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보다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두목 Sep 11. 2019

엑시트

가볍지만 엄청 무거운.


입소문이 영화의 유독가스처럼 퍼져 나가기만 하던 영화 엑시트를 봤다. 그동안 좀 망설였달까. 윤아의 팬들에게는 다소 미안 소리이지만 어쨌든 개취이니, 내가 윤아를 그다지 좋아하지 않아 망설였고, 조정석 역시 납득이 이후 그렇다 하게 납득할 만큼 좋아해야 할 이유를 찾지 못해서 미뤘던 영화다.


보고 나서 느낀 건 역시 '편견은 나쁜 거다'라는 거다. 늘 비슷한 캐릭터 연기를 하는 조정석은 그렇다 쳐도 윤아의 재발견이랄까. 원래 연기를 잘 했는데 내가 관심을 두지 않았던 걸까. 여하튼 그랬다.


출처: 다음 영화 '엑시트'


천재인데 여자친구의 철봉 실족사를 경험하고 동네 바보가 되었다는 전설로 전해지는 용남(조정석)은 대학에서 잘나가는 산악부 출신으로 졸업 후 백수다. 여기저기 취업을 위해 노력하지만 번번이 떨어진다. 하지만 철봉에서는 안 떨어진다. 그렇게 철봉에만 매달려 있는 용남은 인간 구실 못하는 백수로 분류돼 칠순잔치에 몰려든 친척들에게 "장가는 못 갔고요, 취업 준비 중입니다. 한잔 더 드세요."라며 선수를 치며 안부를 포장한 비아냥을 감내한다.


그리고 즐거움이 극에 달할 때쯤, 뭐하나 제대로 하는 게 없는 용남은 잔치에서조차 엄마를 업고 즐거워할 타이밍을 놓친다. 한편 용남의 첫사랑인 의주(윤아)는 구름정원 부점장으로 직장 내 갑질을 견디며 열 일 하다가 우연히 아니 용남의 조작된 우연으로 4년 만에 조우한다.


영화는 짠내난다기 보다 그냥 웃프다. "지진, 태풍만 재난이 아니야 지금 우리 상황이 재난이야"라는 말처럼 대한민국 청년들의 현실을 고스란히 담아내고 있으며, 여기에 재난 상황에서 빠르게 판단하고 피하자고 외치지만 사람 새끼가 할 짓이 아닌 매일 '자고 먹고 놀고 싸는' 용남의 말을 믿지 못하고 재난 문자 하나에 다급해지는 가족들의 상황이 더해져 더 웃프다. 솔직히 재난문자가 더 믿음이 안 가는데. 그리고 재난 상황을 천재지변이 아닌 한 개인의 욕심이 빚어낸 인재라는 점은 언제라도 일어날 수 있는 상황이라는 점점 더 개인주의로 치닫는 현대 사회의 문제에 대한 경고에 가깝다.


재난 영화, 특히 가족 영화에서는 '떨어지면 죽는다' 같은 함께 뭉쳐서 고난을 극복해 가는 과정을 그려내는데 반해 이 영화는 가족과 떨어져 다난한 상황을 엮어 가는 점이 이채롭다. 하기야 뭉쳐있으면 다 죽더라. 특히 용남이 의주에게 구애를 했으나 결별에 이르는 내용을 구구절절하게 보여주려 하지 않고 용남이 차이고 대성통곡하는 딱 두 장면으로 상황을 정리해 버린 감독의 재치는 탁월하다. 그리고 관객들에게 로프를 연결하는 비너의 의미 역시 시시콜콜하게 알려주지 않는다.


어쨌거나 영화는 재난 영화답지 않게 재난스럽지 않은 장면들로 이어나가지만 가족들의 혼신의 연기와 뉴스를 적절히 이용하면서 재난이라는 상황을 충분히 짐작하게 만들면서 이런 재난 역시 국가가 해결해주는 바는 없다는 점 또한 확실히 한다. 살아남기 위해 촌각을 다투는 용남과 의주의 질주를 생중계하는 드론을 경찰이 막는다. 뭐 어쨌거나 도심에서 드론 운항은 불법이긴 하지만 법보다 사람이 먼저여야 하지 않은가. 결국 시민이 해결의 실마리를 제공한다.


출처: 다음 영화 '엑시트'

이 영화는 가르마 하나 제 맘대로 못하고 밥값 못한다고 구박받는 청년 백수의 현실을 용남을 통해 대변한다. 분명 사람들 속에 존재하지만 아무도 관심을 두지 않는 마네킹 같은 존재. 방제복 대신 쓰레기봉투를 뒤집어 입고, 쓸데 없는 산악회에서 갈고닦은 클라이밍으로 살아남는 장면은 웃프지만 통쾌하다. 사람이란 자고로 '쓸 데'로 판단되어서는 안 된다.


그리고 하나밖에 없는 아들이 능력 있는 사위에 밀려 엄마를 업어주는 타이밍을 놓친 것이나, 눈치 없는 숙맥이어서 첫사랑 고백의 타이밍을 헛다리 짚은 것이나 분명 인생에서 타이밍은 중요하지만 용남이 모두의 안전을 확인하고 엄마를 업고, 의주에게 고백받는 것처럼 마지막에 제대로 하는 것도 중요하다.


이 영화는 사실 손에 땀을 쥐게 하는 긴장감은 많진 않다. 반면 약간 어리숙하지만 위기를 빠르게 판단하고 내달리는 용남의 탈출에 건투를 빌게 된다. 그리고 비행기 대신 드론 건물 밑에서 느리게 올라오는 장면처럼 군데군데 오마주 영상이 있어 더 재미있기도 했다.

매거진의 이전글 갤버스턴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