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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장혜령 Oct 21. 2024

<룸 넥스트 도어>"마지막 가는 길에 옆 방에 있어줘"


<룸 넥스트 도어>를 보며 오랜 친구가 생각났다. 친구의 결혼 후 뜨문뜨문 연락을 했지만 서로 바빠 통 만나지 못했다. 몇 년 새 우리 동네로 이사 오면서 뜻하지 않은 시간에 자주 마주치게 되었다. 동네 골목, 카페, 지하철역 근처에서 소소한 즐거움을 얻는다. 조용히 혼자 하기 좋은 취미도 비슷하지만 함께 해본 적은 없다.      


좋았던 영화와 책 리스트를 공유하며 가끔 SNS로 이야기를 나누는 게 다다. 약속을 정하고 만난 적은 없다. 모두 우연히 길에서 만나 잠깐 대화했을 뿐이다. 그래서일까. 1분 1초가 소중하며 여운은 길다. 하루 종일 친구를 생각하며 미소 짓는다. 가끔 친구를 만났던 장소를 지날 때면 어디 없나, 두리번 거린다.    

 

영화 속 마사(틸다 스윈튼)와 잉그리드(줄리안 무어)처럼은 아니더라도 우리는 굳이 만나지 않았지만 가끔 만나며 서로를 틈틈이 생각한다. 특별한 관계를 맺은 사람이 곁에 있다는 건 참 행복하고 든든한 일인 것 같다. 과거를 복습하다 보면 현재를 충실히 살게 되고 미래를 연습할 수 있다. 반복된 실수를 줄이고 잘못은 수정하며 원하는 삶을 구축하는데 수월해진다.      


마지막 동행을 찾는 친구의 부탁     

1980년대 잡지사에서 함께 일했던 마사와 잉그리드는 최근 재회했다. 오래 연락하지 못하는 동안 서로 다른 분야에서 성공했다. 마사는 종군 기자가 되어 전쟁터를 누볐고 잉그리드는 팩션 작가로 살며 실제와 가공을 조율한 작품으로 큰 인기를 끌게 되었다.     


우연히 신간 사인회에서 암 투병 중이라는 마사의 소식을 듣고 한걸음에 찾아간 잉그리드. 병색이 짙은 친구의 모습이 안쓰럽지만 어제도 만난 사이처럼 수다 삼매경에 빠진다. 두 사람이 공유했던 남자친구 데이미언, 마사의 딸 미쉘, 미쉘의 생부, 전쟁터에서 만났던 동성 수사의 러브스토리 그리고 에드워드 호퍼, 제임스 조이스, 버지니아 울프, 버스터 키튼 등 이제 사라지고 없는 작가까지 소환한다. 둘은 지극히 사적인 소재부터 인생과 지구를 논하는 지적 대화를 이어간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애써 시도했던 항암치료가 아무 소용이 없자, 살아갈 의미를 잃어버린 마사는 중대한 결심을 한다. 마지막까지 인간의 존엄을 지키고 싶다는 생각 말이다. 다만 혼자는 외로워 동행자가 필요한데, 마지막 길을 걸어갈 때 부디 옆방에 있어달란 제안이다. 이 말을 들은 잉그리드는 펄쩍 뛰며 거절하지만, 결국 돕기로 한다. 한 달 동안 숲속 집을 빌려 천천히 인생의 마지막 여정을 함께 하게 된다.      


특별한 시선을 담은 존엄사     

영화는 ‘시그리드 누네즈’의 소설 《어떻게 지내나요》를 원작으로 한다. 스페인의 거장 ‘페드로 알모도바르’ 감독의 첫 영어 영화이자 24번째 장편영화다. 제81회 베니스국제영화제 황금사지상을 받았다. 세계적인 배우 ‘틸다 스윈튼’과 ‘줄리안 무어’의 출연으로 화제가 되었다. 명배우의 앙상블은 맛있는 음식을 먹었을 때의 만족스러우며 깊은 사유의 시간을 선사한다.      


모국어가 아닌 영어 영화라고 해도 다르지 않다. 감독 특유의 독창성과 시그니처가 유지된다. 영화 언어의 근간이기도 한 ‘어머니’와 ‘여성’을 주인공으로 하며, 이야기 속의 이야기는 흥미로워 타고난 이야기꾼임을 증명하고자 한다. 영화 속 청자와 관객 모두 귀를 쫑긋하고 집중하게 만든다. 몇 해 전 발표한 <페인 앤 글로리>와 <패럴렐 마더스>와 궤를 같이하는 3부작처럼 느껴진다. 영화 인생과 어머니를 중심으로 모든 커리어를 정리하는 듯 보였던 감독이 다시 메가폰을 잡은 이유를 알 것 같다. 여전히 하고 싶은 이야기가 남아 있음이 절절히 전해진다.      


선명한 색채를 선보여 아름다운 미장센을 과시하는 특징도 적재적소에 쓰였다. 끝을 향해가는 마사는 파스텔 계통을 써 편안한 어울림을 강조한다. 반면 펄떡이는 생명력을 드러내는 잉그리드는 보색 대비가 선명한 적록색을 매칭해 강렬하다. 처음부터 끝까지 불편한 주제가 오가는데 오히려 밝고 빛나는 색감이 삶의 아름다움을 강조한다.      


좋은 죽음을 맞이할 권리      

세상에 태어나는 일은 마음대로 할 수 없지만 사라지는 일은 선택할 수 있다. 영화는 죽음을 관통하는 여정을 따라 어느 때보다 철학적 질문을 던진다. 죽음이 가까워질수록 살고 싶은 욕망이 커지는데 반해 마사는 놀라울 정도로 의욕을 잃어버린다. 대신 어떻게 하면 의미 있는 죽음을 맞이할 수 있을지에만 집중한다. 그래서 떠나는 길이 홀가분하고 말한다.      


마사는 수많은 전쟁터를 누비며 시체를 보아왔다. 죽음이 무뎌진 전쟁터에서 두려움을 떨쳐 낼 최고의 방법이 육체적 쾌락과 충만한 사랑이었다는 수도사의 말에 감동하고야 만다. 그 사연을 기사화할 수 없었지만 늘 마음속에 품으며 살아왔다. 긴 시간이 흘러 삶이 꺼져가고 있을 때 다시 떠올랐다. 끝내 숨이 끊어질 때까지 고통 속에 몸 부리며 죽음에 굴복하지 않겠다고 표명한다. 암이 지배하는 전쟁터에서 이기겠다고 선언한다. 결과는 완치가 아닌 세상과의 작별이다. 죽음을 손에 쥐고 직접 핸들링하겠다는 강력한 의지다.      


마지막을 선택할 수 있다면 고통 속에서 오래 생명을 연장하기보다, 의식이 있을 때 사라지고 싶은 바람이 담겨 있다. 아마 페드로 알모도바르가 바라는 마지막 모습을 영화를 통해 풀어낸 게 아닐까 싶을 정도다. 유럽 몇 나라에서만 가능한 안락사, 존엄사, 조력 살인을 중심에 두고 담담하게 전개된다.     


죽음의 여러 모습이 교차된다. 여러 병원을 전전하다 마지막에는 요양병원에서 쓸쓸히 죽음을 맞이하는 한국의 어느 노인 모습이 떠오르기도 한다. 인간의 죽음도 중요하지만 데이미언(존 터투로)의 언어로 전달되는 지구의 종말도 의미심장하다. 지구를 의인화해 생각해 보면 인간은 암 덩어리에 불과한 존재다. 그는 신자유주의와 극우세력의 등장이 기후변화를 부추긴다며 강력하게 항의한다. 지구의 죽음도 멀지 않은 시대를 사는 인간으로서 생각이 많아진다.     


제임스 조이스의 단편 ‘더블린의 사람들’의 수록된 ‘죽은 사람들(The Dead)’을 읊조리는 마사의 목소리는 여운을 남긴다. 특히 마사의 딸 미쉘의 등장으로 죽음은 끝이 아님을 암시한다. 10대 때 낳은 딸과 사이가 좋지 못했던 친구를 대신해 잉그리드는 진심 어린 위로를 건넨다. 이로써 완벽한 대칭, 수미상관으로 마무리된다. 올해 가장 아름다운 엔딩으로 손꼽을 찬란한 장면이 아닐 수 없다. 겨울을 재촉하는 가을날 누군가를 떠올리게 하는 영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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