지 않을까?’라고 생각한 나는 한국에서는 입지 못할 두꺼운 옷들을 잔뜩 챙겨갔다. 어쩌면 실제 날씨와는 상관없이, 한국과는 다른 옷을 입고 싶은 마음이었는지도 모르겠다.
첫 목적지는 역시나 숙소 앞 바닷가. 파도가 쿵작쿵작 BGM에 맞추어 몰아치던 어젯밤과는 달리, 아침의 해변은 고요했다. 흥이 오른 여행자들이 아닌, 산책 나온 엄마와 아이들이 평온한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단 몇 시간 만에 여행자들의 유흥 공간이 생활인들의 쉼터로 변모한 것이 흥미로웠다. 사진도 어제는 팡팡! 찍었다면, 오늘은 조금 멀리 떨어져 관찰하듯 조용히 남겨보았다. 자연스러운 행동의 사람들 속에서 나도 새삼스럽지 않게 행동하고 싶었다. 한적한 틈을 타 굳이 챙겨 온 삼각대와 리모컨으로 내 사진을 몇 방 남기기는 했지만 역시 혼자서는 기계적인 표정밖에 지을 수 없어서 금방 철수했다.
점심_계획없음
간밤에 나만 빼고 다들 불태운 건가? 분명 ‘젊은이들로 북적이는 거리’로 이름난 아르바트거리는 사람 한 명 없이 한산했다. 덕분에 거리를 유유자적 구경할 수 있었고, 우연히 ‘미디야’(Мидия)라는 카페에 들어갔다. 러시아 카페에 대한 나의 편견과는 달리 현대적인 인테리어를 갖추고 깔끔하게 정돈된 곳이었다. 최근 몰려드는 외국인 관광객을 타깃으로 만들어진 곳이라 그런지, 직원들은 모두 영어에 능통했고 한국어 메뉴판도 따로 준비되어 있었다. 나는 어떤 카페를 가도 아메리카노만 마시는 편인데, ‘서울’이라는 메뉴가 있어 소싯적 부르마불 하던 느낌을 살려, 오늘은 서울 한 잔 주문해보기로 했다.
“다이쪠 빠잘루스타, 아진 시울” (Дайте пожа́луйста, один Сеул : 서울 하나 주세요)
종업원은 끝까지 듣기도 전에 ‘그럴 줄 알았다’는 듯한 미소를 지었다. 음료 서울은 블루베리가 들어간 달콤한 에이드였다. 내가 앉은 창가에는 햇빛이 쏟아졌고 그 빛에 서울이 반짝거렸다.
‘내가 기분이 좋긴 좋네, 음료수가 아름다워 보일 줄이야’라고 생각하다가, 자세히 들여다보니 음료수 안에 반짝이 가루가 들어있었다. ‘음료에 반짝이를 넣다니 이게 뭐야’라고 실망했지만 한편으로는 재미있었다. ‘가만있자. 인공 반짝이가 눈부신, 달콤한 에이드라니 어쩐지 정말 서울 같잖아?’
미디아 카페의 바리스타는 내가 사랑하는 영화 <500일의 썸머>의 주인공 주이 디샤넬을 닮았다. 썸머의 직업이 바리스타였다면 아마도 저런 느낌이지 않았을까 생각했다.
카페의 메뉴는 전부 조금씩 특이한데 기본 음료를 남자 직원이 만들어 전달하면, 바 앞에서 (썸머)바리스타가 말린 과일 같은 토핑을 올리거나, 반짝이를 추가하여 완성하는 방식이다. 서울에서도 드립 커피를 정성스레 내려주는 카페에 가면, 특별한 인테리어가 있지 않아도 바 앞에서 정성을 쏟는 그들의 모습이 하나의 공연처럼 느껴져 멍하니 바라보게 되는데, 이 곳은 음료에 마지막에 생기를 넣는 (썸머)바리스타의 이미지로 기억에 남았다. 그렇게 블라디보스톡에서 만난 서울은, 반짝거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