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질병과 장애, 그 경계를 살아가는 청년의 한국 사회 관찰기
그를 잘 모른다. 하지만 그의 글은 좀 안다. 그의 칼럼들은 신랄하면서도 여지가 있었다. 그래서 읽고 있으면 빠져들었다. 그래서 기억하던 이름이었다. 장애인 복지를 하면서 장애학을 '고민'하는 내게 그의 글은 지식의 확장이기도 하면서 반성 같은 일기일지도 모르겠다.
책장을 덮은 지금, 이 기분을 어떻게 표현할지 좀 망설이게 되는데, 그의 이야기가 면이 아닌 선처럼 가늘고 힘겹게 이어지는 그 끝에 내가 서있는 느낌. 아프다. 아파서가 아니라 아프지 않음으로 아픈, 그래서 감각이 마비된 듯하다.
그의 글은 정제되고 정갈하다는 느낌을 준다. 아울러 나이가 무슨 상관이랴 싶으면서도 한참 어린 그의 지적 깊이에 감탄하며 읽었다. 어떤 철학보다 더 철학적이다. 내가 그의 생각과 징징거림을 온전히 받아들였는지는 확실하지 않다. 다만 질병으로 읽히는 장애에 대한 그의 (경계에 대한) 금을 나도 함께 밟는다. 그래서 이 책은 읽지 않을 수 없었을지도 모른다.
"나는 아주 여러 면에서 내 존재 자체가 애매하다고 느낀다. 이도 저도 아닌, 어디에도 속하지 못하는 사람." p15
오래전부터 고민하던 내 존재에 대한 질문이 여기에서 '느껴진다'라는 기분은 뭐랄까 고구마 백 개쯤 먹다가 목이 메어 동동거리다 동치미 한 사발 들이켠 것 같달까.
나는 운동선수(명확히 말하면 각종 대회에 출전해야 하는 체대생)로 건강한 삶을 살다 목이 부러져 장애인이 되었다. 21살이었다. 그가 말한 '청년' 내지는 '청춘'이었다. 이후 30년을 장애인으로 살면서 장애와 비장애에 대한 사람들의 인식은 나를 자연스럽게 경계인으로 내몰곤 했다. 또 한 움큼의 약이 없으면 제어되지 않는 몸이나, 있어도 때때로 고통에 몸부림쳐야 하는 삶이란 '아프다'라는 질병적 규정으로는 분명 부족하다.
'삶이 억울한 날'이란 문장이 비수처럼 날아들었다. 그리고 이런 기분이 위로받는 느낌이 들기 시작했다. 나 역시 매트 위를 날아다니던 그때를 추억하는 일을 멈추지 않는다. 저자가 전혜은의 말을 빌려 '아픈 사람'을 정의하는 것과,
"나는 크론병이라는 단어로 충분히 설명할 수 없다. 질병의 이름에 집중하면 아무래도 그 질병의 증상으로 나의 일상이 환원되어 버리는 경향이 있는데, 그러기에는 내가 어려움을 겪는 지점이 크론병의 가장 흔한 증상과는 다르기 때문이다." p28
라며 내비치는 그가 겪는 고통과 보이는 것에 대한 괴리에서 오는 심리적 고통을 고백하는 내용에 내가 처한 상황이 이입되니 울컥하지 않을 수 없다.
"왜 나는 계속해서 입증되어야 하는가."
나 역시 지체 장애라는 제도적 편의로 만들어진 구분에 나를 충분히 설명할 수 없다. 요즘처럼 폭염에는 에어컨을 틀어 놓고 달리는 차 안에서도 더위를 먹는다. 이유는 목이 부러지며 운동신경뿐만 아니라 여러 감각기관들도 망가졌는데 그중 땀샘이 있다.
별짓 다해봐도 땀이 나질 않는다. 단 한 방울도. 그렇다 보니 체내 온도가 상승하면 쉽게 정상 체온으로 내려 가지 않는다. 한데 처음부터 더위에 노출되지 않으면 오히려 쉽게 추위를 느낀다. 그래서 에어컨이 빵빵하게 틀어진 실내에 있다면 난 오히려 긴 옷으로 무장을 해야 한다. 그리고 강직성 수축이 심한 나는 활동을 하려면 근육 이완제와 배뇨조절 관련된 한 움큼의 약을 먹어야 한다. 한데 근육 이완제를 먹고 30분 정도 지나면 물을 잔뜩 먹은 빨래처럼 몸이 축 늘어진다. 다리 하나 들 수 없을 지경이 되면 침대에서 돌아누우려면 이를 악물어야 할 정도다. 이럴 때면 무력감에 빠진다. 그래서 처방된 복용량보다 내 맘대로 줄여서 먹는다. 그래야 출근을 할 수 있다. 이런 강력한 근 수축은 갑자기 배뇨가 급해지면 극에 달하는데 강직이 심해져 펴야 할 손가락은 주먹 쥐고 버티니 지퍼를 내릴 수 없어 결국 실수를 할 때도 많다.
배뇨장애는 싸야 할 때 싸지 못하는 고통도 수반하는데 긴박뇨(배변을 느끼면 참지 못하고 배출하는 상태)를 미연에 방지하는 일은 미리 배출하는 거다. 그래서 장거리를 가야 할 때나 시간이 걸리는 상황에는 미리 방광을 두드려 배출을 유도하기도 한다. 한 번은 옆에서 볼 일을 보던 젊은 이가 나가면서 "그 짓을 하려거든 집구석에 가라"라며 혐오의 눈빛을 쏴 대기도 했다. 그 사람은 내 뒤에 휠체어가 있고 아주 불편한 자세로 서있는 것을 보았음에도 단지 동작으로만 '그 짓'으로 판단했다. 이런 일들은 모르는 사람이 보면 지랄이요 냉혈한이라 할지 모른다. 이처럼 법적 장애는 배뇨나 통증 같은 것들을 지체 장애로 규정하지 않는다.
당사자로 지칭되는 장애를 가진 나는 내 장애를 일부 드러냄으로써, 그저 장애를 극복하지 못하는 끈기 부족이거나 게으른 나약한 정신 부족이 아닌 법적으로나마 내 농밀한 삶을 모르더라도 '장애'를 인정받는다. 어이없게도 말이다. 그저 드러나는 직립보행의 불완전함이나 전동 휠체어로 우아한 드라이빙을 하는 정도로 내 장애가 규정된다면 나로서는 심히 유감스러움을 넘어 억울 하기까지 한데 말이다.
반복되는 이야기이기도 하지만 한주먹 약을 먹어야만 그 불완전한 보행이 아주 약간 이나마 가능하고, 시도 때도 없이 소변이 나온다는 감각에 피로하기 일쑤며 때때로 '혹시'라는 유혹에 '역시'로 응답하며 질펀하게 실수를 한다. 그리고 한 방울의 땀조차 만들지 못하는 땀샘 덕분에 체내 온도는 조금만 더워도 한계치로 치달아 일사병에 노출되어 졸도를 한다. 또 다들 덥다고 난리인데 혈액순환이 1도 안 되는 내 다리는 냉동고에서 방금 꺼내온 것처럼 차갑다 못해 아려서 잠을 잘 수 없는 날이 한 달이면 절반을 넘는다.
쓰다 보니 저자와 누가 더 아픈지 배틀하는 기분이 들긴 하지만 어쨌거나 아픈 건 널리 널리 알리자 했으니 이해하겠지 한다. 여기에 결정타를 날려보자면 나는 변을 한 달에 많아야 네 번 해결한다. 그러니 내 속이 속이 아닌 건 이루 말할 수 없지 않겠나. 과연 사람들은 이런 나를, 내 장애를 법적 제도인 지체장애로 표현하는 걸 이해할 수 있을까.
"아픈 몸을 존중하는 문화에서만 모든 몸이 있는 그대로 존중받을 수 있다." p51
질병과 장애라는 정체성 사이에서 흔들리던 그의 감정이 내게 옮겨붙은 것 같았다. 외줄에서 올라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것처럼 문장 위에서 한참 꼼짝할 수 없었다.
장애를 '규정'하는 방식에 대해, '등급'에서 ' 정도'로 바뀐 허울만 좋은 등급제에 관해 목소리를 높이는 그의 말에 서울의 한 장애인 자립생활 센터장의 이야기가 생각났다. 수동 휠체어를 타는 그는 소아마비로 한쪽 발이 짧고 힘없이 덜렁거린다(그의 표현이 그랬다). 그가 하루는 지하철 리프트를 타고 오르는 걸 엄마와 함께 계단을 오르던 아이가 보고 "왜 저 아저씨는 편하게 저걸 타고 가?"라고 묻자 아이의 엄마는 "아저씨가 다리가 아파서 그래"라고 했다나. 그 소리를 들은 그가 먼저 도착해 아이를 기다려 "아저씨는 다리가 불편해서 휠체어를 타긴 하지만 아프지는 않단다."라고 했다. 덜렁거리는 다리를 보여 주면서 말이다.
솔직히 이야기를 들으면서 '장애인은 아픈 사람'이라는 공식에 대한 편견에 일침을 가했다기보다 아이가 얼마만큼 놀랐을까 하는 게 더 걱정됐다. 아이는 곧고 힘 있게 쭉 뻗은 다리만 보다가 처음 힘없이 덜렁거리는 다리를 보았을 수 있지 않았을까. 어쨌거나 장애의 규정이 의료적 진단에 의해 등급이 나뉘고 완치의 개념 자체가 없음에도 극복의 대상화를 만드는 것에는 저자가 열변의 본질에 공감한다는 이야기다.
뿐만 아니라 우리가 사회 공헌이라 칭하며 좋은 기업처럼 여기는 콩깍지에 대한 이야기도 정신이 번쩍 들었다. 적당한 업무량을 위해 직원 채용 대신 각성 음료를 들이밀며 열정을 강요하는 업체의 지원으로 사업을 진행하고 있는 나로서는 미처 깨닫지 못한 한계였으며, 장애인 의무 고용은 하지 않고 벌금으로 5년간 부동의 1위 자리를 지키는 삼성이 뒤로는 청각장애인을 위해 공헌하고 있다고 홍보하는 이중적 행보를 꼬집기도 하며 장애인의 노동에 관해 이야기한다. 또 한편으로 장애인 차별이 여전한 사회의식이나 차별하지 않겠다는 의식이 오히려 조심스러워지고 배려나 시혜적 태도를 만드는 문제도 간결하고 깔끔하게 풀어낸다.
"나는 아마 낫지 않을 것이다. 수많은 이들이 아마 낫지 않은 채로 살다가 죽을 것이다. 그렇기에 우리는 아프고 약한 사람들이 강해지는 것이 아니라, 아프고 약한 채로 살다가 편하게 죽어갈 수 있는 세상을 만들어야 한다. 그 세상에 도달하는 방법은 난치의 상상력일 것이다." p267
저자의 여러 일화가 내 삶의 모양이나 경험과 맞닿아 있어 많은 시간 생각을 함께 해야 하기도 했다. 특히 '우리가 같이 살아남을 수 있을까'라는 장애인 복지관 종사자를 대상으로 관리공단의 재난 대피 요령에 대한 교육을 듣다가 그의 지적처럼 비장인의 탈출을 담보로 한 교육 내용에 '저는 뛰어내리지도 못하는 데, 재난상황에서 저 같은 장애인의 생존은 누가 담보하는가'에 대한 질문을 했던 내 상황과 너무 흡사해 다시 답답해지기도 했다.
이날 강사는 미처 거기까지는 생각 못 했다는 듯 난처해 하며, "대피 구역에서 기다리거나 주위 비장애인이 도와야 한다."라고 했다. 결국 나는 남겨지는 사람이라는 말과 같다. 이 책은 모두 함께 사는 방향을 가리킨다. 동시에 우리 모두 읽어야 하고 많은 생각을 해야 하는 이유를 알게 하는 책이다.
YES24 리뷰어클럽 서평단 자격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