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방의 자리에서 다른 세계를 상상하다
장애인 복지 현장에 있는 나로서는 그냥 지나칠 수 없는 책이었다. 특히 장애를 사회복지의 특정 카테고리쯤 생각할 수 있는 부분을 학문적 영역으로 바라볼 수 있다는 화두도, 도전이라는 의미도 좋았다.
반면 이 책이 주는 흥분과는 달리 개인적으로 투쟁 혹은 해방적 활동에는 적극적인 참여도 그럴 마음도 하지 않는 편이다. 다만 우리 사회가 소수자들 중에 더 소수자일 수밖에 없는 장애인이나 장애에 대한 주류의 변화를 촉구하는 외침이 활동가들에게는 어쩔 수 없는 '선택'이라는 점에는 뜻을 같이 한다.
저자가 말하는 변방의 시좌視座가 중요한 상징성을 갖는다고 생각한다. 비장애가 주류인 사회에서 장애를 '관점'의 변화로 다른 '면'만 바라보는 대서 그치지 말고 장애를 포함한 맥락을 담아야 하고 그래서 풍경까지 바꿀 수 있는 변화가 필요하다는 지적에 격하게 공감한다.
이 책을 논문처럼 읽는 게 아니라 보통의 인문학 책 정도로 가볍게 읽고 싶지만 시작부터 묵직하다는 걸 부인하긴 어렵다. 하지만 장애를 보다 다학제적으로 느낄 수 있길 바란다. 한편으로는 저자의 키워드 대부분을 지지하지만, '실천지향적'의 사회복지학과의 실천지향을 두고 비교한 부분은 이견이 좀 있다. 나 역시 사회복지를 공부하고 사회복지현장(장애인복지)에 있는 당사자로서 두 학문이 초점을 맞추는 부분에서 장애학이 당사자의 활동 다시 말하면 제한 또는 제약에 대항하는 부분은 확실히 장애학이 더 높다는 점은 인정되지만 딱히 지원과 저항이라는 초점에 사회복지사와 당사자라는 입장으로 규정하는 것은 사회복지 실천 현장에 장애 당사자도 적지 않음을 간과하는 것이라 본다. 이런 점에 단순히 사회복지 실천 현장이 지원에 머무른다고 보기 어렵지 않은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저항적 측면이 그리 높지 않긴 하지만.
뒤통수 한 대를 심하게 얻어맞은 것처럼 아찔하다. 그동안 장애인의 차별을 생각할 때 주류인 비장애인들의 입장에서 배제 혹은 무시됐던 장애인의 입장에 열을 냈었는데 저자의 묶음 사례는 생각지도 못한 성찰이었다. 농인과 맹인의 사이에 비장애인과 목발 이용 장애인과 전동 휠체어 이용 장애인 사이의 비장애인이 기능과 역할에 어떤 차이가 있으며 그들이 어떻게 묶이는지, 나아가 장애인으로 묶인 그들이 과연 서로를 얼마나 이해하는지에 대한 지적은 그동안 이분법으로만 생각했던 장애를 확 무너트리는 계기가 되었다.
"장애 문제가 장애인과 비장애인을 포함한 우리 모두의 문제인 것은 단지 장애인이 좋으면 비장애인도 좋고, 비장애인도 언제든지 장애인이 될 수 있기 때문만은 아니다. 더 근본적으로는 비장애인이 장애 문제의 한 축을 이루고 있기 때문이다. 장애를 이런 식으로 이해할 때 우리 사회는 장애인을 비로소 타자화하지 않을 수 있다." p83
유전자 DNA와는 비슷하지만 다른 결을 갖는다고 생각하는 우생학에 관한 일들이 역사적으로 오랜 세월 그것도 전 세계적이며 대대적으로 행해졌다는 사실에 벌어진 입을 다물지 못할 정도다. 특히 복지 천국이라는 스웨덴조차 보편주의를 위해 국가에 기여하지 않으며 지원받는 장애인의 수를 줄이기 위해 노력했다는 사실 또한 벌어진 입이 더 크게 벌어질 수밖에 없었다.
또 이 대목에서 거품을 물 수밖에 없는 이유는 인간의 가치를 노동의 입장에서 해석하는 사회복지사와의 열띤 토론이 생각나서다. 장애의 경중의 문제가 아니라 노동을 해서 임금 생활을 하지 않는, 즉 생산활동을 하지 않는 장애인은 존재 가치가 없다고 단언하는 그의 입장이 우생학적 입장의 제거와 뭐가 다를까. 그는 장애인의 직업훈련을 통해 기능적인 인간으로 가치를 증명하려는 제도가 시행되는 점 또한 이를 반증한다는 입장이었다.
인간이 가치를 따진다는 것은 인권적 입장에서 해석한다기보다 타의적 선택에 의해 출생된 존재의 가치는 주어진 것인지 부여된 것인지 생각해 볼 문제다. 주어진다는 입장은 스스로의 가치라기보다 부모에 의해 선택 후 주어지는 수동적 의미이고, 부여됐다는 의미는 좀 더 넓은 의미로 해석하여 태어나면서 고유의 개인적 가치에서 얼마든지 능동적일 수 있지 않을까. 노동의 문제는 인간적 가치를 증명하기 위해 시행되어야 할 문제가 아니라 개인의 선택이어야 하며, 이런 일련의 과정에서 우린 교육 역시 개인의 선택이 될 수 있어야 한다.
고등교육은 차치하고서라도 배움을 받고 싶어 특히 정규 교육으로 편입되려 노력하는 중증 장애인의 경우 편의 시설이 없다는 이유로, 혹은 통제되지 않는다는 이유로 제도권 교육 밖으로 밀어 내기만 하는 교육 시스템 안에서 보다 기능적인 직업을 얻기 위한 기회는 아예 처음부터 주어지지 않는 현실에서 어떻게 가치를 단순히 노동으로만 평가할 수 있을까. 우린 심각하게 고민해야 한다.
대한민국 역시 드러나는 우생학적인 문제는 아닐지는 모르지만 산전 유전자 검사로 장애를 선별하는 것은 당연해진지 오래다. 이와 관련하여 푸코의 '살게 만들고 죽게 내버려 두는' 국가권력에 대한 이야기는 과거 산업사회 이전과 이후의 장애인으로 나누는 것에 납득할 수 있을지 모른다.
'노동'을 기준으로 사람의 생산성이 중요해지고 그런 점에서 장애인은 노동하지 않고 소비만 하는 다시 말하면 타인의 생산성을 축내는 사람으로 분류되 버렸다. 그래서 푸코가 말하는 칼의 권리인 '능동적 권력'을 통한 죽게 내버려 두는 일이 행사되었을지 모른다.
문득 드는 생각은 이런 우생학적 욕망에 따라 제거되고 죽게 내버려 두는 장애인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사회는 '살게 되는' 그들만의 리그에서 과연 파라다이스가 만들어질 것인가 하는 것이다. 어떤 형태로든 차별과 억압은 만들어지지 않을까? 예를 들어 식스팩을 가진 건강하게 기능하는 몸과 그렇지 못한 몸이라든가 키가 큰 존재와 작은 존재나 영재와 범인, 아마 이렇게 구분된다면 주류인 범인에게서 영재는 죽게 내버려 두는 존재가 될 수도 있을까?
이 책이 장을 거듭할수록 논제적 주제와 학문적 이론을 가열차게 논하고 있다는 점에서 장애를 실생활에서 마주해야 하는 현상학적 문제나 현실 정도에 관심을 갖는 사람에겐 어려운 내용일 수 있다. 인권 측면에서 발달 장애인의 의사 결정 문제가 성년후견인들로부터 행해지는 자기결정권 침해의 문제와 발달장애 당사자들의 선택과 결정으로 발생되는 문제가 있다면 과연 어느 쪽의 문제가 더 당사자의 결정에 위해가 되는 일일까? 한데 사실 우린 이런 문제에 집중한다기보다 이런 문제가 발생되지 않도록 '그들의 존엄'에 세심한 관심을 기울이는 편이 인권적이다.
놀라운 깨달음의 연속이기도 한데, 특히 '장애 당사자주의'와 관련된 내용이다. 어느 나라나 마찬가지겠지만 특히 대한민국이 '표'에 좌지우지되는 정치적 이해에 편승되는 여러 장애인 단체들의 활동들에 염증을 느끼는 사람 중에 한 사람으로 나는 과연 어디에, 어느 메시지에 충실한가?라는 스스로의 질문을 하게 만든다.
장애 당사자(장애인)과 함께 목소리를 내는 비장애인은 그들이 아무리 진정성을 갖는다 해도 당사자주의에서 "넌 장애가 없으니 우리와 달라!"라고 할 수 있을까? 반면 장애 당사자이면서도 권익을 위해 스스로 목소리를 내며 활동에 소극적인 당사자는 "난 그래도 장애인이니까!"라며 당사자주의에 편승되어야 할까?
드레이크와 프랜 브랜 필드 그리고 폴 S. 더킷의 '나(당신은)는 여기서 무엇을 하고 있는가?'의 논쟁에서 머리칼이 쭈뼛 설정도로 반성하면서 '도대체 나는 무엇을 하고 있는가?'라는 질문이 멈추지 않는다.
사실 장애복지 현장에서 장애 당사자주의를 침 튀며 부르짖는 비장애인 사회복지사 중 기본 맥락이 그들의 권익은 중요하다는 점에 인식은 같이 하지만 온정주의 시선을 거두지 못하는 사람을 보게 된다. 그들의 신념이 그릇된 방향의 당사자주의를 만들 수 있는 위험을 모른 채 한다는 건 또 한편으로 내가 어떤 당사자주의를 가졌을까 싶기도 하다. 어쩌면 단지 생물학적 당사자주의를 표방하는 사이비 당사자주의자일지 모르겠다.
"자기결정권을 연립적 관점에서 올바로 이해할 때 핵심 요소는 ‘판단’과 ‘소통’이다. 여기서 우리는 다시 한 번 인간중심주의적이고 이성중심주의적인 사고, 즉 이성과 언어를 지닌 인간만이 판단하고 소통한다는 통념에서 벗어날 필요가 있다. 모든 생명체는 그 나름의 방식으로 판단하고 소통한다. 인간 아닌 동물은 물론이고 때로는 식물까지도 말이다. 인간중심주의적인 관점에서 그것이 본능적 판단이나 저차원의 교감에 불과하다고 격하되어왔을 뿐이다." p345
이 책은 단순히 장애를 이해하기 위해 읽어야 한다기보다 인류가 지향해 온 존재의 가치를 고민하게 만들어 준다. 왜 장애의 영역이 학문적 의미를 가져야 하며 그런 장애와 장애인은 생물학적 기능의 문제로 빚어지는 게 아니라 역사적이나 사회 시스템에 의해 만들어지는 것이라는 것을 적확하게 그러면서도 쉽고 명쾌하게 정리한다.
그런 면에서 일부 장애에 관심 있는 사람들에 국한되지 말고 모두 읽어야 할 책이라 생각한다. 장애는 손상에 국한되지 않으며 불편과 불리는 누구나 경험할 수 있는 평범성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나 또한 한 시점을 경계로 순식간에 다른 삶을 살고 있으니 말이다. 책에 등장하는 마굴리스의 말로 마무리하자면 "우리가 무엇을 보고 무엇을 아는가는 우리가 어떤 관점을 취하느냐에 따라 달라진다.(p186)."라는 점을 명심했으면 한다.
끝으로 이 책을 읽는 모두가 '정면으로 맞서 싸움을 걺'이라는 도전의 사전적 의미에 매몰되지 않았으면 한다. 챌린지 Challenge로서 '상황'이나 '현상'을 벗어나기 위한 시도로서의 도전으로 생각했으면 싶다. 우리가 가진 장애에 혹은 장애인에 대해 고착화된 생각을 넘어서기 위한 도전 말이다. 저자의 넓고 광범위한 지식의 깊이에 놀라움과 부러움을 감출 수 없으며 이렇게 훌륭한 책을 써내준 사실에 고마움을 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