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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donut peach May 26. 2019

인생의 통과의례 '직장인3년차징크스'

관혼상제 다음으로 중요한 이슈.

씨뷰, 알러뷰


방탈출 게임도 아닌데 문이 열리자 힘이 풀렸다. 애지중지하던 비싼 카메라도 캐리어도 내팽개치고 침대에 쓰러졌다. ‘휴’ 하는 소리가 나로부터 들려왔다.  무사히 도착했다는 안도감, 아무것도 못 했으면서 식은땀으로 엉망이 되었다는 억울함, 그리고 굳이 이런 여행을 왔어야 했나 하는 자괴감까지 뒤섞여 나를 괴롭혔다. 혼자 있으니 공연한 생각들이 스스로 부풀어 속이 시끄러웠다. ‘아 그냥 잠이나 자자’ 하는 마음과 ‘이렇게까지 고생했는데 아무것도 안 하겠다고?’ 하는 마음이 스파링을 시작했다. 침대 끝에 널브러져 천장만 멍하게 보다가 문득 창문이 눈에 들어왔다. 


아 맞다, 이 방 *씨뷰지? 바다를 볼 수 있는 방향의 방들은 확실히 비쌌지만, 정 할 일이 없으면 창밖이라도 보자는 마음으로 바다전망 방을 고집하여 예약했었다. 그리고 나는 과거의 나를 칭찬했다. 마침 해가 바다 뒤로 넘어가던 시간이었고, 커튼을 걷자 하늘이 수십 가지 색을 섞어 대고 있었다. 


안되겠다. 나가자. 멀리도 필요 없고 바로 요 앞으로. 어깨를 짓누르던 에코백을 거꾸로 들어 삼각대와 화장품들을 탈탈 털어냈다. 그리고 카메라와 핸드폰만 달랑 들고 밖으로 향했다. 비로소 그때 나의 여행이 시작되었다. 


* Sea View

* 중심지와는 다소 떨어져 있지만, 하루 정도는 바다 앞 숙소를 예약하는 것도 추천한다. 해가 뜨고 노을이 물들었다가 지는 창밖을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꽤 그럴듯한 여행의 기억으로 남으니 말이다. 물론 특별히 대단한 광경은 아니다. 어쩌면 부산이나 강원도, 인천에서도 볼 수 있는 풍경이겠지. 그러나 러시아라는 ‘심리적 거리가 매우 먼 공간’에서 본 바다 풍경은 정말이지 선물이었다. 




이 집, 노을 잘하네


고요한 밤바다를 예상한 나는 뜻밖의 광경과 마주했다. 바다와 노을은 거들뿐, 그곳은 각종 푸드트럭의 음식과 술 그리고 흥겨운 사람들로 가득한, 그야말로 잔치의 현장이었다. 공기 속에는 매캐한 연기와 해산물 굽는 냄새가 섞여 있었고, 그에 못지않게 사람들의 흥도 뿜어 나왔다. 해안을 따라 걸으며 그들의 잔치를 구경했다. 노을이 지며 변해가는 하늘의 색이 잔치의 분위기를 완성하고 있었다. 내가 이곳에 펍을 연다면 홍보 문구로는 ‘노을 잘하는 집’ 정도가 좋을 것이다. 밤을 즐기는 사람들 틈에 들어가 술 한잔해볼까 하는 생각이 잠시 스쳤지만 나는 ‘안전제일 혼행자’. 그런 객기는 있을 리 없다. 다만 혼자만의 질펀한 밤을 기획하며 우향우 스텝을 밟고 돌아섰다. 


나는 일본에 가면 관광지보다 편의점 구경이 재미있고, 이국적인 곳에서 생김이 다른 과일 구경을 좋아한다. 24시간 운영하는 마트인 ‘클레버하우스’가 그날 밤 나만의 핫플레이스였다. 한국인 관광객이 많아서인지 한국 과자와 라면들이 러시아어 이름표를 두르고 열 맞춰 누워있었다. 각종 식료품을 실컷 구경하고 내가 먹을 것도  사기로 했다. 가이드북에서 극찬한 요거트인 ‘뜨라바족’과 감자칩 두 개, 방울토마토를 집어 들었다. 술로 분위기를 더해볼까 싶다가 이 순간을 온전히 기억하고 싶어 탄산수로 바꿔 들었다. 


* 아쉽게도 납작복숭아는 없었다. 




치한다 치해


인생의 통과의례에는 관혼상제 말고도 ‘중2병’과 ‘직장인 3년 차 징크스’가 있다. 
그중 나는 직장인 3년 차 징크스가 중증이다. 

의욕 충만하던 신입사원 시기를 벗어난 나는, 이제 회사생활에 꽤 익숙해졌고 뭐든지 예전보다는 덜 어렵다. 그러나 많은 3년 차 직장인들이 그러하듯, 더 이상 깨야 할 일종의 퀘스트가 없다는 것이 스스로를 계속 괴롭히고 있다. 


고등학교 때는 수능이, 대학생 때는 학점과 대외활동 그리고 자격증이 나에게 퀘스트였다. 그것은 늘 스트레스였지만 또한 활력이기도 했다. 나는 매 순간 갤러그처럼 뿅뿅 소리를 내며 추진력을 얻었다. 내가 전진하고 있다는 느낌은 언제나 확신에 가까웠고, 더 좋은 사람이 되고 싶고, 될 수 있다고 믿었다.   


현재 나는 원하던 직장에 다니게 되었고, 스트레스를 예전만큼 받지 않는다. 하지만 스트레스가 없다는 것이 결국은 스트레스가 되어 버렸다. 남들과 비슷하게 잘 살고 있지만, 늘 ‘고여 있다’는 일종의 죄책감을 안고 지낸다.

충동과는 거리가 먼 내가 충동적으로 여행 온 이유는 이것이다. 나는 비범할 것 없는 평범한 직장인이지만 그래도 조금은 다른 사람이 되고 싶어서 말이다. 평범한 과일이지만 어딘가 조금 별난 납작복숭아처럼 말이다.


내가 마신 것은 분명히 탄산수였다. 그러니 나는 정말로 안 취했다. 갑자기 놀랍도록 센치해진 내 스스로를 질색하며 정신을 차렸다. 세 시간 만에 지구 반대 편이라고 해도 믿을 정도로 이국적인 공간에 홀로 앉아있었다. 시차는 한 시간뿐인데 이틀 같은 하루를 지냈다. 그날 밤 나는 무언가에 치여, ‘치’했었나 보다. 딸꾹.


정말 맛있었던 뜨라바족 요거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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