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9년 미국 로스앤젤레스의 한 음악 케이블 방송국. 이곳에서 몇 년째 보조로 일하고 있는 애나(엘르 로레인)는 스타 VJ를 꿈꾼다. 하지만 볼품없는 곱슬머리 때문에 실력을 인정받을 기회조차 무시당하기 일쑤였다. 쥐꼬리만 한 월급을 받으며 일하던 애나는 이번에는 꼭 승진 시켜 준다는 상사 에드나(주디스 스콧)의 말만 믿고 버티던 중이었다.
그러나 불운은 예고도 없이 한꺼번에 일어났다. 새로운 아이디어를 썸 타던 줄리어스(제이 파로아)에게 뺏기다시피 했던 것도 모자라 갑작스러운 이별 통보에 정신이 혼미해졌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믿고 따르던 에드나 대신 조라(바네사 윌리암스)가 부임하면서 꿈꿔오던 승진도 날아갈 위기에 처하지만, 가까스로 프로그램 아이디어를 짜내 조라의 신임을 얻는다.
이런 애나가 마음에 든 조라는 내 사람은 뭐든 완벽해야 한다며 '버지 살롱'에서 헤어스타일을 바꿀 것을 권유한다. 조라의 소개로 전설의 미용사(래번 콕스)를 만나 찰랑거리는 머릿결로 다시 태어난 애나. 다음 날, 몰라보게 달라진 외모에 만족하며 회사 사람들의 시선을 즐기다 보니 업무에 자동으로 탄력이 붙는다. 그렇게 애나는 승승장구하며 직장에서 선망의 대상이 되어간다.
하지만 꿈에서나 그리던 외모를 얻은 기쁨도 잠시, 관리에 어려움이 따르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두피에 인조 머리카락을 꿰맨 탓에 극심한 고통과 불편을 감수해야만 했던 것. 미용실에서 일러준 대로 하루에 두 번 이상 반드시 전용 에센스를 바르고, 물에 젖지 않게 주의사항을 꼼꼼히 실천했지만. 어째서인지 점점 더 조여오는 고통과 허기지는 굶주림에 일상생활에 지장을 받게 된다.
애나는 예뻐질 수 있다는 유혹에 억지로 참기로 결심한다. 하지만 자신도 모르게 정신을 잃거나, 환영과 환청에 시달리자 무언가가 잘못되었음을 인지한다. 결국, 머리카락이 스스로 움직여 사람을 헤치고 피를 갈구하는 사실을 알게 되고 머리카락의 저주에서 벗어나기 위해 고군분투한다.
시대적, 문화적 맥락으로 읽는 흑인 역사
영화는 80년대 후반 뉴 잭 스윙이 유행하고 흑인 음악이 대중적인 인기를 끌던 때를 배경으로 한다. 80년부터 90년대 초반까지 사람들은 더 크고, 화려하고, 아름다운 것을 추구하는데 열 올렸고 이에 따른 소비력도 왕성했었다. 공포영화이기 이전에 음악 산업, 케이블 TV의 급성장과 팝 문화 절정기를 한눈에 알 수 있는 흑인 역사의 일부이기도 하다. 이를 반영해 당시 유행하던 패션과 소품, 헤어스타일은 물론, 케이블 음악 프로그램의 VJ와 뮤직비디오 등. 복고풍 향수와 생활 공포를 결합한 신선한 재미를 선사한다.
백인 문화를 동경하는 여성이란 설정은 직장 내 '차별'에 관한 새로운 해석을 끌어낸다. 제목 '배드 헤어(bad hair)는 타고난 곱슬머리를 뜻하지만, 인종 및 성차별을 겪는 애나의 이중고를 지칭하기도 한다. 영화 속에서 유행하고 있는 '꿰맨 머리'는 자연을 거스르는 태도이자, 야망 앞에서 물불 가리지 않는 집착이 불러온 섬뜩한 파멸을 예고하고 있다. 또한 흑인 노예의 잔인했던 역사는 잊은 채 서구인의 광기까지 세뇌당한 애나는 미국에서 흑인으로 사는 공포를 나타내는 구심점이 된다.
<배드 헤어>는 <겟 아웃>을 잇는 블랙 호러이자 미국판 <기기괴괴 성형수>로 불린다. 예뻐지고 싶고, 성공하고 싶은 욕망을 헤어스타일에 빗대 외모와 권력 사이의 상관관계를 조명하고 있다. 호러 장르 속에 정치, 문화, 사회적 현상과 메시지를 함의하며 흑인이 주요 인물로 등장하는 '블랙 무비'의 계보를 이어가는 영화다.
연출자 저스틴 시미언 감독은 전작 <캠퍼스 오바마 전쟁>으로 제30회 선댄스영화제 심사위원 특별상을 받았으며, <배드 헤어>까지 제36회 선댄스 영화제에 공개되며 화제를 모은 인물이다. 2021년 제22회 전주국제영화제 불멸의 밤 부분에 초청되며 블랙 호러 무비의 저력을 과시하고 나섰다.
그밖에 저예산으로 제작된 신인 감독의 영화임에도 데스티니 차일드의 멤버 켈리 롤랜드, 어셔, 바네사 윌리엄스 같은 정상급 뮤지션이 출연해 그들을 찾는 재미도 더했다. 공포 영화답지 않게 B급 유머의 타이밍도 균형 있게 활용하며 현재 유행하고 있는 뉴트로 스타일과 함께 그때 그 시절 추억과 향수를 불러내기도 한다. 독특한 취향으로 똘똘 뭉친 공포를 원하는 관객에게 참신한 장르적 쾌감을 선사할 것으로 기대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