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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장혜령 Apr 05. 2021

<아무도 없는 곳>다섯 마음이 한데 모여 있는 이야기


영국 유학을 마치고 7년 만에 돌아온 소설가 창석(연우진)은 네 사람을 차례로 만난다. 새로운 소설을 준비하는 단계에서 계획된 사람 혹은 계획 없는 사람과 마주한다. 제일 먼저 곤히 자고 있던 미영(이지은)과 한 커피숍에서 꿈속을 걷는 듯한 대화를 나눈다. 미영은 멈출 수 없는 시간과 세상에서 사라지는 아쉬움에 달관한 듯 바삐 지나가는 커피숍 너머의 사람들을 무심히 바라본다. 꿈속을 거닐고 있는 듯 나른한 말투와 표정을 보이다 다시 잠을 청한다.     


출판사 직원이자 후배 유진(윤혜리)과는 창석의 지난 소설 이야기를 주고받는다. 한 커피숍에서 맥주를 마시다 술기운이 오르자 가볍게 산책을 하게 된다. 그러다 문득 유진의 헤어진 연인과 세상에 나오지 못한 아이 이야기를 하며 해 질 녘의 쓸쓸함을 느낀다. 어둠 속으로 홀연히 사라지고 장작 타는 소리가 들리는 담뱃불만이 컴컴한 밤을 비추는 안내자 역할을 한다.    

영화 <아무도 없는 곳> 스틸

또 다른 커피숍에서 무언가를 끄적이던 중 우연히 사진작가 성하(김성호)를 만나 지난 사연을 듣게 된다. 성하는 밝은 얼굴로 아픈 아내와 얽힌 이야기를 쏟아내는데, 믿을 수 없을 만큼 놀라운 희망에 고무되어간다. 하지만 한 통의 전화를 받고 잿빛 얼굴도 아내의 병원으로 바삐 돌아간다. 그가 정신없는 틈을 타 어렵게 공수했다는 청산가리를 창석은 슬쩍했다.     


그리고 한 술집에 들러 바텐더 주은(이주영)과 농담을 주고받는다. 주은은 오늘이 마침 근무 마지막 날이라며 술대접을 하고, 그 대가로 대뜸 이야기를 들려달라고 조른다. 창석의 이야기든 누군가의 이야기든 지어낸 이야기든 듣고 싶다고 조른다. 교통사고를 당해 기억을 잃어버려 타인의 기억이라도 심어 놓고 싶다는 이유에서다. 창석은 어릴 적 도심에서 만난 토끼 이야기를 하기 시작한다.     

영화 <아무도 없는 곳> 스틸

영화는 나이 먹는 두려움, 쓸쓸한 대화와 산책, 죽음과 상실, 서서히 사라지는 빛, 어디서부터 실화이고 허구인지 모호한 이야기를 창석과 주변 인물들로 꾸려낸다. 마치 텍스트의 장르 소설을 읽지 않고 보는 듯한 이미지 영화다. 활자와 여백이 느껴지는 영상미가 인상적이다. 관객은 전지적 작가 시점이 되어 다섯 장으로 구성된 소설을 읽는 듯한 인상을 받는다.     


상실과 슬픔을 주제로 침전하는 분위기는 빛을 최소한으로 들여 어둠에 가까워진다. '죽음'이라는 공통된 주제관이 포함된 연장선이라 봐도 좋다. 그래서 더욱 인물 각각의 사연을 집중해서 듣게 되는 묘한 끌림이 있다. 특히 네 사연 중 유독 튀는 미영의 사연은 김종관 감독의 전작 <페르소나> 중 '밤을 걷다'의 스산한 분위기를 한 번 더 어필했다.     


평소 김종관 감독이 주로 생활하는 종로를 중심으로 그려지는 탓인지 영화가 끝나고 그곳에 가고 싶다는 충동을 억제하기 쉽지 않다. 시티 커피숍, 어느 분위기 좋은 바, 낮은 산등성이, 동네 구석구석의 담벼락, 전화박스, 골목길. 쉽게 지나쳤을지 모를 공간을 재발견한다.    


영화는 김종관 감독의 영화에서 자주 선보이는 인물의 대화와 사물과 공기의 질감을 또다시 녹여낸 작품이다. 특유의 느릿한 플롯은 직관적으로 보여주기보다 비유적으로 보여주는 탓에 낯설고 비일상적이다. 차근차근 말하듯이 진행되는 영화에 빠져들다 보면 평소 빠른 템포에 힘겨웠던 마음이 쉴 수 있는 공간에 다다른다.    

영화 <아무도 없는 곳> 스틸

<최악의 하루>에서처럼 길거리를 걷고, <더 테이블>처럼 마주 보고 이야기를 나눈다. 익숙한 감독만의 표식 속에서 더욱 아스라이 느껴지는 분위기에 취하다 보면 갈아 할 곳을 잃어버릴지도 모른다. 길 잃은 이야기가 한 데 모이는 곳, 아무도 없는 것 같지만 누군가가 오길 기다리는 곳에서 당신의 이야기도 들려 들라 말하는 것 같다. 아무도 소설(가짜)을 실제로 믿지 않지만 진짜라고 믿을 만큼 집중해서 듣게 되는 이야기. 끝나지 않았으면 하는 이야기, 판타지지만 현실이라 생각하고 싶은 비현실적인 이야기의 힘을 느낄 수 있는 영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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