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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윤 진 May 19. 2024

배려와 배제(1)

경험하지 않은 삶에 대한 두려움

저도 그렇게 힘들었지만,
참고 사니까... 또 살아지더라고요.
선생님도 그냥 참고 살아보면 어떨까요?






심리상담사의 말이 웅웅 거리며 정희의 귓가에서 부서졌다.

상담사의 말은 정희의 마음에 자리잡지 못 했다.



'나도 참고 사니까, 당신도 참고 살라니? 초기상담에서 이렇게 폭력적인 말을 하는 상담사라니! 나와 당신은 경험이 다르다고! 나와 당신은 다른 사람이라고!'



목구멍까지 올라오는 말이 새어 나올까 손으로 입을 막았다. 먹기 싫은 약을 삼키듯이 튀어나오는 말을 집어삼켰다. 식도로 침을 삼킨 것 같은데, 기도로 넘어간 걸까. 가슴이 답답하고 숨 쉬는 일이 힘겹게 느껴진 정희는 손바닥으로 가슴을 쓸어내렸다.



"어디 불편하세요?"

이어지는 상담사의 말에 느린 속도로 고개를 끄덕였다.


'최대한 힘들어 보여야 해. 그래야 이 상담실을 벗어날 수 있어.'


"속이 안 좋아서요. 아침이 체 한 것 같아요. 화장실에 다녀올게요."



정희는 핑계를 만들어 상담실을 벗어났다.

화장실에 앉아서 나오지 않는 토를 억지로 시도해 보다가 상담시간이 지나기를 기다렸다.



'시간이 지나버리면 어쩌겠어. 다음 상담이 또 있으니까 나를 붙잡지는 않겠지.'



정희는 스스로가 비겁하다고 느껴졌다. 살면서 자신이 하고 싶은 말을 제대로  적이 없다. 무엇이 두려워서 말하지 못하는지도 알지 못한다.  힘든 순간을 벗어나고 싶을 때마다 소화가 안된다는 핑계를 댔고, 어쩐 일인지 핑계가 유독 늘어나던 시점부터 잦은 위염에 시달렸다.



'소화가 안 되는 게, 거짓말은 아니잖아.'



차라리 잘됐다고 생각했다. 거짓말이 아니라 진짜로 속이 안 좋은 만성위염 환자가 된 것이니까. 스트레스가 신체화 증상으로까지 나타난 지는 벌써 5년이 지나고 있었다.




오늘 상담을 부족하게 해서...
혹시 다음 상담 때
30분만 일찍 오실 수 있으세요?




'네, 선생님"

정희는 바로 대답했지만, 상담을 일찍 올 생각은 눈곱만큼도 없다. 이 상담사와 다시 안 만날 수 있는 방법이 무엇일까를 생각하느라 머릿속이 분주하다. 입에서 나오는 대로 대충 대답을 한다. 그저 조금이라도 빨리 이 공간을 벗어나고 싶다.



두 다리가 움직일 수 있는 최대 속도로 주차장으로 내려가는 정희의 뒷모습이 '코드블루' 방송이 나오는 병원의 의사와 닮았다.


정희에겐 하루하루가 생존과 직결된다.

그럴듯한 직업, 이름이 알려진 대학 졸업장, 서울지역의 국민평형대 아파트에서 4인 가족이 사는 평범하고 안정된 가정. 그 가정이라는 울타리가 숨을 조여온다는 게 문제이지만.



'살려고 찾아온 상담실을

살고 싶어서 도망치듯 빠져나오는 꼴이란.'



정희는 그동안 3명의 상담사를 만났다. 상담실을 찾은 건 남편과의 오랜 갈등 때문이었다.

첫 번째 상담사는 어린 시절 부모님의 관계를 물었고, 뜬금없이 친정엄마에게 사과를 받으라고 했다.

두 번째 상담사는 이런저런 검사를 권했고, 결과 해석지를 보더니 감정조절과 생각조절에 어려움이 있으니 인지행동치료를 시작해 보자고 했다.


정희의 직업은 임상심리사이다. 인지치료 방법을 타인에게 안내해 주는 일을 하고 있다.


'몰라서 못하는 게 아니야!!!'



세 번째 상담사는 공공기관의 도움을 받았다.

제대로 알아보지 않고 집에서 가까운 상담센터에 찾아가다 보니 나에게 잘 맞는 상담사를 만나지 못한 것이라며 정희는 상담실패의 원인을 '정보 부족'에서 찾았다.


'공공기관에서는 경력을 꼼꼼히 볼 테니까 좋은 사람을 만날 수 있을 거야.'


그렇게 공공기관에서 연결해 준 상담센터에 찾아갔는데, 첫 회기에서 들은 말이다.


'참고 살라고? 지금은 이해하기 어렵겠지만

이 위기만 넘기면 살아진다고?'



급히 상담사의 이름과 경력을 검색했다.

오늘 만난 상담사는 종교상담학을 전공한 분이다. 사랑과 용서를 외치는 그 종교를 남편은 독실하게 믿는다. 그는 이렇게 성실한 성가대 형제님은 처음 이라며 종교공동체에서 인정받는 사람이다.


그가 외부에서 인정받는 그날,

우리 가정은 더욱 지옥이 된다.


정희는 3번째 상담사와 라포를 형성하기도 전에

다이어리에 '이번에도 실패'라고 적었다.



정희의 다이어리에는 하루의 모든 순간이 기록된다.

긴 문장인 경우는 드물고 단어와 어휘가 흩뿌려진 물방울처럼 적힌다. 혹시 다이어리를 잃어버릴 때를 대비해 모든 인물은 정희가 붙인 별명으로 기록된다. 그녀만 아는 암호기록 서랄까. 그녀가 강박적으로 다이어리 기록을 시작한 건 위염이 심해지던 시점과 겹쳐진다.



위염이 심해지던 몇 년 전...

'너를 위한 말이야...'라는 배려의 화두를 던지던 그녀의 얼굴이 잊히지 않는다. 그녀의 작고 통통한 입술을 통해 정희는 남편의 외도를 들었다.

 




남편과는 오래 함께했다.

같은 대학 선후배로 만나서, 아이 둘을 사춘기까지 키운 지금까지. 엄마와 함께 산 시간보다 남편과 함께 살아온 시간이 더 길다.


기쁠 때나 슬플 때나

부할 때나 가난할 때나

건강할 때나 병들 때나

그대를 사랑하며 아끼고 

제 아내(남편)로 맞이할 것을

사랑하는 하나님과 제 가족과 성도들 앞에서

서약합니다.



긴 시간 서로를 믿고 의지하며 사랑하겠다는 '성혼 서약문'이 지켜지지 않은지는 오래다. 독실한 크리스천인 는 목사님의 축복을 받으며 성혼 서약문을 한 글자 한 글자 마음을 다해 읽었었다.



"하... 무슨 의미야.

그런 종이에 적힌 글씨 따위."



하객들 앞에서

하나님 앞에서

으로, 남편의 입으로 선언하고도 지켜지지 않았던 사랑의 맹세.

결혼과 육아를 하며 아이들이 커가는 속도에 따라 집 평수를 넓혀가는 사이, 결혼 액자도 앨범도 서약문도 어디론가 사라져 버렸다.



'언제부터 잘못되었을까?'



몇 년 전까진, 그런 생각도 했었다. 남편과의 결혼 생활이 파탄에 이른 데에는 분명 내 잘못도 있을 거라고. 그렇게 원인을 찾으려고 노력하는 사이... 정희는 점점 더 병들어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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