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장혜령 Mar 20. 2021

<랜드> 대자연 속 홀로서기, 미국판 빅포레스트

영화의 첫 장면. 상담자와 마주한 한 여성이 그동안의 이야기를 하지 못해 머뭇거린다. 그녀는 왜 내 감정을 공유해야 하냐며 오히려 화를 낸다. 떠올리기 힘든 트라우마를 겪은 듯 보인다. 이내 시끄러운 도시의 삶을 정리하고 아무도 찾지 못할 깊은 산에 숨어들기로 결심한다. 오랜 기간 사람이 살지 않아 낡고 녹슬어버린 집 한 채를 구입한다. 


오두막에 들어서자 입이 다물어지지 않을 만큼 그림 같은 절경이 집 앞에 펼쳐진다. 감상도 잠시, 챙겨온 인스턴트 음식과 옷가지를 정리한다. 그리고 업자에게 차와 캠핑카는 필요 없다며 되가져가 줄 사람을 찾아 달라 부탁한다. 높고 깊은 산속 오두막으로 떠난 철저한 은둔자. 단단히 각오한 것 같은 심경이 전해진다. 대체 이 여성의 사연은 무엇일까. 


그녀의 이름은 이디(로빈 라이트)다. 최근 남편과 아들을 잃고 극심한 슬픔 끝에 자살을 결심했으나 실패하고야 만다. 주변에서는 심적으로 매우 불안한 상태라고 걱정하지만 어느 때보다 맑은 정신으로 현대판  '헨리 데이비드 소로'를 자처했다. 세상과 철저히 단절된 채, 남에게 의존하지 않으며 자급자족으로 여생을 보내기로 결심했다. 

영화 <랜드> 예고편 캡춰

행복했던 지난날이 고통스럽게 떠오르면 더욱 몸을 혹사시켜 시름을 잊어내려 안간힘을 썼다. 서투른 도끼질로 손에 물집이 잡히고, 밤이면 이름 모를 산짐승의 이동에 까맣게 밤을 지새우며 몇 달을 보낸 듯했다. 도시에서만 지내던 이디에게 대자연은 쉬이 곁을 내주지 않았고, 온갖 고생을 해가며 견뎌내고 있었다 찾아오는 이 하나 없고 혼자서 모든 것을 통제하고 절제하는 삶이 생각보다 괜찮게 흘러갔다. 그날 갑자기 나타난 곰이 집을 헤집어 놓기 전까지는.


다행히 몸은 건졌지만 그나마 챙겨온 것들이 풍비박산 났다. 해가 떨어지자 극심해지는 바람이 앞으로의 나날을 걱정스럽게 한다. 배고픔과 추위에 떨던 이디는 총을 들고 사냥을 나갔지만 허탕을 치기 일쑤였다. 자신이 살기 위해 다른 생물을 죽이는 일 따위는 하지 못하겠다는 생각이 배고픔보다 앞선다.

영화 <랜드> 예고편 캡춰

그렇게 몇 시간이나 흘렀을까. 혹독한 겨울, 결국 정신을 잃는다. 얼음장같이 꽁꽁 얼어붙은 몸, 겨우 숨만 붙어있던 이디를 찾아온 낯선 이로 인해 극적으로 구조된다.  근처를 지나던 사냥꾼 미겔(데미안 비쉬어)과 간호사 알라와(사라 던 플레지)가 이디를 살려 낸다. 빨리 병원에 가지 않으면 안 된다고 했지만, 이디는 급구 반대하며 이곳을 떠나지 않을 거라 말한다. 내가 선택해서 온 것이기 때문에 나갈 수 없다는 알 수 없는 말을 늘어놓는다. 할 수 없이 미겔이 남아 지극정성으로 돌봐주었고 차츰 회복되어 갔다.


그 후 이디는 한 뼘 더 성장하며 자연에 동화됨에 익숙해진다. 미겔은 덫 치는 법, 사냥하는 법을 가르쳐 주며 가까워지는 듯 보이지만 사람이 싫어 산속으로 온 이디는 마음의 문을 굳게 닫고 열어주지 않았다. 그렇게 2년 남짓 지난 어느 날. 미겔은 키우던 개를 맡기며 당분간 찾아오지 못할 것이라 말한다. 


상처 치유의 과정과 삶의 의미를 톺아보다

영화 <랜드> 스틸, Imdb

<랜드>는 배우로 알려진 로빈 라이트의 장편 데뷔작이다. 직접 연기와 연출을 병행하며 다재다능함을 선보였다. 2021년 선댄스 영화제 공식 초청돼 작품성까지 인정받았다. 미드 [하우스 오브 카드]와 영화 <원더 우먼>의 전사 안티오페 역으로만 기억하는 관객에게 또 다른 면을 선보이는 작품이다.


어느 곳을 특정하지 않는 제목 '랜드'는  땅이 주는 재생능력, 만물이 소생하는 생명력, 자연의 순환과 인간의 삶과 죽음과 연결돼 있음을 보여준다. 우리나라로 치면 '리틀 포레스트'지만 워낙 땅덩이가 큰 미국이 배경이라 내 집 앞이 다 텃밭인 '빅 포레스트'가 된다. 자발적 고립 시간을 가지며 자연과 교감하는 것은 미국판 [나는 자연인이다]를 연상케 하며, 절망의 끝에서 새로운 인생과 조우한 치유 메시지는 <와일드>와 접점을 보인다. 더불어 자연을 지배하려 하지 않고 순응하며 살아가야 할 이유도 빼놓지 않고 담았다.


그래서일까. 가끔 찾아오는 미겔에게 철저히 바깥세상 소식을 전하지 말라 당부한다. 이디는 오히려 군중 속에서 항상 외로움을 겪으며 힘들었다고 말한다. 과거를 논하기 보다 더 많이 알고 싶은 미래를 떠올리고 싶어 했다. 이에 동의한 미겔은 신실한 말벗이 되어주었다. 서두르지 않고, 아무것도 묻지 않고 묵묵히 의견을 존중해 준다. 

영화 <랜드> 스틸, Imdb

둘은 비슷한 상처를 보듬으며 삶의 전환점이 되어준다.  사람이 싫어서, 혼자 살아남았다는 고통에  떠나왔지만, 결국 사람으로 인해 치료하는 희망이 깊은 울림으로 다가온다. 당신 덕분에 용서받을 수 있었고, 당신 덕에 살아갈 수 있었다고 말하는 장면이 잊지 못할 벅찬 순간으로 머무는 이유다. 특히 요즘 같은 시기에 보고만 있어도 치유되는 기쁨이다. 당장 실천하지 못하더라도 스크린에서 대신 자연의 품을 확인하기에는 충분하다. 미국 북서부 산맥을 다큐멘터리처럼 담은 풍경은 호젓하고 목가적인 힐링의 시간을 선사한다. 24시간 자연 다큐멘터리가 펼쳐지는 것은 예사, 사계절이 지나가는 것만 봐도 하루가 모자랄 지경이다.  


평점: ★★★★

한줄평: 영화를 보는데 힐링이 되더라

매거진의 이전글 <모리타니안> 관타나모 수용소에서 14년을 보낸 폭로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