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아니스트였던 아버지와 같은 병을 앓고 호스피스 생활 중인 사미라가 집으로 돌아와 아버지와 추억이 깃든 할렘가 피자가게를 찾아가는 과정은 의미심장하다. 피자 한 조각을 먹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사미라와 병치되는 마리오네트의 인형극은 시와 예술에 조예가 깊었던 사미라의 전사를 유추하는 데 도움이 된다. 진통제로도 쉽게 가시지 않는 타는듯한 고통을 참으며 세상을 냉소적으로 바라보던 사미라가 공연 도중 눈물을 흘리고야 마는 결정적 장면이다.
아름다운 액자식 구성의 공연이 후반부 한 번 더 반복된다. 에릭과 아버지가 연주했던 공연장에서 눈에 보이지 않는 관객을 상상하며 쇼를 펼치고 사미라와 에릭의 표정은 밝게 빛나는 애틋하면서도 슬픈 장면이다. 말하지 않아도 알 수 있는 비언어적인 소통이 극한의 상황에서 서로에게 얼마나 큰 의지가 되는지 알려준다.
사미라는 낯선 에릭을 만나 아버지를 기억한다. 더 이상 라이브 음악을 연주할 수도 들을 수도 없는 세상에서 어떻게 살아갈지 <콰이어트 플레이스> 두 편의 영화와 연결된다. 내일 지구가 멸망할지라도 단 한 그루의 사과나무를 심겠다는 철학자 스피노자의 희망이 비극 위에서 조용히 싹터간다. 무너져가는 세상에서 오늘 하루 고단하게 보냈던 나에게 줄 수 있는 작은 위로는 예술이라고 말한다. 죽음을 피할 수 없는 인간이 스스로 죽음을 결정할 수 있는 선택, 품위가 느껴지는 인상 깊은 마지막 장면이 울림을 더한다.
<콰이어트 플레이스 : 첫째날> 트리비아
1. 서점 앞에서 옥타비아 버틀러의 《새벽》을 집어 든다. 옥타비아 버틀러는 이제껏 백인 남성의 전유물로 여겨진 SF계에서 흑인 여성으로 작품성, 상업성 두 마리 토끼를 잡은 작가다. 최근 《킨》이 드라마로 만들어지기도 했다. 억압과 자유에 항거했던 작가의 삶과 문학적 성취가 병마와 싸우느라 만신창이가 된 사미라의 억압된 자유와 교차된다.
2. 인형술사는 소년(인형)의 손을 통해 풍선을 불도록 했다. <업>에서처럼 풍선에 의지해 하늘을 날아다니며 세상을 구경하지만 갑자기 터지자 환상이 깨지는 장면이다. 침묵하는 세상에서 음악 감상의 자유를 만끽하고 싶은 욕망의 상징이자 지구의 종말을 예고하는 복선으로 활용된다.
3. 고양이 프로도가 개냥이처럼 사미라에게 안기지만 루피타 뇽오는 촬영 전까지 고양이가 무서워 애먹었다고 한다. 프로도는 슈니첼과 니코 두 마리가 연기해으며 영화 속에서 긴장을 완화시켜주는 고양이인 사미라의 '서비스 캣'이다. 다행히 루피타 뇽오는 트라우마를 극복하고 지금은 고양이를 키우고 있다고.
4. 사미라를 연기한 '루피타 뇽오'는 한국에서는 <블랙 팬서>의 '니키아'를 맡아 한국어를 선보인 바 있다. 케냐 보건부 장관 출신 아버지와 대기업 임원 출신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난 엄친딸. 일찍이 영어, 스페인어, 케냐에서 사용하는 스와힐리어, 루어어 까지 4개 국어 능력자다. (출처: 보도자료) <정글북>에서는 '락샤'의 목소리 연기에도 도전했고, 개봉을 앞둔 드림웍스 신작 <와일드 로봇>에서 주인공 '로즈'의 목소리를 연기했다.
5. 케냐 로케이션의 할리우드 영화 스태프로 업계에 첫 발을 들인 루피타 뇽오는 배우 데뷔에 앞서 2009년 다큐멘터리 <In My Genes>의 제작, 연출을 맡아 감독으로 먼저 데뷔했다. 2016년 루피타 뇽오가 연출한 Wahu의 ‘The Little Things You Do’ 뮤직비디오는 MTV 아프리칸 뮤직 어워드에 노미네이트되기도 했다. 뿐만 아니라 2019년에는 그림책 [술웨](Sulwe)를 출간해 단숨에 뉴욕 베스트셀러 1위에 등극시켰고, 같은 해 자작곡 ‘Sulwe’s song’을 발표하며 팔방미인의 면모를 자랑했다. 현재는 넷플릭스와 함께 그림책과 동명의 뮤지컬 애니메이션 제작을 계획 중이라고 밝혀져 그녀의 무궁무진한 재능과 한계 없는 도전에 기대를 더한다. (출처: 보도자료)
6. 에릭을 연기한 '조셉 퀸'은 [기묘한 이야기 4]에서 '헬파이어 클럽' 리더 '에디 먼슨'을 맡았으며, 간호사 루벤 역의 '알렉스 울프'는 <유전>, <올드>, <피그>로 잊을 수 없는 연기를 펼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