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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공실이 Jan 19. 2024

이기적이고 회피형인 남자와의 이별

너를 사랑하는 나. 너무 멋있지 않니?

며칠 전 나와 비슷한 아픔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 나에게 물었던 질문이 있었다. 


"그가 널 사랑했다고 생각해?"


아이러니하게도 불과 한 달 반전의 난 단번에, 응, 이라고 대답했을 테지만 지금의 나는 쉽게 답할 수 없었다. 생각을 해보니 그가 나에게 준 사랑에 대해 의심을 해본 적은 없었지만 그 사랑이 진실이었는지는 나는 이제 모르겠다. C도 그의 기준안에 사랑의 최대치는 썼을 수도 있다. 다만 그의 기준치와 나의 기준치가 맞지 않았을 뿐. 모든 사랑에 두 사람의 수치가 정확히 일치할 수는 없지만 이런 나의 모습을 상대방이 이해해 줄 수 있고 어찌 보면 사랑에 있어 가장 약한 나의 모습을 상대방에게 보일 수 있는 나의 의지가 있는지 가장 중요한 것 같다. 두 사람이 만나 사랑을 한다는 건 일방적인 것이 아닌 끝없는 타협과 수용, 그리고 같이 이끌어나갈 의지를 유지하는 게 건강한 관계를 만드는 것이라 생각한다.


남자에 비해서 여자는 대부분 남자가 자신에게 100을 주기를 바란다. 그것에 대해 서운함을 표현하면 많은 남자들은 그것을 충족시켜 주기 위해 노력하지만 반복적인 패턴이 되다 보면 자신을 그대로 받아주지 못하는 여자에게 서서히 불만이 생기는 것 같다. 결국 사람은 늘 인정과 사랑을 받길 원하는 존재들이니까. 이런 면에 있어서 우리는 이 주제에 대해 줄곧 잘 솔직하게 개개인의 생각을 털어놨었다. 


나는 본질적으로 후회하는 것을 죽도록 싫어하는 사람이다. 그러기에 내가 할 수 있는 것이 있다면 최선을 다해서 해봐야 하고 끝까지 가봐야 한다. 하지만 그는 반대였다. 최선을 다할 수 있는 부분은 유한적이었다. 그는 최선을 다할 때 딱 한번 모든 걸 걸고 해 보고 안되면 미련 없이 손을 터는 사람이었기 때문에 일적인 부분에선 효율적이라고 볼 수 있으나 인간관계에 있어선 매우 냉정한 사람이었다. 그는 항상 나에게 어떻게 모든 것에 100을 줄 수 있냐고, 20도 괜찮고 50일 때도 있고. 꼭 모든 걸 걸고 힘들게 가는 길만이 좋은 건 아니라고. 쉽게 가는 길도 나쁜 선택이 아니라고 반복했던 그였다. 


사실 난 그와 함께 하기 위해 무던히도 희생했다. 다니던 직장에도 양해를 구해 스케줄을 변경하고 그가 있는 도시에서도 직장을 구해 두 곳을 동시에 다니고 있다. 물론 이젠 헤어진 사이라 더 이상 그와 함께 하기 위해서 하는 건 아니지만 나름 내가 성취한 것에 대해 만족하고 생활하고 있다. 어떻게 보면 그의 부모님이 반대를 한다는 걸 알았을 때부터 그와 나는 절대로 그의 부모님에게 아무것도 기대할 수 없다는 걸 알기에 빠듯하긴 하지만 되도록이면 우리 부모님에게서도, 특히 그의 부모님에게서, 경제적으로 손을 벌리지 않을 거라는 생각이 있어 정말 열심히 돈을 아끼면서 지난 1년을 생활했다. 모르는 사람이 보면, 아니 C가 그렇게 하라는 것도 아니었고 작가 스스로가 그렇게 하기로 결정했으면서 뭘 이렇게 유난을 떠냐,라고 할 수 있지만 나도 그와 함께 하기 위해서 포기한 것들이 참 많았다. 


2023년을 돌이켜 보면 내 모든 것은 그에게 집중되어 있었고 그와 다시 재회했을 때 어느 날 밤, "자기는 마지막으로 자기 스스로를 위해서 한 게 뭐였어?"라고 물었을 때 정말 기억이 하나도 없었다. 내가 언제 나 자신을 위해서 미용실에 갔더라? 내가 원하는 레스토랑에 가서 밥을 먹었지? 도무지 떠오르지 않아 헛웃음이 나왔다. "그러게. 생각해 보니까 나 자신을 아예 돌 보지를 않았네."라는 말에 그는 이제라도 나 자신을 많이 돌보라고 했다. 내가 하고 싶은 게 무엇인지 더 깊이 찾아보고 자신에게 쏟는 에너지를 나를 위해서 쓰라고 했다. 그 말이 무슨 의미인지는 알았지만 그 당시 나에게 그는 나와 같은 존재라 여겨서 그에게 해주는 것들이 곧 나에게 해주는 것이라 여겼던 것 같다. 


재회를 하고 나서도 참 힘들었다. 그와 함께 있을 땐 너무 행복했다가 떨어져 있을 땐 너무 불안감이 높아 제대로 잠을 잘 수도 없었고 식욕도 없어 하루에 한 끼만 먹고 지냈던 시간들이 많았다. 그도 새로운 곳에 적응을 하면서 나에게 의지하는 구석이 있었고 나도 그랬기에 되도록이면 서로 시간을 많이 보낼 수 있도록 스케줄들을 조정했었다. 그가 하는 직업도 혼자서 보내야 하는 시간이 많기에 그는 외로움을 많이 타는 사람이었다고 털어놨다. 하지만 이 길도 그가 택했기에 이런 외로움을 느끼는 것에 적응해야 했고 불가피한 감정중 하나라고 여겼다. 그래서인지 나는 이런 그의 외로움을 채워주고 싶은 이상한 구원자 마인드가 생겼다. 이것이 정말 위험한 감정중 하나라는 걸 자각도 못한 채로. C의 어머니가 나에게 말했던 것 중 하나가, C가 처음으로 촌같은 도시에 가니 외로워서 제대로 판단을 못 내려 그 외로움을 달래기 위해서 나를 만나는 거라고. 너를 좋아하는 게 아니라 네가 좋다고 쫓아다니기 때문에 그냥 그 마음을 받아준 것뿐이라는 말이 갑자기 떠올랐다. 


차마 그와 재회했다고 우리 부모님에게 털어놓지 못했지만 부모님은 이미 눈치를 채셨는지 가을에 나를 방문하셨을 때, 이렇게 기죽은 우리 딸을 본 적이 없다며 항상 당당하게 살라고. 엄마 아빠는 너를 믿으니 네가 내리는 선택을 뭐든지 받아줄 거라며 네가 원하는 인생을 맘껏 없이 살아보라며 항상 옆에서 뒤에서 널 지켜줄 테니 용기 내라며 말씀하셨을 때 우리 가족은 고깃집에서 맛있게 익은 고기를 앞에 두고 펑펑 울었다. 서로에게 미안함과 사랑, 그리고 감동이 뒤엉켜 눈물을 참을 수가 없었다. C의 부모도 조금의 유연함을 가졌던 분들이었다면 어땠을까 라는 생각이 들기도 했고. 


재회를 한 커플들은 공감하겠지만 이미 헤어짐을 겪고 다시 만난 사이라 초반엔 모든 게 조심스럽다. 서로를 더 배려해 주기 위해 노력하고 눈치를 보며 조각이 나고 흠이 난 사랑을 다시 메꾸려고 시도한다. 하지만 재회를 하기 위해 붙잡은 사람은 늘 을의 위치고 그 사람의 마음을 받아준 갑에 위치한 사람과의 불균형은 사람을 미치게 만든다. 조금이나마 도움이 될까 싶어 우리의 불안함과 그의 부모님에 대해 어떻게 이 문제를 풀어나가야 하는지 알기 위해 커플상 담을 받기로 결정하고 거의 두 시간 동안 상담을 받을 동안 C는 상담사님이 물어보는 질문들에 대답을 잘하지 못했다. 대답을 하기 싫어서 보단 살면서 생각을 해보지 못한 것들에 대해 질문을 받으니 뭐라 대답할 수 없었던 거다. 


-남자친구분께선 대답하시는데 어려워 보이시네요. 여자친구분이 이렇게 말을 하실 때 뭐가 느껴지세요?

-미안함이 느껴져요.

-제가 볼 땐 남자친구분은 여자친구분이 힘들어한다는 건 알지만 그 힘듬의 깊이가 얼마만큼인지는 인지를 못하고 계신 것 같아요. 남자친구분은 뭘 원하시나요?

-... 사실 이런 거에 대해서 생각해 본 적이 없어서 뭐라 답을 하기가 어렵습니다.

-제가 보기엔 두 분은 비슷한 면도 가지고 계시지만 너무나 다른 두 사람이 평행선을 걷는 것 같아요. 여자친구분은 너무 정서 그리고 감정이 발달된 분이시고 남자친구분은 이성적인 사고가 발달되신 분이라 중간에서 만나는걸 많이 노력하셔야 해요. 


커플 상담에서는 우리가 예상했던 그의 부모님에게 어떤 마음가짐으로 대해야 하는지에 대한 이야기보다는 우리 자체 내에 문제점들에 대해서 대부분의 시간을 보냈다. 아, 우리는 대화도 잘하고 솔직하게 털어놓으니 별 문제가 없을 줄 알았는데 성향적으로도 참 다른 부분이 많구나 싶었다. 상담사님은 커플 상담이 끝난 후 개인 상담도 필수적으로 필요하니 상담일을 잡자고 하셨지만 C는 상담에 대해서 회의적이었다. 남에게 속내를 털어놓는 게 불편도 하고 솔직히 우리가 모르는 내용도 아니지 않냐며 차라리 속을 털어놓는 상대방이 나라면 언제든지 하겠지만 남에게 털어놔서 그리 도움이 많이 되지는 않을 것 같다며 상담을 거부했다. 나는 개인상담을 받기로 했고 모든 것을 다 털어놨다. 


-사실 C의 부모님에게서 그런 말들을 들은 후로 가끔가다 악몽을 꿔요. 하얗고 예쁜 눈이 내리는 날에 결혼식장에 갑자기 C의 아버지가 들어와 제 눈앞에서 제 부모님에게 칼을 휘두르는 악몽을 꿔요. 너무 괴로워서 과호흡이 오는 상태로 일어나면 다행히도 꿈이었구나, 괜찮을 거야라고 다독이면서 잠들곤 했어요. 그런데 내가 이런 공포가 있다는 걸 남자친구에게 털어놓을 수가 없어요... 내가 이렇게 불안한 걸 알면 그는 틀림없이 또 떠나려고 할 테니까.

-상담사로서 보면 두 분이서 같은 것을 바라고는 있지만 그거에 대한 속도가 굉장히 다른 것 같아요. 남자친구분은 정말 속도가 느리고 시간이 더 필요한 사람인 것 같아요. 상담사로서는 XX에게 그런 남자친구를 진심으로 사랑한다면 기다려주라고 서로에 대해서 더 집중하고 아끼며 시간을 보내라고 하고 싶지만, 상담사가 아닌 사람으로서는 XX에게 이런 사람을 기다려주라고 말하기가 너무 미안하네요. 나도 상담을 정말 오랫동안 해봤지만 이렇게까지 극단적인 분들은 경험해보지 못해서 듣는 내내 나쁜 의미로 놀랐어요. 미안해요 XX 씨, 기다려 줄 수 있으면 기다려주고 그게 너무 고통스러울 것 같으면 아프지만 놓아요 XX 씨를 위해서.


상담을 끝으로 나는 더욱 그에게 부담을 주지 않으려 무던히도 노력했다. 그래, 우리 둘만의 관계에 집중하면 안 보이던 길도 보일 테고. 항상 긴 터널 끝엔 빛이 보이니 이렇게 초반에 많이 힘들었으니까 틀림없이 살아가면서 우린 서로를 더 존중해 주고 보듬어주며 이해해 주며 살 수 있을 거란 생각을 많이 했었다. 그래서 그가 새로운 직장에 자리를 잘 잡는데 걸림돌이 되지 않게 불평도 많이 하지 않았다. 재회를 하기 전에 연애에서 나는 그의 눈치를 정말 많이 봤었기 때문에 재회를 하고 난 후에는 징징대는 톤이 아닌 당당히 내가 원하는 것들을 요구했었다. 그런 내 모습에 그는 가끔가다 너무 뼈 때리는 말들을 하는 게 아니냐며 장난스레 얘기했지만 사실 다 해야 할 이야기들이었다. 가끔은 내가 너무 심하게 얘기했나 싶다가도 언제까지 그의 기분에 맞춰 내가 필요한 것들을 요구하지 못하는 건 길게 봤을 때 좋지 않다는 생각이 들어 재회를 하고 난 후 조금씩 안정기에 들어서면서 그에게 2023년 연말에 함께 우리 부모님이 있는 곳으로 가서 오랜만에 휴식을 취하자고 권장했고 처음엔 망설였지만 좋은 생각인 것 같다며 여행 계획을 구체적으로 세우고 있었다. 


C에게서 본받을 모습 중 하나는 자기의 건강을 굉장히 잘 챙기는 습관이었다. 난 그와 반대로 건강한 체질을 가지고 있긴 하지만 가끔 몸을 혹사시키며 일을 할 때가 있었다. 좀 더 정확하겐 내 몸을 챙기기 전에 소중한 사람들을 먼저 챙기는 성향이라 나를 먼저 돌보지 못하는 때가 많았다. 좋은 식습관, 매일 운동을 하는 그는 내 건강을 걱정했고 유일하게 나에게 한 잔소리도 건강에 관한 것이었다. 그런 그가 업무 과로 때문인지 조금씩 피곤한 기색을 자주 보였고, 코피도 자주 흘리며 이상한 기색이 보였다. 나 역시 다른 지역에 있는 직장 생활을 하러 갈 때마다 안색이 안좋아보였고 거울에 비친 내 모습이 너무 못나보였다. 이상하게 연하남과 만나다 보니 왠지 더 외모와 몸매에 더 신경 써야 할 것 같은 이상한 부담감이 있었는데 그를 너무 챙기느라 내 몰골은 이 정도로 망가졌구나 하는 게 눈에 보이니 자존감이 많이 낮아졌다. 


피곤하긴 했어도 서로 붙어있을 때만큼은 또 너무 좋았기에 굉장히 평화로운 11월의 한주가 다가왔다. 내 스케줄을 조정할 수 있는 직장에 다녀서 약 9일 정도를 재택근무 하는 기간이 생겨 그와 오랜만에 9일이라는 시간을 계속 보냈다. 약간 이미 부부같이 생활을 한 터라 별로 새로울 건 없었지만 그래도 나름 설레었다. 그와 평생 함께하고 싶다는 생각이 강했지만 아마 내 무의식 속엔 그와 남은 시간은 얼마 남지 않았다는 걸 이미 알고 있었을 수도 있다. 호수를 걸으면서 보기 힘든 백조를 발견했다. 생각보다 C는 다양한 정보들을 알고 있어서 그가 조잘조잘 이야기를 할 때 난 새로운 것들을 배우기도 했었다. 백조는 유일한 일부일처제 조류로 평생 동안 한 짝을 이루어 살아간다는 것을 그로부터 처음 알게 됐었다. 와- 정말 로맨틱하다. 


그리고 그날밤 우리는 앞으로 서로가 원하는 결혼 후의 삶, 목표들, 그리고 서로가 조심해야 할 부분들 등등 깊은 이야기를 나누었고 서로의 부모님에게 어떻게 대해야 할지 고민했었다. 우리 부모님도 딸이 원하니 어쩔 수 없이 다시 마음을 여셨지만 C에게 굉장한 원망이 있으셨다. 하지만 난 우리 부모님을 잘 알기에 결국 딸이 행복한 게 당신들의 마음에 들지 않아도 져주실 분들이었기 때문에 약간의 걱정은 있었지만 크게 고민이 되진 않았다. 하지만 C의 부모님은 다르지 않은가. 과연 우리가 결혼했다는 걸 나중에 알게 된다면 어떻게 반응을 하실까. C는 그의 어머니가 우리가 이별했다는 걸 알고 동생들이 있는 곳으로 가신 이후부터 부모님과의 연락을 끊었다. 간헐적으로 그의 어머니가 연락을 시도는 하셨지만 그는 전혀 대꾸도 하지 않았고 그렇게 거의 반년이란 기간 동안 부모님과의 연을 잠시 절연했었다. 


"자기야 기억나? 그때 우리 헤어지고 다시 이번에 재회했을 때 결혼을 추진한다면 지난번에 했던 실수들은 다시 반복하지 않을 거란 말. 그러면 우린 자기 부모님에게 알리지 않아야겠네, 그렇지?"

"응. 도저히 뜻을 굽힐 분들이 아니야."

"과연 우리가 자기 부모님을 평생 안 보고 살 수 있을까? 그래도 자기 부모님인데?"

"그렇게 해야 돼."

"자신 있어? 괜찮겠어?"

"괜찮아. 안 보는 게 더 우리를 위해서 좋아."

"그래... 그리고 연말에 우리 부모님을 뵙게 되면 아마 우리 부모님이 자기한테 쓴소리도 할 거고 처음엔 미워할 수도 있어. 그거 감당할 수 있을 것 같아? 내가 최대한 막아볼게."

"아니야. 나 변호하려고 할 필요 없어. 당연히 화가 나실 테지 내가 한 게 있고 우리 부모님이 한 게 있는데..."

"어쩌다 우린 서로에게 사랑에 빠졌을까?"


그렇게 행복했던 9일이란 시간을 보내고 서로의 일 때문에 5일 정도를 못 보게 되었는데 그때 또 이상한 여자의 촉이 발동됐다. 그 답지 않게 답장이 느렸고, 전화를 피하고, 자꾸만 피곤하다는 핑계로 도저히 대화를 나눌 수 없었다. 결국 서로 다시 앞으로 잘 나아가보자는 약속을 한 지 5일 만에 그는 또 헤어지자고 했다. 더 이상 할 수가 없다며. 사실 재회를 했을 때부터 사랑한 마음보다는 미안한 마음이 더 컸다고. 자신도 정말 잘해보고 싶었는데 자신의 몸에 이상이 오는 걸 느끼며 정신상태가 온전치 않은 걸 느꼈다고. 내 부모님의 목소리가 전화너머로 들리면 자신도 모르게 몸이 굳고 근육이 경직되며 가끔가다 과호흡이 오며 자꾸 나와 자신을 괴롭히던 자신의 부모가 떠올라 괴로워 정신적으로 큰 고통이 느껴진다고 이런 상태로 어떻게 자신이 누구의 남편이 되고 아이들의 아빠가 되겠냐며 또 헤어짐을 고했다. 자신이 지금은 도저히 연애, 더 나아가 결혼을 함부로 상상할 수 없다며 자신의 직장이 좀 더 안정되어야 하고 심리상담도 받아 자신의 부모에게서부터 받은 트라우마를 치료하는 게 가장 급선무라며 자기가 나아지는 동안 그 옆에 내가 상처받으면서 있는 건 원치 않는다고 했다. 


사실 난 그가 나보다 연하이기에 결혼이 급하지 않고 아이에 대해서는 더더욱 시간적인 여유를 가져도 될 생각을 가지고 있다는 사람이었단 걸 알았다. 그래도 사랑하면 나를 위해서 조금은 배려해 주겠지 라는 건 착각이었던 것 같다. 난 그가 시간에 쫓기지 않기 위해 난자를 냉동할 생각이었고 우리가 결혼한다면 차라리 배아냉동을 하는 게 어떨까 하는 이야기를 꺼냈을 때 좋은 생각이라고, 그리고 자신이 미안하다고 했던 남자였다. 


그렇게 또 우리는 첫 헤어짐과 똑같은 일들을 반복했다. 헤어지자고 하는 그를 쫓아가 난 또 붙잡으려 했지만 실패했고 또 며칠을 시간을 함께 보내며 마무리를 했다. 아니, 정확히는 그는 마무리를 했지만 난 마무리를 할 수 없었다. 이렇게 여러 번 헤어졌다 다시 만났단 한 사이인데 그가 지금 하는 업무가 너무 많고 심리상담을 받으면 충분히 개선될 수 있다 생각해 난 또 쓸데없는 희망을 품었었다. 그는 내가 그의 옆에 있는 것을 원치 않는다고 했지만 난 사랑의 힘으로 많은 걸 극복할 수 있고 내가 아직 더 줄 사랑이 있기에 그가 치유되는 과정을 옆에서 함께 겪어 나아가고 싶었고 힘이 되어주고 싶었다. 그렇게 몇 번을 말해도 그는 꿈쩍 하지 않았고 결국 떠났다. 그가 완전히 떠날 때 나에게 도움이 되었던 책을 그에게 선물해 주었고 책을 통해서 느끼는 점이 있다면 언제든지 연락하라고 말하고 날 떠나는 매정한 그 남자를 더 이상 잡을 수도 없었다. 


난 우리가 재회했을 때 다짐을 한 게, 이번에 다시 만나게 되면 절대로 헤어지지 말아야지. 다시 만났는데도 헤어지게 되는 순간이 온다면 그건 정말 우리의 인연의 끝일 거라고. 너무 많은 걸 겪어서 그 지경이 된다면 아무리 사랑해도 이 사람은 내 사람이 아닌 거라는 걸 받아 들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와의 두 번째 이별에 난 처음엔 덤덤했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또 지옥을 경험하는 것 같았다. 그러는 와중에 그는 온전히 자신을 위한 시간을 보내고 있었고 가끔씩 연락이 닿으면 서로의 안부를 전해주곤 했었다. 그는 이렇게 잘 지내는데 나는 왜 이렇게 못 지낼까 하는 괘씸한 마음에 나는 소개팅도 나가보고 다시 소개팅 앱을 켰다. 누군가와 연애를 하고 싶었기 다 보단 그냥 내 이야기를 들어줄 일면식 없는 사람들과 대화하고 싶었다. 나 또한 누군가와의 관계를 끝내고 이렇게 빨리 새로운 사람들과 이야기하며 시간을 보내는 게 옳지 않다고 생각했지만 아무라도 좋으니 그저 친구같이 상담사같이 내 이야기를 들어줬으면 했었다.


그에게서 몇 통의 이메일들이 왔었다. 책을 다 읽은 건 아니지만 그가 느낀 점에 대해 설명해 주었고 아직도 내가 많이 생각나고 왜 모든 일이 이렇게 흘러가게 되었는지 미안하고, 수고했다며 건강하게 지내라는 말이 쓰여있었고 바보같이 난 또 미련하게 그 이메일들에 항상 답장을 했었다. 그래, 그가 정말 심적으로 나아지면 꼭 다시 예전처럼 나에게 돌아올 거야 라는 헛된 희망이 날 살아가게도 하고 무너지게도 했다. 의미 부여하면 안 되지만 원래 SNS도 안 하고 카톡프로필은 전혀 신경 쓰지 않는 남자가 나와 똑같은 사진을 프로필 사진으로 바꿔놓고 우리가 마지막으로 보았던 노을 사진을 배경사진으로 해놓으니 의미부여를 안 하고 싶어도 너무 헷갈릴 수밖에 없었다. 그러다 난 까먹고 있던 소개팅 앱을 지우기 위해서 다시 켰는데 제일 먼저 뜬 누군가의 프로필이 바로 C였다. 그것도 내가 찍어준 사진들이 있었고 새로 작성한 프로필은 간단했지만 머리를 망치로 두들겨 맞은 것 같았다. 


연애할 상황이 아니라고, 오로지 자신의 커리어와 심적 안정을 찾기 위해, 자신을 찾기 위해 모든 시간을 쓸 거라고 했던 사람이 연애가 목적인 소개팅 앱에 프로필을 만들고 활동하고 있다니. 처음엔 심장이 미친 듯이 뛰기 시작했고 손과 발엔 식은땀이 나고 갑자기 헛구역질을 했었다. 난 정말 그를 믿었는데. 아니, 혹시 그도 나처럼 자신의 이야기를 들어줄 사람들이 필요했던 건 아닐까? 그래도 배신감에 화가 잔뜩 났었다. 결국 너도 이것밖에 안 되는 남자였구나. 나와 함께 하는 건 오로지 힘들고 고난이 가득한 길이니 편한 길을 찾고 싶었구나. 부모님의 반대가 큰 영향을 끼친 건 맞지만 결국엔 너였지 내 손을 놓았던 게. 내가 가장 힘들고 고통스러울 때 넌 나를 떠났고 아무렇지 않게 새롭고 좀 더 쉬운 길을 위해서 넌 그럴싸한 이유로 끝까지 나쁜 놈이 되지 않기 위해, 오로지 너 자신을 위해, 나를 초라하게 만드는구나. 하필 난 이걸 크리스마스이브에 알아서 내 연말은 다 망가졌었다. 


그렇게 12월 초 마지막 우리가 나눈 카톡에 그는 아직도 나를 너무 사랑한다며, 나란 존재는 너무 소중하고 유일하다는 그 말을 마지막으로 더 이상의 문자는 없었다. 그가 소개팅앱을 쓴다라는 사실을 알기 전엔 그가 가끔씩 이메일을 보내면 답장을 했지만 이 일을 안 이후로 그가 이메일을 보내도 답장을 하지 않는다. 그 이메일엔 너무나도 뻔뻔하게, 


"난 아직도 자기 전에 그런 생각을 할 때가 있어. 어쩌다가 이렇게 됐을까. 하지만 옛날에 머무는 것은 아니야. 새해가 시작됐어. 과거에서 배우되 미래로 나아가야지. 


내가 지금 할 수 있는 말은 작년에 수고 많았어. 미안했고 고마웠어. 내 삶에서 자기가 차지하는 부분이 많고 생각나는 부분도 많지만 그럴 때마다 연락할 수 없는 점 이해해 줘. 올해는 더욱더 웃고 계속 좋아져서 나중에 나이 들어서는 2023년을 돌아보면서 사랑을 떠올렸으면 해. 나도 인내할게.


노력하는 C가."


돌이켜보면 그는 자기애가 너무 강한 남자였고 오로지 자기중심적인 사람이었다. 아직도 그럴 테고. 


나는 이제야 알았다. 부모가 문제가 아니었어. 바로 이 남자가 문제였다. 나의 아름다웠던 지난 2년 동안의 추억을 이 한순간의 일로 다 얼룩지게 만든 그가 너무 밉다. 그는 나를 사랑하긴 했지만 나보단 이런 애틋하고 힘든 사랑을 지켜내기 위해 최선을 다했던 자기 자신을 사랑했던 거다. 마치 비련의 남자주인공인 것 마냥 이 세상의 모든 비극과 아픔을 견뎌내기 위해 난 이제 나 자신을 찾아 떠나야 하는 여행을 가야 한다고. 그 여행이 새로운 여자인 줄은 전혀 상상도 못 했지만. 아, 이런 사랑을 한 난 정말 멋진 남자였지 라는 자기애적 생각에 빠져있을 거다. 


난 빌런가족을 가진 회피성 나르시시스트인 남자와 연애를 했던 거다.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니다. 그와 그의 부모가 나에게 했던 말이 있다. 인생에 인과응보란 없다고. 



행복하길 바란다. 과연 네가 그럴 수 있을진 모르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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