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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이울 Aug 05. 2021

묵은 것이 아름답다 (5)

(5) 남원의 '오래되고 아름다운 것들'

  무더위에 지친 심신을 이끌고 어딘가로 떠나야겠다. 어느 심산유곡에 들어가 그늘에서 푹 쉬고 싶다. 어디가 좋을까? 그때 바로 남원이 생각났다. 용산역에서 남원역까지 KTX로 2시간이면 된다. 아주 훌륭한 한옥 호텔과 한옥 체험관이 잘 준비되어 있고, 전주 못지않다.     

  당신에게 남원은 무엇인가요? 남원은 나에게 지리산이다. 뱀사골 계곡에서 죽을뻔했기에 남원과 지리산은 잊을래야 잊을 수 없다. 대학시절 여름방학 때 친구들이랑 남원 뱀사골 계곡으로 올라가 천왕봉까지 종주하겠다는 큰 계획을 세웠고, 능선을 타기 시작했는데, 이틀 동안 이어지는 많은 비로 종주는 포기했고, 다시 뱀사골 계곡으로 내려오다가 불어난 계곡물과 거센 물살에 떠내려갈 뻔했다. 사십여 년 전 얘기지만 지금도 그 생각만 하면 등골이 오싹해진다. 지금은 남원에서 출발하는 지리산 둘레길이 잘 정비되어 있고 위험하지도 않다. 편안하게 지리산의 울창한 숲과 계곡을 즐기는 사람들이 꽤 많아 보였다.  

   

  남원을 통해 지리산에 들어갔다면 실상사에 들러보길 권한다. 지리산 발치에 조용히 내려앉은 천년(9세기 초) 고찰의 두 삼층석탑과 석등, 대웅전, 약사전, 극락전, 부도탑, 배롱나무 사이를 걷다 보면, 자연히 ‘나는 누구냐?’라는 선문답이 다가온다. 지금 여기 당신은 누구신가요? 약사전 철조여래좌상의 얼굴이 굳어 있다.   

  

  지리산과 실상사를 벗어나 들른 곳은 황산대첩비와 어휘각이다. 고려말 운봉과 인월 근처에 있는 황산에서 이성계와 이두란이 왜장 아지발도를 죽이고 수천의 왜구를 물리쳤고 노획한 말만 1,600여 필에 달했다고 한다. “전투에서 함께 공을 세운 부하 장수들의 이름을 바위에 새겨둬라.” 했다는 태조 이성계의 이야기와 장수들의 이름을 새긴 바위를 보호하는 누각이 어휘각이다. 하지만, 아쉽게도 황산대첩비와 어휘각의 바위는 일제 강점기에 다 훼손되어 알아보기 어렵다.     

  이처럼 남원은 삼국시대, 고려시대, 조선시대를 아우르는 전략적 요충지였다. 지리산을 비롯한 험준한 산들로 막혀 있던 전라도와 경상도를 가장 빠르게 연결하는 길이 전라도 남원에서 경상도 함양으로 이어지는 길이었다. 신라와 백제가 충돌하는 지역이었고, 부산과 경상도를 통해서 침투한 왜구들이 호남의 곡창지대로 넘어가는 가장 빠른 육로였다. 임진왜란 당시 남원을 사수하기 위해 조선과 명의 관군은 물론 민간인들까지 모두 만여 명이 몰살당하기도 했다. 그 유적이 남원 만인의총이다.      

  조선 선조시대의 위정자들은 공리공담에 눈멀어, 국력은 쇠잔해지고, 삼천리 금수강산과 백성들은 왜구에 도륙당하고, 더 큰 나라의 힘을 빌려야 했고, 1만여 남원 사람들의 코와 귀는 잘려서 일본으로 실려가, 교토 귀 무덤의 주인이 되었다. 일본 기록에 따르면, 전쟁 후 모아진 코와 귀의 숫자가 12만을 넘었다고 한다. 비슷한 치욕은 정묘호란 때에도, 일제 강점기에도 되풀이됐다. 만인의총과 기념탑과 충렬사를 지키는 붉은 배롱나무에 경배하면서 감히 질문을 던졌다. 오늘의 현실은 과거와 다르겠지요?

  남원하면 또 생각나는 것이 판소리다. 황산대첩비 바로 앞에 있다고 해서 비전(碑前) 마을이라고 불리는 곳에 판소리 명창 송흥록과 박초월의 생가터가 잘 정비되어 있다. 송흥록은 19세기 초에 조선 8대 명창의 한 명으로 유명했고, 서편제와 대비되는 동편제의 창시자로 널리 알려졌다. 소리만 잘했던 것이 아니라 판소리 가사를 집대성하고, 계면조와 진양조를 완성하고, 메나리조를 보급하는 등 이론과 실기 모두 통달하신 분이었다. 그 후손인 송만갑 명창의 지도로 대성하신 분이 박초월 명창인데 같은 마을 태생이다.    

  

  남원하면 또 떠오르는 게 광한루와 춘향이다. 춘향전과 흥부전, 만복사 저포기(김시습), 혼불(최명희)의 배경이 모두 이곳이니, 과연 남원은 스토리의 고장이라고 할 수 있다. 스토리는 풍광이 좋은 곳에서 만들어지는가 보다. 광한루와 그 앞을 흐르는 요천, 요천 앞 승월대, 승월대 위로 떠오르는 보름달, 그 너머 고산준령들을 바라보며 걷고 있노라면 흥미진진하고 감동적인 이야기, 애잔한 러브스토리가 샘솟듯 떠올랐을 것이다. 멋진 스토리를 만들어 낸다는 핑계로 남원에 눌러앉을까?      

  조선 초기의 명 재상 황희 선생이 세종 원년 귀양을 와서 3년간 머물렀던 곳이 남원이다. 지금 광한루가 있는 자리에 광통루를 지어 풍광을 감상하며 지냈다고 한다. 황희 정승도 산수를 보는 눈이 있었던 모양이다. 황희 정승의 선조들 고향이 남원이었다고도 한다. 밤에 보는 광한루와 낮에 보는 광한루, 어느 쪽이 더 멋있을까? 향단이랑 같이 광한루에 놀러 나와 그네를 타면서 이몽룡의 애간장을 태웠다는 춘향이는 그 답을 알고 있겠지? 아니다. 광한루 입구의 오백여 년된, 아직도 늠름하게 서 있는 팽나무에게 물어봐야 겠다.

  남원 시내에서 멀지 않은 선국사와 교룡산성에 올랐다. 해발 518미터 높이의 산에 돌로 쌓은 산성의 둘레가 3,120미터에 달한다는 교룡산성은 삼국시대 이래 벌어진 수없이 많은 전투에서 남원을 지키는 보루였고, 백성들의 피난처였을 것이다. 백제 시절에 쌓았고 임진왜란 때 다시 쌓았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산성 안에 있는 선국사 대웅전과 보제루에 오르면, 남원 시내와 주변의 봉우리들이 다 내려다보인다. 그래서, 유사시에 지키고 피하기에 최적의 장소였을 것이다. 실제로 임진왜란 당시 승병들의 지휘소가 선국사에 있었고, 동학군의 김개남 장군과 부하들이 오래 머물렀다고 한다. 많이 알려지지 않은 곳이라 그런지, 보존이 허술하고 많이 허물어진데다 허름한 펜션까지 남아 장사를 하고 있어서 참 아쉬웠다.     

 


  남원을 벗어나기 전에 꼭 가봐야 할 곳이 전주 방향 외곽에 있는 혼불문학관이다. 최명희 작가의 고향은 전주였지만, 대하소설 혼불의 무대는 남원시 사매면 서도리 노봉마을이다. 문학관 안에 작가의 집필실을 재현해 놓았고, 소설 속의 몇 장면을 구경할 수 있도록 디오라마(작은 공간 속의 입체 조형물 전시) 형식으로 구현해 놓았다. 1930년대 몰락해가는 양반가(매안 李씨)의 며느리들(청암부인, 율촌부인, 효원)과 강모, 강실의 이야기, 그중에서도 어린 나이에 시집와서 집안을 일으켜 세우려 애쓰는 청암부인을 보면, ‘토지’의 주인공 서희가 오버랩된다. 구수한 전라도 사투리와 옛날 세시풍속 이야기는 덤으로 얻는 즐거움이다. 혼불문학관을 지키는 최명희 작가의 사진을 보면서 물었다. 지금 여기의 나는 누구인가요? 우리 앞 세대 어르신들의 땀과 한숨의 결정체 아닐까?

  

  남원추어탕은 서울에도 흔하디흔하다. 광한루 근처에 몰려 있다. 나도 좋아하는 음식 중 하나지만, 서울이나 남원이나 비슷했다. 그래도 깻잎으로 말아서 튀긴 추어튀김은 기억에 남았다. 그 힘으로 배터리를 재충전한 후, 전북 한 달 여행하기의 네번째 고장 남원을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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