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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장cine 수다

<미키 17> 오늘의 나는 어제와 나와 같은 존재일까?

by 장혜령

죽는 직업을 택한 처연한 ‘미키’


2054년 인류가 망가뜨린 지구는 기후변화로 살기 척박해지고 개척 행성 니플하임으로 이주를 앞두고 있다. 경력, 자격증 하나 없던 미키는 절체절명의 위기에 이끌려 익스펜더블에 지원한다. 익스펜더블이란 죽으면 기억과 생체 정보를 저장한 채 새로 프린트되는 소모품으로 한 행성 당 오직 1명의 익스펜더블이 허용된다.


지구에서는 불법이라 오직 지구 밖에서만 가능하다. 특히 같은 존재가 1명 이상 공존해서는 안 된다. 둘 이상

인 상황을 멀티플이라 부르는데 과거 여럿이 공존해 불미스러운 일이 생겨 금지되었다. 단 종교, 윤리적 문제로 인류의 발전을 위해 우주에서 쓰기로 결정했다.


한편, 4년 동안 익스펜더블로 살았던 미키는 나샤(나오미 애키)와 사랑에 빠져 행복한 나날을 보낸다. 프린트된 지 10 분 만에 죽은 미키도 있었고 징징거리는 미키도 있었지만 인류의 생존을 위해 미키 17(로버트 패틴슨)까지 만들어졌다. 다행히 곁을 지켜준 나샤 덕분에 극한 미션이라도 그나마 버틸 수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행성 탐사를 위해 나갔던 미키 17이 크레바스에 빠졌다. 친구 티모(스티븐 연)은 살 가망이 없어 보인다며 구해주지 않고 떠난다. 죽어야만 했던 미키 17은 행성의 괴생명체 크리퍼에 의해 생존해 기지로 돌아온다. 하지만 곧 미키 18이 프린트되어 버린다. 멀티플이 된 사실을 알게 된 둘은 식량, 일을 둘로 쪼개 아슬아슬한 동거를 이어간다. 과연 둘은 들키지 않고 니플하임에서 살아남을 수 있을까.


인간이길 포기하자 얻은 존엄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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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무나 인간적인 SF 영화 <미키 17>은 봉준호 감독의 색깔을 더한 미국산 종합선물세트다. 각각의 장르를 재료 삼아 적절한 조미료와 풍미를 더한 맛의 배합이 느껴진다. 한국에서 유행 중인 복합장르의 최종 목표인 셈이다. SF 어드벤처 장르의 외피를 입고 있지만 멜로이자 한 인간의 성장 드라마다. 크리퍼가 등장하는 괴수물이기도 하며 정치 스릴러의 성향도 띤다. 언제나 그랬든지, 먹어 본 맛 같은데 새롭고 이상해서 자꾸만 생각난다. 하나로 규정할 수 없는 장르 융합의 마술사다.


‘에드워드 애슈턴’의 《미키 7》을 원작으로 한다. 원작의 설정 중 미키를 10번 더 사지로 내몰아 곤경에 처하게 둔다. <옥자>의 기후변화와 환경문제의 화두를 우주로 돌리고 <설국열차>의 독재자와 노동자의 계급 차를 넓혀 무한함의 철학을 논한다. 죽으면 기억과 생체 정보를 지정한 채 새로 인쇄되는 비품 익스펜더블은 3D 프린팅된 복제품처럼 보이지만 위기의 순간에 가장 인간다워진다.


편리하게 숫자로 불리다가 종국에는 ‘미키 반스’라는 이름으로 불린다. 예고 없이 미키 18이 나타나자, 미키 17은 처음으로 살아보고 싶은 마음이 간절해진다. 불멸의 존재로 거듭났으나 필멸의 존재가 되어서야 존엄성이 생가는 아이러니다.


땀 냄새 가득한 아날로그 S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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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준호 감독이 말하려던 인간 냄새나는 SF는 크리스토퍼 놀런의 SF와 확연히 다르다. 계산된 물리학적 정확성과 과학 지식이 없어도 충분히 즐길 수 있게 대중적인 톤이다. 클리셰를 비틀며 어긋난 틈에 보편적인 ‘희망’과 ‘자유’, 그리고 ‘사랑’을 슬그머니 끼워 넣는다. SF라지만 휴머니즘이 풍기는 아날로그적인 선택이다. 적벽돌이 메모리칩이라며 기억을 제공하고 구닥다리 기계에서 A4용지가 출력되듯 사람이 나온다. 원작의 깊은 철학적 사유를 거두고 세심한 부분을 극대화했다. 약 30년 후인 근미래로 앞당긴 것도 이와 비슷한 이유다.

어딘가 짠해 보이고 늘 손해만 보는 미키는 소모품처럼 쓰이는 비정규직, 외국인 노동자를 떠올리게 한다. 누군가는 반드시 해야 하는 힘든 일이지만 혐오와 차별, 노동 착취가 만연한 불편한 현실을 들추어낸다. 편리함을 돈으로 사는 대신 힘든 과정은 모르는 척하고 싶어 한다. 손가락 하나만 누르면 집 앞으로 배달되는 물건을 쉽게 받는데만 익숙해질 뿐 노동의 가치는 등한시된다.


자본주의 시스템은 3D로 불리는 고된 업무를 대신하는 사람을 오히려 천대하고 무시한다. 시스템의 인간화가 사람이 마샬 부부다. 미키는 인간으로서 최소한의 대우와 안전을 보장받지 못한 노동자를 대표한다. 제지공장, 제빵공장, 화력발전소, 스크린도어 등. 일하다가 사람이 죽어도 그 자리는 또 다른 인간으로 대체된다. 잘못된 시스템은 그대로 유지되고 인력만 바뀌는 과정이 반복된다. 미키는 그 일을 혼자서 감내하는 처지다.


미국 영화지만 이상하게 봉준호 월드의 고유성을 지닌다. 봉 감독의 확장된 세계관은 우주까지 확장되어 영향력을 행사한다. 시공간을 따지지 않고 사회계층 문제, 자본주의 착취가 만연한 인간세계를 톺아본다. 얼마나 절박하면 ‘죽는 직업’을 택했을까. 미키는 티모와 사채를 빌려 마카롱 가게를 열었지만 망한 자영업자다. 늘어난 빚을 감당하지 못해 협박에 시달리다가 니플하임으로 떠나는 우주선에 몸을 싣는다. 참 처연하고 지질하다. <기생충>에서 카스텔라 가게를 말아먹은 기택네 가족이 생각난다. 소름 돋는 것은 영화에서만 일어나는 일이 아니라는 데 있다. 오랜 불황을 간신히 버티고 있는 전 세계적 신음이 크리퍼들의 함성으로 전해지는 듯하다.


미키의 테세우스의 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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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키라는 존재를 테세우스의 배에 빗대 해석해 보자. 미키는 DNA 정보를 넘겨 무한 복제되는데 동의했다. 일종의 복제인간 같지만 앞선 미키의 기억을 잇는 구조다. 기억은 유지한 채 몸만 계속 바뀌는 과정이 '테세우스의 배'인 셈이다.


고대 영웅 테세우스는 나무로 만든 배를 타고 전 세계를 항해했다. 그 과정에서 망가지고 녹슨 배를 뜯어고치고 나무를 새로 덧붙여 쓰다 귀환했다. 그렇다면 수십 년을 떠돌다 들어온 배는 출항할 때 배와 같은 배라고 볼 수 있을까. 새로운 나무를 덧대 고친 배는 분명 처음과는 다른 모양새다.


이를 인간에 적용해 보면 흥미롭다. 태어날 때 세포가 여전히 몸속에 남아 있는 사람은 없다. 인간의 모든 세포는 만들어지고 죽기를 반복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처음의 나는 지금의 나와 다른 사람이라고 봐야 할까. 세포는 끊임없이 생성되고 사라지는데 기억은 그대로라면 죽은 게 아닌 걸까. 수술로 장기를 교체했다고 해서 이전의 나와 지금의 나는 같은 사람이 아닌 걸까. 정체성에 관한 심도 있는 질문이 머릿속을 끊임없이 괴롭힌다.


사랑은 반드시 이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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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는 어렵지 않고 재미있다. 미키는 죽음에 익숙해지지 않아 괴롭다. 벌써 17번의 죽음을 경험했지만 여전히 무섭다. 그 죽음 곁에 연인이 함께 있어 그나마 위로가 된다. 나샤는 유일하게 미키를 인간으로 대한다. 아픔, 슬픔, 환희를 나누며 미키를 보호하고 챙긴다.


인류를 위해 죽어간 실험 쥐처럼 죽음을 가벼이 여기던 인간과 대조적인 크리퍼도 인상적이다. 그들은 생명을 경시하지 않는다. 크레바스에 빠진 미키를 잡아먹지 않고 밀쳐내 오히려 살려준다. 미키가 ‘맛이 없어서냐’고 물으니 ‘왜 먹냐’는 대답을 내놓는다. 납치된 조코를 돌려 달라며 떼로 몰려나왔을 때도 비폭력 평화 시위로 에워쌀 뿐 어떠한 해도 가하지 않는다. 엄청난 협상가이자 유머까지 탑재한 마마 크리퍼는 이상적인 리더로 보인다. 누구라도 억울한 죽음, 쓸모없는 죽음을 당해서는 안 된다는 신념이다.


그에 반해 마샬과 아내 일파는 나쁜 정치인의 표본이다. 극대화된 위선을 통해 신랄한 풍자의 대상화가 되어간다. 미키에게 형편없는 식사를 주면서도 칼로리를 제한하고 삶의 즐거움을 빼앗는다. 반면 자신들은 문명의 리트머스라며 소스에 집착한다. 미키에게는 실험 중인 배양육을 먹이고 자신들은 진짜 고기와 와인을 먹는다.

5년 만의 신작 <미키 17>를 통해 봉준호 감독은 25년 경력 중 첫 번째 러브스토리를 뿌듯해했다. 영화 속에서라도 결코 무너지지 않는 주인공을 내세운다. 여전히 계급 문제를 말하면서도 사랑을 주제로 따뜻한 희망을 보여준다. 팍팍해진 세상에 굳이 영화까지 심각할 필요는 없다는 전언 같다.


끝까지 살아남아 사랑하는 사람과 오래도록 늙어가는 일, 인간으로 태어나 평범한 일상을 보내는 소소한 행복에서 청년의 희망을 그려봤다면 과한 걸까. 미키 18이 미키 17의 미래를 위해 스스로한 선택은 가장 인간다워지는 모습이면서도 진짜 어른이라면 해야 할 일을 일깨워 준다.



+봉준호 감독 인터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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