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약 다음 생이 있다면 인간이 아닌 동물 혹은 식물로 태어나고 싶다는 생각이 들 때가 있었다. 인간으로 살아가는 데 지치는 순간이 찾아올 때쯤인 거 같다. 일이 힘들거나 사람 관계 때문에 상처받았을 때, 막막해서 앞길이 보이지 않을 때 주로 들었던 생각 ‘인간이길 포기하고 싶다’였다.
인간으로 태어나 살아가는 일은 바쁘고, 복잡하고, 귀찮으며 불편함을 감수해야 하는 일이란 소리다. 사랑받는 반려견이나, 그저 아무 생각 없이 빛과 물만 먹고 살아가는 나무가 되면 훨씬 심플한 삶일까. 여러 생각이 떠돌던 중 영화 <애니멀 킹덤>을 보고 나서 마음속에 질문이 떠올랐다.
인간이 동물로 변하는 세상이 찾아온다면, 모두가 동물로 변해서 태초로 돌아간다면 어떨까. 아마 지구는 지금보다 자정능력을 발휘할 것이고 모든 게 리셋되지 않을까. 지구 종말 보다 약간 가벼운 공상이다. 누구나 공평하게 말과 지능을 잃어버리고 동물이 된다면 그것도 괜찮은 방법 같다고 느꼈다.
다만 선택적으로만 변한다면 난감해진다. 집안의 가장이던 남자가 하루아침에 벌레로 변신하게 된 프란츠 카프카의 소설 《변신》이나, 요르고스 란티모스의 영화 <더 랍스터>처럼 기간 내에 짝을 찾지 못해 동물로 변해버린 상황이라면 어떠한가. <디스트릭트 9>처럼 혐오하던 존재(외계인)로 변해버린 남자의 슬픈 처지는 아련함까지 더한다. 과연 가족이라도 사랑으로 돌봐주고 품어 줄 수 있을지 숱한 물음표가 생긴다.
동물로 변하는 몸에 적응하기 힘든 소년
사춘기에 접어든 소년 에밀(폴 키르셰)은 정체 모를 바이러스에 감염된 엄마를 죽었다고 생각했다. 엄마는 누구도 알아볼 수 없는 수인이 되어버렸지만 쉽게 포기하지 않았던 아빠 프랑수아(로망 뒤리스)를 이해하기도 싫었다. 반면 수용소에서 생활하는 아내를 보러 가는 길은 설레기도 하지만 꽉 막힌 도로 사정처럼 답답하기만 하다. 말이 통하지 않는 아들과 옥신각신하던 중 앰뷸런스 안에서 사투를 벌이던 수인이 탈출하는 것을 목격하게 된다.
거대한 새로 변하게 된 남자는 얼굴에 붕대를 감고 있었다. 날지는 못하고 엉거주춤 도망치는 남자를 보며 두 사람은 충격에 휩싸인다. 에밀은 두렵고 무서웠지만 애써 나와 관계없는 일이라고 생각하려고 한다. 그러던 어느 날, 예정보다 일찍 다른 수용소로 이송되던 엄마가 실종되면서 에밀에게 믿기 힘든 일이 벌어지기 시작한다. 점점 혐오하던 수인의 형태로 서서히 변해가고 있었다.
처음에는 새로운 생활에 적응하기 힘들어 생긴 스트레스쯤으로 여겼지만 곧 감당하기 힘든 현실과 마주해야 했다. 예민해진 후각과 청각뿐만 아니라 기하급수적으로 자라는 털과 날카로운 손톱과 이빨을 감당하기 어려웠다. 두 발로 자전거를 타기 힘들고 갑자기 힘이 세지는 통에 완급조절이 힘들었다. 그때쯤 학교에서도 겉돌기 시작하며 혼자 끙끙 앓기만 했지만. 앰뷸런스를 탈출해 숲으로 도망친 픽스(톰 메르시에)를 만나며 조금씩 마음의 문을 열어간다.
날개가 생겨났지만 날지 못하고 걷지도 못하던 픽스는 혼자 힘으로 날고 싶어 안간힘을 쓰게 되고, 이를 돕던 에밀 또한 인간과 동물 사이의 정체성을 확립해 나간다.
나와 다른 무엇과 공존하는 삶
영화 <애니멀 킹덤>은 명확한 답을 내어주지 않지만 차이와 다름을 인지하는 계기를 마련하는 기회를 건넨다. 대체로 인간이 동물이 되는 상황은 끔찍하고 참혹하지만 <애니멀 킹덤>에서는 일종의 탈출구처럼 다룬다. 기후변화 속 인간과 동물의 공생관계, 변화된 환경을 향한 직시, 종(種)의 경고와 미래상도 제시한다.
새도 아니고 인간도 아닌 괴물이라 불리는 사나이 반인반수 픽스는 영화의 주제를 가리키는 은유다. 이상하고 혐오스럽다며 강제로 성형수술을 당해 힘들고 괴로운 처지다. 인간 세상으로 돌아갈 수 없어 생존하려면 반드시 비행을 터득해야 한다. 세상은 인간 중심으로 돌아간다. 인간의 편의를 위해 동물의 번식을 막고 산을 깎아 도로를 낸다. 본능적으로 가던 길이 없어진 동물은 도로 위를 뛰어들다 죽음을 피하지 못한다. 잠시 빌려 쓰는 지구는 인간의 것이 아님을 잊는다.
픽스는 인간에서 동물로 변하는 새로운 시대와 종을 상징하는 까닭에 뉴노멀에 적응하려고 버티는 과정을 자세히 보여주게 된다. 온갖 노력을 통해 후천적으로 얻은 날개를 펴 비행하려 고군분투한다. 마치 팬데믹을 처음 마주해 혼란스러웠던 인류의 과거가 떠오른다. 잠시였지만 팬데믹으로 인간 활동이 멈추니, 동물이 그 자리를 차지했고 지구는 깨끗해졌다.
영화는 포스트 아포칼립스의 또 다른 모습도 보여준다. 기존의 영화 문법이 공포심을 심어주었다면 <애니멀 킹덤>의 문법은 공존과 희망으로 써 내려간다. 누구나 겪을 수 있는 일이기 때문에 차별과 혐오를 멈추고 공생의 길을 찾고자 한다. 돌연변이, 괴물이라며 경계를 나누는 사람도 있지만 결국 변화를 받아들여 가정과 사회로 뻗어나가는 인식개선의 방향을 제안한다.
인간은 생각보다 참혹하고 나와 남을 분리하는 데 익숙하다. 인간일 때는 타인을 이해하지 못했지만 동물이 되어가면서 인간성을 회복하는 아이러니다. 몸소 체험해야만 공감하는 동물이며, 나의 일이 될 때 훨씬 적극적으로 움직인다.
초반 프랑수아는 아들에게 자기 생각을 주입하고 따르라고 강요했지만, 아들까지 변하자 생각을 바꾼다. 치료제가 개발되면 다시 인간으로 돌아올 거라 믿었지만 결국 포기한다. 에밀도 수인으로 변한 엄마를 수치스러워하며 더 이상 인간이 아니라고 판단했으나, 본인 일로 닥치자 생각을 바꾼다. 이해할 수 없는 일 앞에서 서로를 인정하고 놓아주는 감동은 결국 사랑의 힘으로 가능한 일이 되어버린다.
그래서일까. 마지막 장면을 잊을 수 없다. 누가 어떤 상황에서 영화를 보느냐에 따라 달리 보일 테지만 '해방감'을 맛보았다. 어쩌면 사춘기에 접어든 부자의 관계 회복 과정으로 읽힐 가족 드라마이며, 다름을 인정하지 않는 세상에 맞설 용기와 나다움을 찾는 성장영화로 읽힐 것이다.
어쩌면 둥지에서 애지중지 키웠던 아기 새가 나는 법을 배우고 철새의 무리에 합류하는 것처럼 벅찬 뿌듯함이 차오를 수도 있다. 비록 부모의 마음은 아니었지만 한 생명을 키워 낸 것 같다. 둥지를 떠나보내는 아버지의 눈빛을 잊을 수가 없다. 생명은 이처럼 고귀한 존재임을 잊고 지낸 시간이 부끄러워졌다. 인간은 얼마나 잔인한 동물인가 다시 한번 깨닫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