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별'함으로 보면 안 되는 이유: 장애에 대한 특별한 시선
장애를 소재로 하는 영화는 어떻게 만들어도 '그럼에도'라는 공식이 존재한다. 아무리 차별이나 편견을 갖지 말자는 메시지를 담으려 노력해도 설사 그 영화가 관객들에게 호평과 좋은 영화라 손꼽힐지라도 필연적으로 등장하는 게 장애인에게 존재하는 다름의 '장애'다. 그래서 장애가 소재인 영화는 비장애인에게는 감정 팔이가 되고 장애인에게는 장애에 대한 편견적 요소를 찾고픈 숨은 그림 찾기가 되고 만다.
실화를 바탕으로 했다는 <나의 특별한 형제>가 장애인의 날이 있는 4월이 아닌 가족의 달인 5월에 개봉한 이유는 이 영화가 주는 메시지가 장애인의 삶이 도대체 '어떻게 사느냐'보다 '누구와 사느냐'에 초점을 맞춘 '가족'의 의미를 이야기하는 게 아닌가 싶다.
지체 장애인과 지적 장애인의 조합이 삶을 영위하는 데 있어 '안전'내지는 '장소'의 의미보다는 누구와 함께 즐겁고 행복하게 살 수 있는가에 대한 문제는 요즘 한창 뜨거운 감자인 장애인 '탈시설'의 문제와도 직결된다.
가족이 제 기능을 하지 못할 때 장애인과 아동이나 노인 등 약자에게 집은 집이 아니다. 오히려 영화에서 지적하는 것처럼 약한 사람들끼리 힘을 합쳐 사는 게 더 행복하고 안전할지 모른다. 그래서 시설이 문제가 아니라 시설의 폐쇄성이 문제다. 요즘 여성 활동가가 일방적으로 외치는 단편적인 문제가 사회적으로 이슈까지 되는 게 개인적으로 걱정이다.
분명 시설이 문제가 아니라 운영과 폐쇄성이 문제다. 투명하고 누구나 드나들 수 있도록 도심과 가까이 있고 지역주민 누구나가 감시자가 될 수 있는 개방 시설이라면 지금처럼 심각한 인권의 문제와 비리가 있을 수 있을까? 시설을 도심 밖으로 숲속으로 숨기는 게 문제다.
어쨌거나 이 영화는 장애에 대한 여러 쟁점에 대한 메시지를 담았다. 장애인 거주 시설, 장애인의 자립 그리고 장애인을 바라보는 사회적 시선 등 장애인을 둘러싸고 있는 여러 현안들을 직접적인 화법으로 관객들에게 '어떻게 생각해?'라며 묻고 있다.
"사람은 태어나는 순간 끝까지 살아야 할 책임이 있어"
박 신부의 이 말이 참 불편했다. 너무 잔인하달까. 태어나고 싶어서 태어난 것도 아니고 비장애인으로 태어나도 살기 어려운 세상에서 장애까지 지녔다면 태어난 김에 살아야 하는 게 좀 억울하지 않을까? 어쨌거나 이제 장애인에게 천사니 순수하다느니 축복이니 하는 입에 발린 소리는 집어치웠으면 싶다. 조심스럽지만 그들의 입장에선 죽지 못해 사는 게 맞을지도 모른다.
영화는 책임의 집이란 '시설'에서 시작한다. 시설의 운영을 위해 신부는 대놓고 '영업'을 하고 적당한 후원 팔기를 아이들의 먹고사는 문제로 연결하여 합리화한다. 그걸 성인이 된 세하(신하균)는 고스란히 배워 봉사점수와 후원으로 연결하여 시설을 운영한다. 뭐 이건 시설 운영이 현실적으로 어렵다는 하소연일 수 있다. 이런 윤리적인 부분을 누구를 위한 것이냐가 딜레마이겠지만.
또 하나는 자신보다 지적 수준이 낮은 동구를 이용해 자신의 편의를 도모하는 게 '학대'가 아니냐는 이야기다. 극 중 세하도 이야기하지만 도움일 수 있는 문제가 억지로 들여다보면 학대가 될 수도 있다. 이게 누구와 사느냐 하는 문제가 발생하는 지점이다. 비장애인 가족과 살면서 동구(이광수)를 이것저것 부리며 살고 거기에 연금이나 수급비까지 받는다면 분명 학대다. 하지만 서로의 불편함을 채우면서 한 몸처럼 채우는 관계는 학대가 아니라 상생이다.
둘 다 죽을지 모를 정도로 빈곤에 허덕이다 장애가 있는 아이를 버렸다. 그래 백번 양보해서 이해한다 치자(나는 그러고 싶진 않지만) 그래서 20년 만에 나타나 이제는 먹고살 만한 엄마와 살자며 데려가서 '아무것도 하지 말고 앉아만 있으라'라는 인형 취급 역시 분명 학대다. 장애가 있어서 아무것도 할 수 없다면 할 수 있는 걸 찾아 줘야 하는 게 맞다. 세하는 동구에게 그런 존재다. 사는 의미를 만들어 주는 존재.
"못 걷는 것만 억울한 거 아니에요. 걸어도 제자리인 것도 억울해요"
여기에 시설에서 쫓겨난 두 형제에게 등장하는 인물이 '재수 없는 수영 선생' 미현(이솜)이다. 장애가 있어 세상 살기가 불편한 이들에게 장애가 없어도 세상 살기가 불편하다는 걸 말하는 존재다. 말 그대로 니들만 힘든 거 아냐. 나도 힘들어. 니들은 연금이나 받지. 뭐 그런 의미를 담은 까칠한 발언을 서슴지 않는 인물이다.
그런데 이 재수 없는 미현을 세하와 동구는 좋아한다. 왤까? 세하가 추천서에도 썼다시피 미현은 이 둘의 장애는 그저 불편한 것이고 그 불편함은 뭐든지 간에 채우면 되는 문제로 별거 아니라는 태도를 보인다. 다시 말하면 장애인을 장애인으로 보지 않고 '사람'으로 보고 있다는 것이다.
인상적인 장면이 있었는데 커피를 주문하는 세하와 동구의 모습이었다. 누군가에게는 웃음 포인트였을지 몰라도 그저 카운터의 높이만 낮춰도 세하는 원하는 메뉴를 보면서 직접 주문할 수 있다는 의미다. 우리가 인식하지 못하는 사이 누군가는 불편함으로 많은 걸 함께 누리지 못하는 사람들이 존재할 수 있다는 것을 알았으면 싶다.
그게 뭐 특별해? 싶을지 모르겠지만 극 중에서 보면 성년후견인 제판에서도 변호사가 세하에게 장애인임에도 사회복지사 자격을 갖추고 있다는 걸 특별한 이력처럼 말한다. 이 장면에서 복지현장에서 휠체어를 타고 사회복지사로 일하고 있는 내 모습이 겹쳐졌다. 나는 장애인 사회복지사 누구누구다. 그런데 동료들은 비장애인 사회복지사 누구누구가 아니라 그냥 사회복지사 누구누구다.
한 사람의 '장애'에 시선이 머물면 '사람'이 아니라 '장애인'이 된다. 이 영화는 그래서 미현을 통해 그런 의미를 보여주고 있다. 이 영화가 좋은 이유는 신하균과 이광수의 연기도 한몫하지만 사회적 이슈인 '탈 시설'의 문제를 과연 누구를 위한 것인지를 일방적인 흐름에 무게를 두지 않고 장애인도 누구와 함께 사는 것이 '행복'한지, 가족의 의미가 과연 무엇인지 스스로 '선택'할 권리가 있다는 점을 생각해 보게 해준다는 데 있다.
그래서 장애인은 무조건 도와주거나 불쌍한 존재 혹은 무조건 착하거나 순수하다는 이미지가 아니라 우리와 똑같이 욕하고 성질 더럽고 싹수없는 사람도 있으며 그들도 나름의 생존 방식이 있으며 뜨겁게 사랑하고 행복할 권리가 있다는 것, 우리와 똑같은 삶을 살아내고 있다는 것을 알았으면 싶다.
장애는 '특별'하다거나 '다르다'라는 것에 매몰되면 안 된다. 이 영화는 그걸 말하고 있다. 그래서 이 영화가 좋은 이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