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또라이 질량 보존의 법칙’이란 말이 있다. 조직에는 늘 나와 맞지 않는 사람이 있고, 이직해도 항상 존재한다는 말이다. OECD 국가 중 근로시간이 길고 워라밸이 지켜지지 않는 한국 직장인에게 직장 내 관계는 퇴사 이유의 가장 큰 원인으로 꼽힌다. 하필이면 직장의 또라이가 상사이자 대표라면 얼마나 참아야 할까. 내가 또라이일 경우도 배제해서는 안 된다. 불확실성 시대에 버티는 게 승자인 회사 생활을 슬기롭게 하는 방법이 있다면 좋겠다.
갑질 상사와 고립된 직원의 복수
영화는 비행기 추락 사고로 인해 죽일 만큼 미운 직장 상사 ‘브래들리’(딜런 오브라이언)와 무인도에 고립된 직원 ‘린다’(레이첼 맥아담스)가 직급 떼고 벌이는 권력 역전 싸움을 다룬 작품이다.
승진을 코앞에 두고 물먹은 린다와 아버지의 사망과 동시에 낙하산 CEO가 된 브래들리는 출장 중 사고를 당해 무인도에 떨어졌다. 이따부터 문명생활의 상하관계는 없다. 계급에 따른 갑질이나 완벽한 일머리와 보고서는 회사에서나 통하는 법. 무인도에서 오직 생존 본능만이 능력으로 환산된다. 서바이벌 프로그램을 즐겨 보던 린다는 숨겨진 재능을 발휘해 다친 브래들리를 응급처치해 물과 음식을 구해 하루하루를 버틴다.
그러나 두 사람은 동상이몽이다. 린다의 도움으로 기력을 회복한 브래들리는 구조를 꿈꾸지만 린다는 섬을 떠날 생각이 없다. 엇갈린 생각은 잦은 다툼으로 이어지고 신뢰를 무너트리며 목숨에 위협을 가할 사건으로 발전한다. 린다는 회사에서 얻은 무너진 자존감을 회복하길 바라고, 브래들리는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몸뚱이뿐인 무력감에 갑갑함이 쌓여간다.
탈출하려는 자와 의도적 고립을 자처한 자의 뚜렷한 대비는 관객조차도 혼란스러움을 유발한다. 캐릭터의 몰입을 방해하는 심리적 긴장상태가 몇 번이고 지속된다. 악역으로 보이는 상사를 응원해야 할지, 피해자로 보이는 직원에게 이입해야 할지 갈등된다. 즉, 뚜렷한 악역과 선역이 구분되지 않는 복합적인 인물 빌드업과 예측불허한 스토리텔링은 공포와 서스펜스를 끌어올린다.
호러와 블랙 코미디의 조합
<직장상사 길들이기>는 오랜만에 시그니처 장르로 돌아온 샘 레이미의 광기 어린 연출력을 펼쳐낸 영화다. 꾸준히 호러를 중심으로 독창성을 선보인 그는 B급 공포영화 <이블 데드>(1981), <드래그 미 투 헬>(2009)로 마니아를 양산했다. 이번 작품에서 주인공 이름이 린다인 이유와 애시 윌리스를 연기한 브루스 캠벨까지 등장해 <이블 데드>의 이그터에그까지 챙겼다. <드래그 미 투 헬>를 연상하는 장면도 포함돼 샘 레이미의 팬들에게 쏠쏠한 재미를 안긴다.
인간이 공포를 접했을 때 느끼는 심연의 본질을 파고들면서도 미학적 완성도까지 높인 연출력은 <스파이더맨>(2002-2007) 3부작을 완성하며 대중성까지 입증했다. 이어 키치적이고 만화적인 연출력을 더해 <닥터 스트레인지: 대혼돈의 멀티버스>(2022)를 선보였다. 마블 영화 중에서도 결이 다른 스타일로 주목받았다. <닥터 스트레인지: 대혼돈의 멀티버스>는 히어로와 공포의 결합을 벌여 경계를 허물며 비틀어진 장르적 쾌감뿐만 아닌 영웅서사의 입체적인 면모까지 덧입혔다.
그뿐만 아니다. 또다시 배우 이미지 전복에 성공했다. <스파이더맨> 시리즈에서 토비 맥과이어는 피터 파커의 양면적인 모습을 통해 배우 커리어와 히어로 영화의 정점을 찍기도 했다. 이번에는 <닥터 스트레인지: 대혼돈의 멀티버스>로 호흡을 맞춘 레이첼 맥아담스와 재회해 완전히 다른 얼굴을 꺼내 보이도록 했다.
<어바웃 타임>, <노트북>으로 로맨스 장인의 이미지를 벗어던지고 철저히 망가진다. 우리 곁에 있을 법한 평범한 너드 린다를 실감 나게 선보였다. 화장기 없는 얼굴로 기괴하고 참혹한 표정을 넘나들 때면 묘한 쾌감까지 전해진다.
딜런 오브라이언은 어떤가. 한국인에게는 영화 <메이즈 러너> 시리즈의 토마스로 기억되어 있다. 위험한 상황을 극복하는 성장형 캐릭터를 연기해 온 그가 입체적인 빌런 브래들리를 맡아 신선한 모습을 보였다. 무인도에 고립된 인물의 상황극이 대부분이라 새 인물조차 등장하지 않지만 두 사람의 앙상블 연기가 모든 것을 아우른다.
계급장 뗀 싸움의 카타르시스
<직장상사 길들이기>는 원제 Send Help 보다 상징적인 의미로 읽힌다. 한국 직장인에게 깊은 공감과 위로를 건네는 영화다. 제목만 봐서는 드래곤을 길들였던 히컵(인간)과 드래곤(동물)의 우정과 교감을 다룬 <드래곤 길들이기>가 떠오를지도 모르지만, 이 영화는 전혀 다른 결로 응수한다.
사방이 트인 갇힌 공간(섬)에서 겪는 앙숙 케미를 장르적인 요소와 결합했다. 직장인의 애환을 제대로 담으며 도파민도 한계 없이 분출된다. 그동안 당하고만 살았던 분노가 폭발하며 대리만족된다. 권력과 계급의 전복은 블랙 코미디의 씁쓸한 웃음까지 견인한다. 퇴사 욕구를 부르는 직장 상사에게 심리, 육체적 타격감을 안기며 몇 번이고 카타르시스를 선사한다.
더불어 여전히 보이지 않는 계급이 존재하는 현대 계급 사회의 축소판인 회사 생활의 공감을 끌어올린다. 린다의 대사 ‘다정함을 약함으로 착각하지 마’는 직급과 계급이 사라진 무인도에서 형성된 새로운 권력관계를 암시한다. 직장인이라면 현실을 떠나 누구나 꿈꿔 봤을 사이다 발언으로 묵직한 울림도 전한다.
또한 ‘구조대는 오지 않아, 스스로 구해야 해’도 인정하기 싫지만 뼈 때리는 통찰의 메시지다. 때와 장소에 따라 변하는 현대인의 표상을 날것 그대로 드러내는 데 주력했다. 직장에서는 표독스러운 악질일지 몰라도 가정에서는 좋은 아빠이고 남편이고, 직장에서는 대인관계가 원만하지 못하지만 누구에게는 최고의 연인인 사례처럼 말이다.
이는 자기 밥그릇은 자기가 챙기라는 일침 섞인 조언이자. 언제 어디에서 누구를 만날지 모르니 항상 친절함을 잃지 말라는 직장 생활 생존기로도 읽힌다. 퇴사를 부르는 경직된 조직문화, 사회인이라면 한 번쯤 꿈꿔 봤을 판타지와 현실의 간극, 전반적인 고군분투가 <직장상사 길들이기>에 담겼다. 평등하고 수평적인 조직문화는 후기자본주의 사회에 어불성설이다. 서바이벌 경쟁 프로그램이 인기 있는 이유도 이와 다르지 않다. 내가 살기 위해 남을 밟고 올라서는 구조는 인간이 진화한 이기적인 유전자의 본능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