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장혜령 Oct 22. 2020

<삼진그룹 영어토익반> 지렁이도 밟으면 꿈틀

개미도 모이면 일냅니다!


애사심은 그냥 만들어지지 않는다. 하루의 반 이상을 보내는 회사에서 의미 있는 일을 한다는 뿌듯함, 내가 하는 일이 누군가에게 도움이 되길 바란다는 극 중 대사가 기억에 남는다. 직장인, 특히 여성 직장인이라면 공감 요소가 다분하다. 직장에만 들어가면 일다운 일을 할 수 있을 거란 기대에 부풀지만 막상 한없이 초라한 업무와 답답한 조직 문화에 실망한 많은 직장인을 위로한다. 월화수목금금금. 야근을 밥 먹듯이 해도 출신, 성(性)이 다르면 급여, 처우, 승진도 다른 신(新) 계급사회가 바로 회사라는 조직이다.


<삼진그룹 영어토익반>은 95년 을지로 대기업의 말단 삼인방이 회사의 비리를 캐며 성장하는 이야기다. 본격적인 세계화 시대지만 말단 사원만 8년 차 더 올라갈 고지가 보이지 않는다. 글로벌화에 맞서 회사는 토익 600점을 맞으면 대리로 승진된다는 말로 유혹한다. 그러나 뒤에 숨은 행간을 읽지 못하면 그대로 퇴출당할지 모를 일이다. 상고 출신이라는 꼬리표는 평생을 회사에 몸 바쳐도 진급은커녕, 커피 타고 복사하는 단순 업무만 하다 끝난다는 확인 사살이다. 그래서 부당한 대우도 적당히 넘어가고, 생산적인 일을 할 기회를 주지 않아 그저 침묵하고 만다. 할 말 많지만 다하지 못해 답답함만 커진다. 이쪽에서 저쪽으로 넘어갈 수 있는 일은 단연코 없다고 봐야 한다. 해가 서쪽에서 뜨지 않는 것, 물이 아래에서 위로 흐르지 않는 것처럼 말이다.


영화 <삼진그룹 영어토익반> 스틸컷


그러던 어느 날, 오지랖 넓은 생산부서 자영(고아성)은 최동수 대리(조현철)와 공장에 외근 나갔다가 뜻하지 않은 광경을 목격한다. 좋은 일을 한다고 믿었던 회사가 비 오는 날 몰래 폐수를 유출하는 게 아닌가. 그것도 콸콸콸. 그냥 넘어갈 일이 아님을 파악한 자영은 회사에 보고하지만 묵살 당한다. 그땐 그랬다. 폐수 유출이 큰 잘못인지 몰랐고, 마을 주민들에게 적당히 합의하고 보상금을 주면 끝날 거라 믿었던 때다. 


자영은 갈등한다. 회사를 쉽게 때려치울 수도 없지만 아닌 건 아니라는 밑도 끝도 없는 정의가 이내 발목을 잡는다. 이에 최초 목격자 자영, 마케팅부 유나(이솜)와 회계부 보람(박혜수)은 내부고발자가 되어 진실을 파헤치려 한다. 하지만 좀처럼 쉽게 풀리지 않는다. 그 진실은 실제로 아주 복잡해서 풀기 힘든 방정식 같다고나 할까? 다 풀었다 싶으면 틀렸고, 다시 풀어 봐도 오답임이 분명하다. 그렇다고 여기서 포기할 수 없다. 이미 시작한 일이다. 여기서 포기하면 정말 아무것도 아닌 게 되어 버리는 거다. 삼인방은 악으로 깡으로 버틴다. 


티끌이 모여 태산이 되는 이야기 

영화 <삼진그룹 영어토익반> 스틸컷

영화는 삼인방의 선한 의지를 끝까지 밀어붙인다. 사소한 목격에서 시작된 추리는 배후를 캐고 또 캐며 진정한 악당을 찾아 바로잡고자 한다. 이들은 급격히 짧은 시간에 소수의 행동이 모여 다수의 패턴이 되고 중요한 사회적 이슈가 되는 티핑 포인트(전환점)를 활용했다. 작은 원인이 큰 결과를 낳을 수 있다는 극적 변화를 주목했다. 


부당한 대우를 받은 여성 직원들이 힘을 모았다. 처음에는 소수에서 출발했지만 그 의지가 전염되어  전환점에 이르는 순간 급격히 뒤집혔다. 지렁이도 밟으면 꿈틀, 티끌이 모이면 태산도 넘어트릴 수 있음을 증명한 셈이다.

최초의 소수, 세 여성의 캐릭터는 서로 독립성과 통일성을 동시에 유지한다. 미스터리 소설 마니아로 상상을 실전으로 옮기는 유나, 수학 올림피아드 대회 우승자답게 계산 실력으로 빠른 진행을 유도하는 보람, 그리고 실무 능력은 최고지만 현실은 커피 타기의 달인인 유나의 케미가 유쾌하게 펼쳐진다. 단순한 유니폼이 주는 합일이라 하기 힘든 세 캐릭터의 시너지가 시원한 웃음을 유발한다. 사고를 치는 남성들을 뒤로하고 아무도 주목하지 않던 계급 피라미드 가장자리의 여성들이 주축이 되어 꼬인 문제를 해결한다. 


오래도록 마음이 움직이는 영화다. 90년대 완벽 재현, 레트로 감성을 사로잡는 소품, 헤어, 패션, 음악 등. “라떼는 말이야”로 시작할 이야기가 차고 넘친다. 세계화가 진행 중인 시대답게 영어를 배우려는 움직임, 환경오염 인식 미비, 경영권 승계 문제 등 90년대 이슈 되었던 실제 사건들이 조금씩 얽혀 있다. 특정 사건을 영화화한 것은 아니고 당시 이슈 되었던 뉴스에서 영감받아 제작되었다. 그래서인지 현실적인 상황과 고증이 잘 되어 있다.

영화 <삼진그룹 영어토익반> 스틸컷

다만, 옛날이 좋았다는 말은 그때를 살아보지 않은 사람에게 해줄 수 있는 위로가 될 수 없겠다. 변하지 않는 조직 문화와 유리 천장, 직급 차별, 찍어 누르는 계급 문화, 육아휴직의 어려움 등 넘어야 할 산은 여전히 높고 많다는 게 씁쓸했다. 세상은 그리 쉽게 변하지 않는다. 하지만 포기한다고 달라지는 것도 아니기에 일말의 희망이라도 잡고 싶을 뿐이다. “뭐든 본인이 재미있는 일을 하고 살아”라던 상사의 충고가 천근만근 무거운 발걸음을 옮기는 직장인들을 위로하고 나선다. 사느라 바빠 잠시 잊고 있었지만 삶은 일말의 용기를 낼 때 내 것이 된다. 내가 사랑하는 내 삶의 주인공은 바로 나다.


평점: ★★★☆

한 줄 평: 기분이 울적할 때 보면 힘이 나는 영화

매거진의 이전글 <태양의 소녀들> 누가 그들에게 총을 들게 했나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