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모강박, 그 긴 터널 속으로

내가 못생겼다고 처음 느낀 순간

by 달처녀


가끔 궁금한 주제가 있다.

외모를 가꾸고 주변인에 비해 외모를 신경 쓰려고 하는 것은 인간의 본능인지, 아니면 사회화된 영역인지.

만약 신생아가 아무런 현대 사회의 자극을 받지 않은 채로 필요한 지식만 제공받으며 성장한다면, 자기 미의식이라는 것이 생길까?


나는 1986년생 한국 여자. 만 서른아홉.

결혼도 했고 아이도 하나 있다. 멀쩡하게 회사에 다니면서 사람들과 어울린다.


그런데 아직도 가끔 유튜브나 챗GPT에 '예쁜 여자'라고 쳐본다.

이제는 아름다워서 이성의 눈빛을 받고 싶다는 의도는 아니다. 손톱 물기처럼 오래된 습관이다. 나는 그렇게나 깊었던 '예쁜 여자'에 대한 추구를 이제는 가볍게 털어내려고 한다.


못생김의 발견

중학생 때부터 내가 못생겼다는 사실을 인식했다. 사실은 단순히 '안 것'과 '인식한 것'은 천양지차였다. 나는 내 생김새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인 게 아니라 무수히 왜곡했다.

키는 아담한 편, 가슴은 작고 납작한 편, 엉덩이는 힘없이 처진 편, 허벅지는 말처럼 굵고 강인한 편. 얼굴 이목구비는 눈코입 얼추 맞게 주차되어 있지만, 여드름이 꽤 많고 어릴 때부터 손가락을 빨아온 탓에 앞니 사이도 틀어져 있었다. 비 오는 날이면 더 심해지는 곱슬머리까지.

매일 거울 앞에 서면 마음에 안 드는 것 투성이었다. 학교도 가기 싫었고 친구들과 어울리는 건 에너지가 딸렸다.


2002년 겨울, 그 상처

고등학교 1학년 겨울, 예쁜 친구 둘과 함께 버스 정거장에서 집으로 가는 버스를 기다리고 있었다.

"야, 너네 어디 가냐?"

옆 반에서 인기 많기로 유명한 남학생들이었다. 괜시리 설레는 마음으로 "나는 3번 버스 타고 아주대 쪽 가는데."

"너 말고, 너는?"

그 '말고'의 너는 나였고, 그들이 가리킨 다른 너는 나의 두 친구들이었다. 그때도 나는 본능적으로 주눅이 들었다. '그래, 얘네도 예쁜 애들한테 관심이 있겠지.'

나이가 다 들어서도 소외당하는 느낌은 날것 그대로 아프다. 그런데 감성이 여리고 변주가 많았던 그 당시 나의 마음은 오죽했을까. 작은 바람에도 끊임없이 파문이 이는 내 마음은 파도처럼 요동쳤다.


'나도 예뻐지고 싶다'는 생각이 움을 트더니 빠른 속도로 커졌다.


이상향을 향한 돈키호테

가만히 있어도 아름답다는 느낌이 날 정도로 예쁘고 싶었다. 키는 작지만 몸매는 여리여리하고, 얼굴은 모공도 없이 매끈하면서 여성스러운 볼륨도 있어서 사람들이 다 말 걸고 싶은 사람이 되고 싶었다.

살결은 장미 향이 날 것 같고, 손을 뻗으면 민들레 홀씨처럼 흩어질 것 같은 여리여리한 몸매. 한 눈에 누구나 돌아볼 그런 외모를 갖고 싶었다.


그래서 나는 노력했다. 하지만 내 모습을 제대로 알려고 하지 않은 채로 방향 없이 한 발 한 발 내디뎠다.

안경을 쓴 여자는 예뻐 보이지 않는다고 해서 안경을 벗고 근시 때문에 안 보이는 눈을 찌푸리며 다녔다. 내 긴 얼굴형에 어울리지 않는 반묶음 머리를 청순해 보인다는 이유로 했다. 중국에서 사온 빨간 치파오 티에 엄마의 아코디언 남색 스커트를 매치했다.


수원 남문 보세 집에서 산 갈색 남방에 분홍색 알이 나뭇잎처럼 박힌 귀걸이를 달고, 그 몰골로 당시 좋아하던 오빠가 다니는 남고 앞을 기웃거렸다.


지금 생각하면 전략 없이 뒤뚱뒤뚱 나아가는 돈키호테 같은 행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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