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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장혜령 Feb 26. 2021

<헬렌: 내 영혼의 자화상> '헬렌 쉐르벡'의 삶

<헬렌: 내 영혼의 자화상>은 핀란드의 뭉크로 불리는 북유럽 대표 화가 '헬렌 쉐르벡'의 삶을 최초로 스크린에 옮겼다. 사랑에 눈을 뜨며 작품의 변곡점을 맞았을 1915년부터 1923년까지의 삶을 조명했다. 가부장적인 시대에 태어나 평생 독신 여성으로 살아간 헬렌은 어려운 가정환경과 좋지 못한 건강 상태까지 겹치며 힘겨운 삶을 영위해야 했다. 직접 그린 그림의 소유권을 행사하지 못해 경제적 고립을 겪었으며, 고로 독립적인 생활도 누리지 못했다. 늘 오빠만을 향하던 부모의 사랑을 제대로 받지 못하고 컸지만 이에 좌절하지 않고 예술로써 인고의 세월을 견뎌냈다.     


초기에는 억압된 배경으로 피어난 야심을 드러낸 작품을 선보였다. 전쟁, 가난 등 어두운 소재는 여성에게 어울리지 않는다는 힐난까지 받아야 했다. 하지만 후기로 갈수록 선을 단순화하고 절제하는 방식으로 발전한 끝에 반백 살에 비로소 화가로 인정받게 된다. 영화는 오십 이후 헬렌의 내면에 느닷없이 찾아온 사랑의 감정이 붓 끝자락에서 피어난 내면을 심도 있게 담아냈다. 잔잔한 호수 같았던 마음을 쥐고 뒤흔드는 사랑이 고스란히 독특한 화풍으로 이어졌다.      


묵묵히 내면의 소리에 귀 기울이던 헬렌은 그저 유별난 여성 화가가 아닌 '화가'로 불리고 싶어 했다. 하지만 당시 예술계는 너무 급진적이라는 이유로 꺼려 했고, 색안경을 끼고 바라보는 시선에서 자유롭지 못했다. 미혼의 나이 든 여성 화가를 반길 곳은 없었고, 예술기금을 내면서까지 전시회를 열고자 했지만 매번 퇴짜 맞기 일쑤였다. 그렇게 10년 넘게 예술계를 벗어나 핀란드 히방카에서 어머니와 살고 있는 헬렌(로라 비른). 예술계의 갖은 멸시 속에서 변방으로 밀려나 몸과 마음이 쇠락해져 있던 최악의 상태였다. 이때 자신을 인정해 주는 젊은 예술가 에이나르(요하네스 홀로파이넨)가 찾아오며 큰 변화를 맞는다.      

영화 <헬렌: 내 영혼의 자화상> 스틸

그는 산림청 공무원이지만 독학으로 그림을 그리는 아마추어 화가 겸 작가였다. 헬렌을 오랫동안 존경해오던 에이나르의 안목은 기폭제가 되어 꿈에 그리던 개인전을 열며 다시금 예술성을 불태운다. 둘은 영혼을 나누는 소울메이트로 2년여의 시간을 함께 보내게 된다. 나이를 뛰어넘어 서로의 영감이 되어주었고, 자신을 향하던 눈이 타인을 향하기 시작함을 깨달으며 수줍은 마음을 키워 간다. 하지만 영원할 것 같았던 순간은 물거품처럼 사라지고 헬렌은 다시 혼자가 된다.      


외딴 시골에 버려진 나이 들고 병약한 여성 화가라는 비평에 아랑곳하지 않고 정물화, 자화상을 그렸다. 세상과의 단절, 메말랐던 마음에 촉촉한 단비가 되어준 그는 더할 나위 없는 행복이었다. 아이같이 순수한 에이나르를 만나 나이를 뛰어넘는 예술적 황금기를 맞는다. 스타일은 한층 성숙해졌고, 예술성은 더 깊어졌다. 

     

핀란드는 유럽 최초로 여성 참정권(1906년)을 획득했지만 혼란스러운 분위기 속에서 관습의 경계가 아직 허물어지지 않았었다. 그녀가 활동하던 시기 북유럽 또한 여성의 사회 활동에 제약이 있었다. 본인이 작품 소유권을 갖지 못하는 부당함 마저 수긍할 수밖에 없는 분위기였다. 이는 친구 헬레나(크리스타 코소넨)와 여성 참정권의 진전이 없다는 푸념으로 여성 인권의 위치를 짐작해 볼 수 있다.     


이러한 가풍은 화가로 더 성장할 수 있던 헬렌의 핸디캡이 된다. 헬렌은 어릴 때부터 오빠 마그누스(에로 아호)의 그늘에서 여성이라는 이유로 빛을 보지 못했다. 어머니 올가(피르코 사이시오)는 딸을 사랑하지만 예술적 야망을 못마땅해했고, 가정과 집안일에 충실하길 바랐다. 노골적인 차별은 오랫동안 이어진 듯 자연스러웠다. 그림을 판 수익금을 오빠와 나누기를 원하고, 식탁에서도 오빠 먼저 고기를 집어야 한다는 가부장적 태도로 억압한다.      

영화 <헬렌: 내 영혼의 자화상> 스틸

헬렌은 오랜 억눌림, 불편한 봄, 여성이란 제약의 삼중고를 겪지만 꾸준히 자신만의 그림을 그려 나간다. 특히 자화상을 그리는데 몰두했다. 캔버스 위에 달린 거울을 보며 인간의 추함과 잔혹함을 꾸밈없이 그렸다. 자신을 그린 이유에 대해 쉽게 모델을 찾기 어려울 때 언제나 곁에 있던 모델이라며 외로운 자아를 다독였다. 그 밖에도 소녀, 어머니, 여성 노동자 등 주변에서 쉽게 만날 수 있는 소박한 사람을 비범한 아름다움으로 승화해 나갔다.      


영화는 마치 한 폭의 명화를 감상하는 듯 세심하게 인물을 관찰한다. 헬렌 자체는 크고 화려한 움직이는 꽃과 나무와는 상반된 음울함이 크다. 해를 정면으로 흠뻑 받을 수 없어 그늘에서 핀 키 작은 잡초처럼 쓰러질 듯 보이지만 언제나 그 자리에 서 있는 우직함을 선보인다. 영화 또한 담담하고 느린 정서로 그녀의 분위기를 드러내는데 일조한다. 근대 앤티크한 복식과 건물, 핀란드의 아름다운 풍광을 스크린에 담아 여행을 다녀온 듯 청정미가 느껴진다.      


한편, '안티 조키넨' 감독은 유명 아티스트의 뮤직비디오를 연출한 경험을 십분 발휘했다. 고즈넉한 분위기와 잘 어울리는 드뷔시, 바흐, 모차르트 등의 클래식한 음악 선곡까지 영화와 조화를 이룬다. 

                                                                                                                                                                            

평점: ★★★

한줄평: 한 폭의 그림 같은 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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