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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두목 Jul 12. 2019

위대한 쇼맨

차별을 넘어선 어떤 것에 대한 이야기

오프닝이 시작된 것뿐인데 주책없이 눈물이 멈추질 않는다. 보다 못한 아내는 호르몬 검사를 받으러 가야 하는 게 아니냐고 한다. 근데 아니다. 분명 이 영화는 오프닝이 시작되면서부터 줄곧 하나의 생각에 이미 감동으로 나는 가슴이 벅찼다.


며칠 전 출근길에 라디오에서 OST 하나를 들었다. 바로 이 영화 <위대한 쇼맨>의 타이틀곡이라며 소개된 'This is me'다. "이게 나야!", "바로 이게 나라고!"라며 세상을 향해 외치는 당당한 외침이 있는 영화라고 소개된 영화다. 영화에 대해 아무것도 몰랐지만 봐야 할 영화라고 생각했었다.


햇볕 좋은 오후. 너무 시끄럽다고 아내에게 핀잔을 들으면서도 볼륨을 줄이지 않았다. 쏟아지는 조명에 P.T(휴 잭맨)가 당당하고 행복한 표정으로 노래를 시작하자 공연단이 일사불란하게 움직이며 떼창 하는 장면. 전혀 울 장면도 아니었다. 게다가 이제 막 시작했는데 눈물이 터졌다. 꿈을 향해 당당히 외치는 그의 노래가 가슴을 메웠다.


영화는 애니메이션 씽(Sing)과 닮았다. 뛰어난 공연 기획자로 성공 가드를 달리다 화재로 모든 걸 잃고 결국 남는 건 자신이 이용했던 사람들과 그들을 통한 삶의 깨달음. 그렇다. 이 영화는 그다지 독특할 게 없는 스토리를 보인다. 위대한 쇼맨이 보여주는 남다르지 않은 평범한 스토리라니. 어찌 보면 아이러니하지만 보고 나면 엔딩 크레디트가 다 끝나고 나서도 자리를 떠날 수 없다.

영화는 19세기 초 이민자의 나라 미국이 이제 막 재건되는 시기. 하루하루가 치열한 보통의 사람에게 차별과 멸시를 받아야 하는 피부색이 다르고 키가 크거나 작고 너무 많이 뚱뚱하고 온몸이 문신을 한 것처럼 피부가 남다르고 여자 몸에 근사한 수염을 가진 그리고 다양한 동물들까지 모인 보통 이하의 사람들은 삶의 가치를 가질 수 없다. 그런 세상에서 이들이 밖으로 끄집어낸 이야기다.


엄밀히 말하면 위대한 공연 기획자인 P.T의 성공을 위한 '꿈'에 대한 이야기다. 성공을 위해서라면 "조롱을 받더라도 돈을 벌면서 받아라"라며 저신장 장애인 톰(샘 험프리)을 설득할 정도다. 게다가 천상의 목소리를 가졌지만 얼굴에 난 수염 때문에 조롱받아야 하는 레티(케알라 세틀)에게 "아름답다"라는 망발도 서슴지 않는다. 이런 남들과 다른 그들을 찾아내 '바넘 박물관'에서 공연을 열었다.


'죽은 것'들을 모아 놓았던 바넘 박물관에 그들이 모인 건 그들 역시 부모들에게조차 부끄러운 존재들로 숨겨야 할 '것'들이었고 '죽은 것'들이었단 뜻이다. 그리고 이 바넘 박물관은 자의 건 타의 건 '서커스'로 생명을 부여받는다. 그들 역시 죽은 것들에서 '살아 있는 사람'이 된 것이다. 그것도 열광적인 환호와 함께.


일각에서 말하는 것처럼 P.T의 탐욕은 소수자 혹은 장애의 관점에서 보면 차별이라는 인권적 불편함을 줄 수 있다. 하지만 단순히 그들이 조롱거리가 되고 사람들에게 욕을 먹는 시대적 상황에 매몰될 필요가 있을까 싶다. 그들이 죽은 것들에서 살아 있는 사람으로 탈바꿈했다는 사실은 그 어떤 인권보다 중요하지 않을까. 그래서 자신들을 이용하고 떠났던 P.T가 알거지가 되어 돌아왔을 때 재기를 위해 힘을 합치고 "부모조차 부끄러워서 숨겼던 우리를 당신이 꺼내 줬어요."라고 레티는 진심을 담을 수 있던 게 아니었을까.

내가 어린 시절엔 장애인이 흔하지 않았다. 미쳤다고 표현되던, 지금으로 치자면 정신장애인이 가끔 아주 가끔 동네에 출몰했다 사라지는 정도였다. 학교에서도 최소 내 기억엔 내가 학교를 다닌 78년부터 89년까지 장애인은 본 적이 없었다. 심지어 초등학교(당연 그때는 국민학교) 때에도. 왜 그랬을까? 지금 생각해보면 레티의 말처럼 세상 사람들로부터 받을 손가락질이 두려운 부모들은 남들과 다른 자신의 아이를 부끄러운 존재로 낙인찍어서 사람들로부터 숨겼을 것이다. 혹은 산골 깊숙이 자리 잡은 시설로 보내 버렸거나 어쩌면 더 끔찍한 일도 자행했을지도 모르겠다.


어쨌거나 지금은 좀 더 많은 장애인이 세상에 나오고 있고 자신의 목소리를 담아서 "This is me"를 외치고 있다. 나 역시 대학에 다니다 장애인이 되었다. 장애인이 되고 세상에 나오는 일은 쉽지 않은 일이었으며 그건 '선택'의 문제가 아닌 당연한 것이라는 걸 요즘에야 깨달았다. 남들과 다르다는 것, 키가 좀 크거나 작고 뚱뚱하거나 마르고 주름이 많거나 털이 많은 것 혹은 피부색이 희거나 검은 것의 문제는 그렇지 않은 사람들이 좀 더 많아서 생기는 다름일 뿐이다. 다시 말하면 주류, 비주류의 문제라는 것이다. 어차피 우리 모두는 질병을 얻거나 설령 그렇지 않더라도 자연스럽게 죽음을 맞이하는 게 순리며 그렇지 않은 사람은 아무도 없다. 말 그대로 묘비명 아래 누우면 모두 같은 꼴 아닌가.

이 영화가 주는 좋은 메시지는 이런 차별적 요소를 개인적 탐욕에 이용한 이야기를 불쾌하게 볼 것이 아니라 여전히 이런 차별을 자행하는 자신 스스로의 모습을 볼 줄 알아야 하며 불편해야 한다는 메시지를 함의한다.


이야기가 길어지지만 어제 용인 구성에 있는 초대형 유명 마트에 갔다. 초행이라 장애인 주차 구역을 찾아 헤매다 발견했는데 먼저 주차하는 차가 있어 기다렸다. 보아하니 차가 외국의 유명 브랜드의 밴이다. "오 이런 비싼 차가 장애인 차량이라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내리는 운전자와 동승자 그 어디에도 보행 장애인이 없다. 장애인 주차구역은 '보행 상 장애인이 탑승해야만 주차가 가능한 곳'이다.


퇴근 시간 저상버스를 타려는 휠체어 장애인에게 "왜 이 시간에 장애인이 버스를 타느냐"라고 화를 냈다는 버스 운전사에게 사과를 받으러 버스 앞을 온몸으로 막았다는 신문 기사를 읽었다. 설왕설래하다가 버스 운전사는 경찰에 신고하고 출동한 경찰은 자초지종을 듣고 운전사에게 사과를 지시했지만 운전사는 거절하고 버텼다. 그런데 더 어처구니없는 건 정체 시간이 길어지자 승객들은 경찰과 장애인에게 비난과 욕설을 해댔다고 한다.


승객들은 비난을 버스 운전자에게 했어야 옳지 않을까? 자신들이 늦어지는 '시간'이 문제가 아니라 당연한 권리인 버스 탑승을 위해 저상버스를 타려던 장애인에게 인격적 모욕을 한 버스 운전자로부터 초래된 일이 아닌가 말이다. 그런데도 승객들은 자신의 '빠른 이송'을 방해한 장애인에게 욕을 해댔다. 그러면서 한편으로는 그들은 초대형 유명 마트에서는 버젓이 장애인 코스프레를 해댄다. 누가 더 장애인스러운가? 우리 사회는 참 알다가도 모를 인격을 가진 불쌍한 사람이 너무 많다.


다시 영화로 돌아와 이야기를 마무리하면 원제 'The Greatest Showman'에서의 Greatest는 '최고의 위대함'을 말한다. 하지만 영화에서 P.T는 시종일관 위대하지 않았다. 비열한 사기꾼에 아주 탐욕 가득한 공연 기획자일 뿐이었다. 어디가 위대한 것일까?


아마 P.T의 지고지순 혹은 자신의 꿈이었던 성공이 가족을 행복하게 만들어 주는 것이었다는 걸 깨닫자마자 용서를 빌러 아내에게 달려갈 수 있는 행동력이나 자신의 성공을 위해 이용하기는 했지만 보통과는 다른 사람들에 대한 편견이 애초에 없었던 박애주의가 아니었을까. 결국 위대한 쇼맨의 꿈이자 목표는 가족의 곁에 있는 것이고 그의 아내 채러티(미셀 윌리엄스)의 소원을 이루어주기 위해 노력하는 한 남자이자 가장이어서 아닐까 싶다. 그리고 남들과 달랐던 사람들 역시 그에게는 한솥밥을 먹는 가족이 아니었을까.


늦었지만 단연코 올해의 영화에 이 영화를 꼽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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