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우리에게는 아직 내일이 있다>는 1940년대 이탈리아를 배경으로 현대에도 유효한 고민을 풀어내는 데 성공했다. 파올라 코텔레시 감독이 각본, 연기까지 맡은 장편 데뷔작이다. 제29회 부산국제영화제에 초청되며 국내 관객에게 눈도장을 찍었다.
아내, 엄마, 며느리의 삼중고
델리아(파올라 코텔레시)의 하루는 24시간이 모자란다. 아침 일찍 일어나 식구들 식사와 도시락을 챙기고 나면 몇십 년째 누워지내는 시아버지 오토리노(조르지오 콜란젤)의 병수발을 들어야 한다. 말보다 손이 먼저인 남편 아비노(발레리오 마스딴드리아)와 장녀 마르첼라(로마나 마조라 베르가노)가 출근하고, 두 아들을 학교까지 보내 놓으면 집안일은 끝이다.
본격적인 노동을 시작한다. 여러 집을 돌며 주사를 놔주는 일을 중심으로 남의 집 빨래 대행부터 삯바느질로 수선한 값을 정산 받기 바쁘다. 고장 난 우산을 성실히 고친지 오래지만 여성이란 이유만으로 임금차별에 시달리며 마땅히 호소할 곳도 없다. 온종일 허드렛일까지 마치고 돌아오면 금세 녹초가 되어버린다. 다행히 마음 나눌 친구 마리사(에마누엘라 파넬리)가 있어 잠시라도 숨을 돌린다.
자신을 위한 시간은 1초도 없는 델리아는 가족을 위한 희생이 존중은커녕 어떠한 가치로 환산되지도 못한 삶을 살아간다. 누구의 아내, 며느리, 엄마로서 의무만 강요받을 뿐 권리를 보장받지 못한다. ‘왜 그렇게 사냐’며 짜증만 내는 마르첼라의 구박에도 참기만 하는 여성이다. 유일한 소망은 딸이 좋은 남편을 만나 행복한 가정을 꾸리는 것. 푼돈을 빼돌려 남편 몰래 웨딩드레스를 사줄 날을 손꼽아 기다리고 있다.
고된 일상을 견딜 힘은 투표권
영화는 세계대전의 패전으로 혼란스러웠던 이탈리아를 배경으로 사회상과 일상을 다룬 네오리얼리즘 형식을 표방한다. 흑백 요소와 4:3 비율을 따르면서도 현대적 메시지를 전한다. 고전 멜로 영화의 뮤지컬 문법 안에서 생각지도 못한 페미니즘을 만나는 신선함이 크다. 80년 전 침묵했던 여성이 깨어나길 바라는 의도적인 연출이 돋보인다.
엇박자의 위트, 아이러니한 상황으로 영화적 재미와 예술적 기교도 상당하다. 만연한 폭력의 대물림을 강렬히 전하는 데 이어 사회적 메시지와 영화적 미장센까지 잡았다. 고통스러운 리얼리즘을 추구하다가도 매 맞는 장면을 뮤지컬 형식으로 치환하거나, 첫사랑과 재회를 코미디로 변주해 분위기를 환기한다.
여성의 권익 신장이 막 첫발을 내딛던 찰나의 순간을 한 가정을 빌려 이야기한다. 여성의 희생을 당연시 여기고 가정 폭력이 일상화되던 시대를 재현함으로써 물려주지 말아야 할 부당한 유산을 떠올리는 기폭제가 되어준다. 기상하자마자 뺨부터 맞으며 시작하는 델리아의 전쟁은 이탈리아 전체의 계급 갈등을 가정으로 축소한 예이다. 아버지부터 대물림된 가부장적 내력 안에서 아내를 때리는 남편은 온 동네가 용인한 폭력으로 굳어졌다. 모두가 알고 있지만 선뜻 나서지 못하는 암묵적 합의가 지속되었다.
델리아는 모든 게 전쟁 때문이라던 남편의 육체적 폭력과 자주 때리면 익숙해지니 가끔씩만 세게 때려야 한다고 조언하는 시아버지의 정신적 폭언 사이에서 묵묵히 버틴다. 오랜 폭력에 시달리던 델리아가 남편과 헤어질 결심을 하게 된 이유는 한 통의 편지를 받으면서부터다.
델리아는 종종 정비공으로 일하는 첫사랑을 찾아 로맨틱한 만남을 주고받아왔다. 함께 북부로 떠나자는 제안에 흔들리는 마음을 드러냈다. 지긋지긋한 현실을 버리고 언제라도 떠날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을 품게 했던 델리아는 생각지도 못한 선택을 한다.
드디어 중요한 약속을 앞두고 결연한 의지를 다진다. 예쁜 블라우스를 사고, 아껴둔 신과 가방을 꺼내 마음을 굳힌다. 혹시 모를 일에 대비해 마리사에게 뒷일을 부탁해 놓았으며, 갑작스러운 시아버지 장례식까지 완벽히 마친 다음 날. 의미심장한 표정으로 어딘가로 향하게 된다.
여성에게 빵과 장미를
<우리에게는 아직 내일이 있다>는 기념비적인 역사를 기억하는 것과 동시에 여전히 차별과 억압받는 전 세계의 여성을 향한 지지와 연대를 촉구한다. 1946년 이탈리아는 제2차 세계대전 이후 공화제와 군주제 도입이란 상반된 결정 앞에 국민 투표가 임박했던 시기다. 투표권이 없었던 여성이 처음으로 투표권을 행사할 수 있었던 역사적 순간이기도 했다.
빨갛게 물들인 립스틱을 지우고 누구보다도 결연한 마음으로 한 표를 행사하던 여성들의 기대가 전해진다. 엄마는 딸에게 자신의 불행을 물려주고 싶지 않았다. 결혼 지참금과 웨딩드레스를 마련하기보다, 주체적으로 삶아갈 교육, 법적 제도를 마련할 방법은 투표권 행사라는 것을 깨닫는다.
영화에서처럼 연대야말로 오랜 고리를 끊어낼 힘이라는 것을 ‘세계 여성의 날’에 떠올려 보는 일은 의미심장하다. 선거야말로 민주주의의 꽃이며 미래를 바꿀 한 표를 행사하는 것은 국민의 의무이자 권리다.
세계 여성의 날은 1908년 작업장에서 화재로 숨진 여성들 기리며 시작된 미국 노동자의 참정권 요구 시위에 나서부터다. 그들이 ‘우리에게 빵과 장미를 달라’라고 외친 이유는 임금 개정(빵)과 참정권(장미)을 요구했기 때문이다. 이후 1975년 UN이 세계 여성의 지위 향상을 공식 지정했고, 1977년 3월 8일 세계 여성의 날로 선포되었다. 우리나라에서는 2018년부터 법정 기념일로 지정되었다.
마지막으로 세계 여성의 날을 맞아 챙겨보면 좋은 영화도 소개한다. 지속적인 관심과 배움은 사각지대에 놓인 전 세계의 여성을 돕는 작은 발걸음이다. 여성 참정권의 시작을 다룬 <서프러제트>, NASA의 숨은 주역이었던 여성 수학자를 다룬 <히든 피겨스>, 편견과 차별에 맞선 가수 헬렌 레디를 다룬 <아이 엠 우먼>, 이란의 여성해방을 다룬 <성스러운 거미> 등을 추천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