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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윤 진 Dec 03. 2021

결혼 14년, 여전히 기싸움 중입니다.

설거지로 싸우는 부부이야기



거지와 욕실 청소를 좋아한다. 

기분이 가라앉은 날, 뽀득 뽀득 소리나게 그릇을 씻겨낼 때, 형광등 불빛이 타일에 반사 될 때까지 욕실 청소를 하고 나면, 무언가를 잘 마무리했을 때의 쾌감이 올라온다. 집안일에서 성취감을 얻는 것은 결과가 바로 보이는 행위를 통해서이다.      







설거지를 좋아하지만 유독 하기싫을 때가 있다. 공부하려는 마음을 먹었을 때 "공부해라"라는 말을 들으면 하기 싫은 것처럼, "설거지 좀 해, 자기 설거지 좋아하잖아"라는 말을 남편에게서 들으면 청개구리 기질이 발동한다. 외출 후 집에 돌아왔을 때, 쌓여있는 설거지를 보는 것만으로 짜증 지수가 올라간다.  


‘내가 먹은 게 하나도 없는데 왜 내가 해야 하지?’ 의문이 든다.   

   

최근 공업용 커터 칼에 손가락을 베었다. 


"설거지 내가 해야 하잖아" 남편이 말했다.

'뭐지? 이 기분 나쁜 말은?' 


농담처럼 던지는 그의 말에 어이가 없었다. 지난 금요일 남편은 첫째 사랑이와 강화도로 1박 2일 놀러 가며 설거지를 하지 않았다. 둘째 축복이와 외출 후 집에 돌아왔을 때 설거지와 빨래가 제일 먼저 눈에 띄었다. 세탁기를 돌리고 설거지를 하고 나니 여러 겹으로 방수 밴드를 붙였음에도 다친 손가락에 물이 들어갔다. 손톱 틈새로 들어간 엉겨 붙은 피를 닦아낸 후 방수 밴드를 교체했다. 서서히 화가 치밀어 올랐다. 내가 다쳤는데 설거지를 안 하고 놀러 간 남편을 향한 것이었다.      


그에게 기대했던 것이다. 다쳤을 때는 집안일을 알아서 하겠지.(당시 코로나로 재택근무 중) 기대한만큼 상대가 채워주지 않을 때 부정적 감정이 생기는 건 자연스러운 일이다. 여기서 집중해야 할 것은 '나는 왜 당연하게 기대했을까?'이다. 세상에 당연하게 없다는 사실을 간과했다. 가까운 사이 일수록 내가 원하는 것을 알아서 해줄 것이라는 막연한 기대가 있다. 그 기대가 충족되지 않았을 때 상대에게 화가 난다. 서로에게 결코 도움될리 없는 나의 무의식적 패턴이다.           








불면증으로 새벽까지 뒤척이다 새벽녘 빗소리를 자장가 삼아 잠이 들었다. 늦은 일요일 아침, 남편의 호통치는 소리에 놀라 잠이 깼다.      


"흘리고 먹지 마라!!! 먹을 때는 휴대폰 보지 마라!!!"

"......"


아빠의 잔소리가 끝나자 갑자기 울음소리가 들렸다.


"으에엥!!! 나 손가락 데었단 말이야...."


손이 아프지만 아빠의 화가 지나갈 때까지 기다린 첫째의 서글픈 표현이다.     

눈을 비비며 거실로 나갔다. 


"무슨 일이야?"     

“엄마!!!”


반기는 아이들과 달리 뚱한 표정의 남편이 보인다. 사건이 종결된 현장, 내가 묻는 말을 대놓고 남편이 무시한다. '왜 저래?' 목구멍까지 올라온 말을 삼키며 가만히 남편 얼굴을 쳐다본다. 과장되게 음식을 씹고 있는 표정, 규칙적으로 움직이는 입모양이 묘하게 거슬린다.     


“저 입 모양만 동영상으로 찍어서 보여주고 싶다.”


라는 말에 아이들이 웃음을 터트린다. 남편은 "허!" 하며 짧은 웃음을 보이곤 곧 화난 표정을 짓는다.     


“아빠 표정 관리한다. 저 먹는 모습 좀 봐봐. 쩝쩝 소리 내면서 과장되게 먹는 것도.”     

잠시 침묵이 흐른 후 남편이 말한다.  

   

“내가 설거지하고 세탁기 돌리고 아침도 차렸다!!!”

“아고, 그러셨어요? 우쭈쭈 고생했어요, 고마워요.”     


14년째 살다 보니 저 말이 무슨 뜻인지 안다. 자신이 한 일에 대해 인정받고 싶다는 것이다.     

전에는 알면서도 생색내는 태도가 미워서 인정해 주지 않았고, 신혼 초에는 남편이 집안일을 하는 것이 나를 도와준다는 생각이 싫어서 싸우곤 했다.     


집안일은 가족 모두를 위해 누군가는 꼭 해야 한다. 구성원이 역할을 정해 나누어 하는 게 바람직하다. 맞벌이거나 외벌이와 상관없이 집안일이 당연하다는 듯 '어느 한 사람의 일'이 된다는 것은 문제가 있다. ‘너의 일을 도와주는 것’ 이라는 사고방식이나 효행실천으로 집안일을 숙제로 내주는 것도 가부장적 사고방식이 남아있는 것이다. 한 명의 노동으로 다른 사람이 편안해지는 구조는 분명히 문제가 있다.      


아침을 먹고 설거지를 하면 점심을 먹고 설거지를 하고 간식을 먹으면 금세 저녁을 먹고 설거지를 해야 한다. 청소를 하고 10분 뒤면 이미 물건이 널브러져 있는 거실, 매일 하는 빨래. 집안일은 해도 해도 티가 안 난다. 끝이 없다. 반면에 안 하면 티가 확 난다. 당장 설거지를 안 하면 밥 먹을 그릇이 없고 혹여 몸이 안 좋아 청소를 며칠만 미루면 발 디딜 틈이 없어진다. 그래서 힘들다. 보상도 끝도 없는 같은 행동을 무한 반복해야 하기 때문이다.      


설거지를 좋아한다. 좋아한다고 해서 매일 하는 것을 즐긴다는 말은 아니다. 아무리 좋아하는 일이라고 해도 지루하고 성과도 없는 노동을 어떻게 매일 즐길 수 있다는 말인가! 아내이고 엄마는 집안일에서 꼭 의미를 찾아야 할 필요도 없다. 집안일을 잘하지 않아도 충분히 좋은 아내이고 엄마일 수 있다.   

   

결혼 14년째, 남편과 집안일을 두고 눈치 게임을 하고 여전히 권력다툼 중이다. 신혼 초에 하는 유치한 기싸움이 계속되는 이유는 "집안일은 가족 구성원 모두가 해야 하는 공동의 일이지 나의 일이 아니다."라는 내 생각이 변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앞으로도 변하지 않을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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