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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장혜령 Apr 29. 2021

<비와 당신의 이야기> 마음을 적시는 아날로그 감성영화

기적을 믿는가. 사전적 의미는 '상식으로는 생각할 수 없는 기이한 일', 또는 '신(神)'에 의하여 행해졌다고 믿는 불가사의한 현상'이라 정의한다. 절대 일어날 수 없다고 해도 끝까지 놓을 수 없는 '기적'을 우리는 늘 바라고 꿈꾼다. 따라서 '기다림의 기적'을 믿는 사람에게 희망은 좋은 연료가 된다. 희망이 있어 끝까지 버티는 것이다. 

비 오는 날이 나쁜 날이거나, 맑은 날이 좋은 날이 아니듯. 마음속 좋은 날은 모두가 다른 법이라는 말을 상기하게 만든다. 생각해 보면 매일 비가 와야 우산이 잘 팔릴 것 같지만 사람들이 우산을 쓰다 잃어버리지 않을 테니 우산 장수는 매일 비 오는 게 싫은 법이다.     

안정적인 미래 보다 당장 마음이 끌리는 대로 하던 때, 편지로 각자의 삶을 더욱 단단하게 만든다면 어떨까. 그 확신을 만나며 서로를 응원하고 꿈을 좇아 성장하는 청춘의 고민을 설득력 있게 그려낸 영화를 만났다.

좋은 날은 스스로 만들어 가는 것임을 주체적인 캐릭터로 환산하며 바보 같이 보낸 시간이 결코 무의미한 행동이 아님을 보여준다. 가능성 낮은 약속을 묵묵히 8년 동안 지키는 남자. 다소 무의미해 보일지라도 사랑에 빠진 사람에게 그 시간은 유의미한 추억으로 간직될 것이다. 연말, 같은 장소에 우산을 들고 나타나 무작정 기다림을 택한 남자에게 대체 무슨 사연이 있는 걸까.

우연히 시작된 편지   

 

영화 <비와 당신의 이야기> 스틸

서울에 사는 삼수생 영호(강하늘)는 오랜만에 초등학교 시절 좋아했던 소연(이설)을 떠올리며 수소문 끝에 편지를 보냈다. 부산에서 진로도 찾지 못한 채 엄마와 오래된 책방을 운영하는 소희(천우희)는 언니 소연에게 온 영호의 편지를 대신 받게 된다. 오랜 시간 떨어져 지내서일까. 기억이 나지 않는다는 아픈 언니 대신 답장을 보내던 소희는 영호와 이내 펜팔 친구가 된다.

두 사람은 편지를 주고받으며 몰랐던 꿈과 설렘을 찾아가고 서로에게 호감을 느끼게 된다. 영호는 사실 초등학교 운동회에서 첫눈에 반한 소연을 잊지 못하고 있었다. 어른이 되고 얼굴 한 번 보지 못한 소연을 늘 그리워했기에 새로운 인연이 다가오고 있어도 애써 밀어내기에 바빴다. 하지만 이런 자신이 답답하긴 영호도 마찬가지였다. 

영호는 소연과 질문하지 않기, 만나자고 하기 없이, 그리고 찾아오지 않기라는 규칙을 세운 탓에 자꾸만 커지는 마음을 전할 방법이 마땅치 않았다. 그렇게 어렵사리 용기를 내어 한번 만나고 싶다고 고백한 날, 소연은 일어날 가능성이 희박한 약속을 제안하며 무마한다. 12월 31일 비가 내리면 만나자는 불가능한 단서를 달고서 말이다. 과연 두 사람의 만남은 성사될 수 있을까.

사라져 가는 것들에 대하여    

영화 <비와 당신의 이야기> 스틸

영화의 주요 배경은 2000년대다. 2003년과 2011년의 8년의 간극을 메워주는 것은 마음을 적시는 아날로그 감성이다. 우리 각자의 첫사랑, 찬란했던 20대로 돌아가게 만들 타임머신이 되어준다. 당시를 살았다면 공감하고 반가웠을 소품이 등장할 때마다 추억 속에 잠길 수밖에 없다. 손수건, 빨간 우체통, 가로본능 휴대폰, LP 판, 헌책방, 암호 편지 등이 그 주인공이다. 소희와 영호 외의 또 다른 주인공이 되어주는 아날로그 라떼들이 있어 영화가 더욱 풍성해진다. 

또한 영화 속 중요 공간이라 할 수 있는 책방과 공방도 빠르고 화려해지는 세상 속 사라져 가는 것 중 하나다. 낡은 책을 취급하는 책방과 손수 우산을 만들어 파는 공방은 느림의 미학을 실천하고, 아쉬움을 붙잡아 두는 따스한 공간이다. 실제로 동네 책방, 헌책방은 그 존재를 손에 꼽을 정도로 없어졌고, 이제 우산을 고쳐 쓰는 일은 잘 없기에 길거리에 우산 장수는 희귀한 존재가 되어버린 지 오래다. 

생각하면 아련하고 하염없이 그리워지는 뭉클함이 스치듯 지나간다. 스마트폰, 이메일, SNS가 생기며 손으로 편지를 쓰고 우표를 붙여 주고받는 방식은 별난 일이 되어버렸다. 받을 사람을 생각하며 한 글자씩 꾹꾹 눌러쓰고, 하려던 말이 꼬이면 처음부터 다시 써 내려가고, 상대방과의 거리만큼 편지를 부치고 받는 시간까지 설레던 시간. 그 기다림을 겪었던 세대라면 충분한 공감을, 겪지 않은 세대라면 레트로 감성의 느낄 수 있는 신선함으로 다가온다. 

각자의 빛나는 청춘을 소환    

영화 <비와 당신의 이야기> 스틸

두 배우의 케미와 호흡도 청춘 영화의 계보를 잇기 충분하다. 군대 제대 후 첫 스크린 복귀작에서 강하늘은 폭넓은 연기 경력을 바탕으로 자신만의 청춘을 그려냈다. 도무지 내가 가는 길이 맞는지, 잘하고 있는지, 알 수 없어 불안한 미래를 겪었던 젊은 날의 자화상을 포착했다. 천우희 또한 그동안 센 역할을 소화하느라 힘들었을 과거에서 벗어나 힘을 빼고 원래 자기 옷을 입은 듯 자연스러운 연기로 사랑스러움을 보탠다. 

기본적으로 모든 영화는 불가능한 일, 말도 안 되는 상황 투성이다. 따라서 영화를 본다는 행위는 일종의 판타지를 즐기는 작업이라 할 수 있다. 가능성이 매우 낮은 것을 기다리는 시간 동안 진짜로 일어날지도 모를 기적을 잠시나마 꿈꾸는 대리만족의 예술인 것이다.    


그래서일까. 90년대 영화 <접속>, <8월의 크리스마스>가 떠오르는 서정적이고 감성적인 분위기다. 다시는 오지 않을 청춘을 인화된 사진처럼 박제했다. 메마른 감성을 촉촉이 적시고 기적을 기다리며 사라져가는 것들에 대해 아쉬움을 토로한다. 다가오는 찬란한 봄날, 바쁜 일상에 지나쳐 버렸던 짧은 봄날을 오랫동안 스크린에서 만끽할 수 있을 것으로 예상한다. 오랜만에 누군가를 향한 긴 편지를 쓰고 싶어지는 영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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