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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윤 진 May 30. 2021

무지개색 감정

좋은 감정, 나쁜 감정?

우리집 2호 축복이는 굉장히 섬세하고 말을 잘하는 아이이다.

나도 가끔, 섬세하다는 말을 듣기도 하는데 이 아이는 정말 아이가 맞나 싶을 정도일 때가 있다.


2년전, 축복이가 7살일 때 함께 나눈 대화가 떠올라 기록해 본다.


축복이는 잠들기 전, 많이 우는 편이다.

그 날, 또는 지나 간 과거에서 속상했던 일을 잠들기 전 엄마의 팔베개를 하고 엄마에게 쏟아낸다. 이런 일이 거의 매일인데다 유난히 지친 날은 건성으로 대답만 하기도 한다. 오늘은 축복이의 표정이 심각하다. 뭔가 대충 들으면 안될 같은 분위기로 다가와 안긴다.


"엄마, 오늘 유치원에서 A랑 B랑 노는데 애들이 역할놀이는 안하고 계속 다른 놀이만 해서 내가 놀아주느라 힘들었어. 나는 역할놀이 하고 싶었는데, 하겠다는 애들이 없었어. 근데 엄마도 오늘 바쁘다고 안놀아주고 나 마음이 새까맣게 타버린 날이야...!!!

"죽고 싶어..."


처음에 아이 입에서 죽고싶다는 단어가 나왔을 때는 너무 당황하고 놀랬다.

근데, 곧 축복이가 "관종과"이고 자기를 봐주기를 바라는 마음에 굉장히 강한 단어를 사용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어제 밤에도, 축복이는 그런 마음을 쏟아냈다.


"흐어엉, 지금 내 마음이 새까맣게 타서 까만색이야. 흐어엉"


축복이가 처음으로 마음을 색깔에 비유했다. 감정표현을 하는 새로운 단어를 사용한 것이다. 좀 더 깊은 이야기를 나누고 싶어졌다.


"아, 축복이는 지금 까만색이구나.  엄마가 까맣게 타버린 마음을 토닥토닥 만져주고 씻겨줘서 하얀색으로 만들어 줄게"


"흐어엉, 응..."


"근데, 축복이 마음 속에 다른 색깔도 있어?"


"응.....어떤 날에는 하얀색이야.

엄청 속상하고 엄청 화나고 모든 사람들한테 그랬으면은 까만색이고 엄청 환하고 마음속에 꽃피고 기쁘게 웃고, 그럴 때는 하얀색이고 엄청 화났을 때는 빨간색이고 음, 그냥 그럴때는 보라색이고 슬픈때는 주황색이야."


평소에 생각을 해 둔 것인지 아니면, 지금 떠오르는 것을 내뱉는 것인지 아이는 자신이 평소에 느끼는 감정에 하나하나 색깔을 붙여주었다.


"기쁠 때는?"


"기쁠때는 하얀색. 그냥 기쁠때? 음...남색"


"노란색은 없어?"


"노란색은 그냥, 음... 그냥 그렇지도 않고, 아무것도 아닐 때  난, 노란색"


"초록색은"

"없어"

"파란색은?"

"없어"


"그러면, 빨간색, 주황색, 노란색,

남색, 보라색, 하얀색, 검정색, 끝."


"축복이 마음이 이렇게 7가지 색으로 되어 있네"


"응"


"그럼, 지금 검정색이니까, 이 검정 마음을 엄마가 깨끗해져라, 깨끗해져라 이렇게 토닥토닥 만져줄게"


아이는 어느새 마음이 편안해졌는지 눈물을 모두 그쳤다.


"다시 하얗고 편안한 마음이 되서 푹, 잘 수 있게 엄마가 이렇게 만져줄게요"


"이거왜 찍어?"

(작게 속상이는 목소리로 녹음하는 휴대폰을 가리킴)


"찍는거 아닌데, 축복이 마음을 색깔로 비유한 목소리가 너무 예뻐서 녹음했어. 너무 재밌어서"


"이제 끊으면 안돼?"


"끊을게"


녹음을 끄고 나서도 축복이와의 대화가 더 이어졌다.

(이번엔 몰래 녹음...ㅋㅋㅋ)

.

.

.

"왜 놀고 싶을 때가 회색이야? 좋은 것과 나쁜 것을 섞은 마음이야?"


"금색, 은색도 좋아해, 검정, 회색, 흰색....음"


"너무 좋을 때 금색, 너무 싫을 때 은색, 검정색, 흰색은?"


" 싫을 때는 뭐 이거 싫어요, 뭐 이거 싫어요, 뭐 이거 하기 싫어. 그 정도가 은색이고 너~~무 너무 속상할 때는 검정색이고, 즐거울 때는 금색이고 아주 환하고 밝고 매우매우 즐거울 때는 흰색!, 흰색은 매우 밝음이야"


"오케이. 이해했어. 내일 그 색깔이랑 의미랑 적어서 엄마랑 벽에 붙여놓자.


"안돼, 우리만의 비밀이잖아."


"엄마, 까먹을거 같애, 어뜩하지?


"음, 그러면 이렇게 해도 되겠다. 우리 비밀창고를 만들어서 종이에 그런거를 쓴 다음, 넣어."


"까먹으면?"


"내가 꺼내줄게."


"축복이 보물창고에 잘 보관해야돼"


"응"


"이제 자자, 안녕~~"


너무 섬세한 아이라서 감정을 읽기가 많이 어려웠는데, 색깔로 감정을 비유하니, 이해가 쉬워졌다. 어떻게 아이 스스로 그런 생각을 했는지도 굉장히 놀라왔다. 책을 싫어하는 아이라서 인사이트를 얻을만한 것은 직접경험 밖에 없는데, 직접경험으로도 충분히 깊게 생각하고 표현할 수 있는 어린이의 세계가 신기하다.


'언제 이렇게 컸을까?'


엄마가 몇 달 동안 신경써주지도 못했는데, 아이는 어느새 자기 감정을 말로 표현할 줄 알만큼 훌쩍, 커 있었다.


축복이 마음 속에 자리한 10개의 여러감정들이 다양한 경험을 통해 스펙트럼을 넓히고 더욱 풍부한 감수성과 공감능력을 가진 아이로 자라나길 기도했다.


경험을 통해 자신 안의 프리즘을 통과하여 축복이만의 다양한 빛깔로 감정과 생각, 욕구를 표현할 수 있는 지혜를 갖추어 가길 바라며 하루를 마무리했다.



며칠 전, 엄마 오늘 내 감정은 검정색이야!!! 라고 축복이가 말하면서 2년전 기록이 떠올랐어요. 블로그의 글을 옮겨봅니다. 아이는 2년 동안 꺼내지 않았던 감정의 색을 말하고 엄마와 대화한 내용도 정확히 기억하고 있더군요. 생각보다 더 깊고 놀라운 어린이의 세계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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