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민은 호기심 많고 순수하며, 온순하지만 제2차 세계대전을 겪은 토베 얀손의 개인적인 경험을 녹여낸 어두운 캐릭터다. 모험을 즐기며 혼자 있기를 싫어하는 성격이 토베 자신을 투영했다고 알려져 있다. 몇 년 전 무민 전시회나 무민 카페도 다녀오고 책과 굿즈도 모을 만큼 빠져있었다. 북유럽 특유의 감성을 좋아하면서도 거절하지 못하는 성격의 무민과 닮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래서일까. 전쟁을 겪으며 성차별과 생계 걱정, 뼈아픈 사랑을 겪었던 여성 창작자 토베의 전기 영화를 손꼽아 기다렸는지도 모르겠다.
<토베 얀손>은 무민 작가로 불렸던 예술가의 삶에 깊이 들어가 그 진폭을 경험하는 영화다. 토베(알마 포이스티)가 무민으로 막 명성을 얻으며 성공 가도를 달리던 1944년부터 약 10년간을 다루고 있다. 영화는 토베의 일생 중 30대에서 40대까지를 다루고 있다.
전반적인 구성이 <헬렌: 내 영혼의 자화상>과 <비커밍 아스트리드>와 비슷하다. 헬렌 쉐르벡(핀란드)과 아스트리드 린드그렌(스웨덴) 모두 같은 시대를 살았다. 북유럽, 여성, 전후 시대라는 점이 공통점이 있다. 지금은 잘 상상이 가지 않지만, 북유럽의 여권신장이 생각보다 오래되지 않았다는 점을 말해준다. 여성 예술가이면서 토베는 성소수자였다. 제약과 금기로 가득 찬 세상에서 개인의 자유와 세상의 행복을 꿈꿨다.
영화는 레즈비언의 삶과 사랑, 예술적 갈등이 소구점이다. 토베의 약혼자이자 물심양면으로 지원해 주는 아토스 비르타넨(샨티 로니)와 연인 관계였던 일화도 비중 있게 다룬다. 토베와 아토스의 관계는 비비카가 남편이란 바람막이를 두고 사회적 통념을 피해 살아갈 수밖에 없었던 것처럼, 여성의 고된 입장을 대면하고 있다. 아버지, 남편에게 종속된 딸, 아내의 자리를 요구하는 권위에 도전한 여성의 일과 사랑을 심도 있게 구성했다.
전기 영화지만 출생부터 사망까지 연대기식으로 구성하지 않아 담백하다. 실존 인물을 영웅시하거나 우상화하지 않고 한 개인으로 바라봤다. 상처, 실패, 시련, 환희 등 다양한 감정을 가진 인간임을 직시했다. 토베는 유명 조각가인 아버지 빅토르 얀손(로버트 엥켈) 밑에서 그림을 그렸지만 인정받지 못해 고군분투했다. 유명한 아버지를 유일한 오점이라고 말하는 장면처럼, 순수 미술을 하고 싶었지만 그러지 못해 혼란스러운 정체성도 드러난다. 예술과 생계라는 떼려야 뗄 수 없는 두 가지 문제점을 안은 채 고뇌하는 예술가의 과정이 거침없이 투영되었다.
첫눈에 반한 부르주아 팜므파탈 비비카(크리스티나 쇼코넨)와의 사랑으로 격렬하게 흔들리고 찬란하게 성장한다. 그녀를 통한 영감과 응원, 질투 등에 힘입어 무민이란 캐릭터를 체계화했다. 연극 연출가였던 비비카를 통해 무민의 이야기를 연극 무대에 올리고 유명해진다. 반면, 토베의 평생 반려자 툴리키(요안나 하르티)는 후반부에 등장해 짧지만 굵은 존재감을 과시했다.
때문에 실존 인물과의 싱크로율이 상당하다. 실제 토베보다 좀 더 귀엽고 사랑스러운 외모의 배우 '알마 포이스티'로 캐스팅했다. 토베 인생에서 가장 뜨거웠고 빛났던 시절을 재현하기에 안성맞춤이다. 상대 배우 비비카를 연기한 '크리스티나 쇼코넨'의 색다른 매력이 돋보였다. 토베를 사랑하지만 가질 수 없는 신비로운 인물 토베의 예술적 기질을 알아봐 주고, 북돋아 주며, 지지하지만, 함께 할 수 없었던 인물이다.
토베의 조각상이 있는 방도 완벽 재현했다. 스산하고 외로운 무민을 방공호에서 끄적이던 드로잉도 인상적이다. 시청 코스프레 벽화, 갸름의 히틀러 풍자만화, 무민 연극 장면, 영국 '이브닝 뉴스'에 무민 7년 연재 계약 장면 등 고증에 힘을 주었다. 특히 <여인의 향기>에서 탱고 추는 장면에 삽입된 카를로스 가르델의 ‘Por Una Cabeza’가 변주돼 귓가를 간질인다. 무엇보다 2021년 서울국제여성영화제 개막작으로 선정된 이유와 맞물린다. 올해 캐치플레이는'여성의 눈으로 세계를 보자'였다.
덧붙이자면, 무민은 전쟁의 상흔은 잊고 모험을 떠나고 싶은 토베 자신을 투영한 캐릭터다. 무민 시리즈의 유일한 인간인 '스너프킨'은 '아토스'에서 영감받았다. 챙 넓은 모자와 담배 파이프를 물고 다니며 우정을 나누는 평생 친구다. 또 다른 캐릭터 '토프슬란'과 '비프슬란'은 토베와 '비비카'를 형상화했다. 둘만이 알아들을 수 있는 언어로 이야기하길 좋아하고 쌍둥이처럼 매일 붙어 다닌다. 그리고 죽을 때까지 함께 한 평생 연인 툴리키는 '투티키'가 되어 많은 사랑을 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