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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장혜령 Jan 25. 2024

<세기말의 사랑> 썸남의 범죄를 눈감던 경리과장의 최후

올해 참 독특한 영화를 만났다. 작년 부산영화제에서 홍보 엽서를 보고 제목에 이끌렸던 경험이 떠올랐다. ‘세기말’의 부정적인 단어 때문인지 편견이 있었지만 사랑이란 단어가 바투 따라붙어 의뭉스러움이 더해갔다. 영화나 미디어에서 ‘이상한’ 단어에 긍정성을 부여해서 인지 이상한 영화가 오히려 반가웠다.      


생각했던 것과 달리 <세기말의 사랑>은 통통 튀는 귀여운 영화였다. <미쓰 홍당무>를 봤었을 때와 비슷한 느낌을 받았다. 주인공 영미, 도영, 유진은 세상에서 소외된 인물이지만 반짝거리는 생명력으로 빛나고 있었다. 영화에서 나와 어딘가에서 살아가고 있을 것만 같았다.      

왜 세기말과 이천년일까. 임선애 감독은 소심한 영미가 멸망을 앞두면 고백할 용기가 생기지 않을까 싶어서라고 밝혔다. 요즘 MZ 세대가 열광하는 Y2K 감성과 다채로운 색감이 독특한 설정을 더해준다. 이유영의 망가진 외모가 사랑스러움을 유발한다. 장애 캐릭터조차 범상치 않게 표현한 임선우와 동성 케미가 상당하다. 세상으로부터 환영받지 못한 박복한 두 여성이 힘차게 앞을 향해 걷는 모습을 나도 모르게 응원하게 된다.      


말도 제대로 섞어보지 못한 도영을 죽도록 짝사랑한 영미와 위장 결혼까지 하며 지켜주고 싶어 했던 유진. 이 셋은 계속 만나고 있을까. 세상이 끝날 것 같았던 1999년을 지나고 어제와 똑같은 2000년이 흘러 24년 후 그들은 어떤 모습이 되었을까 상상하는 재미도 있었다.     


짝사랑 때문에 감옥에 간 경리과장     

영미(이유영)는 치매에 걸린 큰어머니를 모시고 사는 평범한 경리과장이다. 주변에서 세기말이라고 불러도 참고만 있지만 일 하나는 끝내주게 잘한다. 정직테크에서 남몰래 구도영(노재원) 기사를 짝사랑하고 있다. 세기말이다 뭐다 해서 세상이 싱숭생숭한데 마음도 비슷하다.      


언젠인지 모를 구기사의 공금횡령도 눈치채고 있다. 다 이유가 있겠거니 싶어 눈감아주고 있었다. 대신 밤낮으로 아르바이트를해서 구멍 난 미수금을 막으려고 했다. 힘들어도 그 사람을 위한 일이라면 괜찮았다. 그 사람의 아내를 만나기 전까지는.     


유진(임선우)은 전신 마비 장애를 안고 있지만 부러질지언정 굽히지 않는 꼿꼿한 성격이다. 필터링 거치지 않고 내뱉는 가시 돋친 말 때문에 주변에서 지랄 1급으로 불리는 여성이다. 하지만 까고 보면 잔정이 많고 의리 있는 멋쟁이다. 주변에서 거짓말을 해도 모른 척 눈감아주는 배포도 있다.      


내 사람이다 생각하면 어쨌거나 품어 주는 성격이라 남편 썸녀까지 집에 들인다. 남편 때문에 감방까지 간 아줌마가 뭐가 예쁘냐고? 그래도 그 돈은 꼭 갚아 주고 싶은 걸 어쩌라고.     


예측할 수 없는 이야기의 힘     

영화는 ‘사랑’을 다양한 관점으로 보여준다. 어쩌면 두 여성의 로맨스, 우정으로 보일 수 있게 설정했다. 관객의 입장에서 해석할 수 있는 다양한 사랑의 형태다. 남녀, 동성, 가족, 친구 등 범 성애적 사랑이 따뜻한 시선으로 펼쳐진다. 유진과 영미는 도영이라는 한 남성을 사랑하지만 질투보다는 연대하고 위로한다. 몸을 만지는 행위를 통해 친밀감을 높인다. 어릴 적 생긴 화장 자국이 콤플렉스였던 영미는 유진이 맨드라미를 닮았다는 말을 하자 스킨십을 허락한다. 화장 자국이 트라우마에서 특별함이 되어버리는 마법 같은 순간이다.       


모난 사람들이 둥글게 둥글게 살아갔으면 하는 바람이 원형 오브제와 이미지에 담겨 있다. 영미, 유진, 도영의 이름에도 이응이 들어가는 한편 휠체어 바퀴, 대관람차, 공원의 운동기구, 떡국 그릇, 양푼 비빔밥, 마지막에 등장하는 카페 장면에서는 인주, 커피잔, 둥그런 지장, 원형 테이블까지. 사각지대에 숨지 말고 당당히 중심에서 잘 굴러갔으면 하는 마음이 반영된 미장센이다.      


뭐하나 예상대로 흘러가지 않는다. ‘세기말’이란 단어의 이미지를 색다르게 정의하고 장애와 외모 차이를 세상의 기준에 따르지 않는다. 초반 영미를 설명하는 1999년은 흑백 화면이다. 영미는 한쪽으로 쏠려 있어 세상으로부터 동떨어진 느낌과 폐쇄적인 성격이 도드라진다. 하지만 2000년 출소하고 난 후 컬러 화면으로 전환된다. 그 이후부터는 영미가 반드시 화면 정중앙에 들어온다. 서로를 바라보는 시선도 수평적이다. 누군가를 내려다보거나 올려다보지 않고 평등한 인간 자체로 본다.      


흑백과 컬러의 구분은 선입견을 상징한다. 영미는 원래 다채로운 색을 지닌 사람이었지만 1999년에서는 무채색으로 보인다. 출소 후 흰 색인 줄 알았던 운동화가 분홍색이었던 화면이 말해준다. 2000년의 유진은 색이 바랜 무채색 계열의 옷을 입고 있다가 서서히 자기 색을 찾아간다. 시나브로 물들어 가듯 한 사람을 동시에 좋아하는 두 여성이 곁에서 영향을 주고받는다. 세상의 기준에 조금 모자람이 있을지라도 자격지심 보다 당당하게 나를 찾아가려는 의지가 반짝이다 못해 눈부시다.     

50여 개의 스토리보드 작가 경력, 미대 출신 감독답게 영미의 주황색 머리와 준의 민트색 머리, 캐릭터의 의상과 전체적인 색감, 감각적인 음악까지. <69세> 이후 4년 만의 작을 낸 임선애 감독의 두 번째 영화다. 소외된 자, 여성의 이야기를 옆에서 보고 들은 듯 세심한 연출이 돋보인다. 올해 보석 같은 영화를 발견했다는 기쁜 에너지를 듬뿍 충전하고 극장 문을 나섰다. 비슷비슷한 영화에서 식상함과 지루함을 느꼈다면 추천하는 영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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