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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장혜령 Sep 21. 2021

<캔디맨>그자의 이름을 다섯 번 부르지 마라

어릴 적 학교나 동네에는 늘 괴담이 존재했다. 홍콩할매귀신, 빨간 마스크, 빨간 휴지와 파란 휴지 등 등골을 서늘하게 했던 도시 전설은 학교나 동네 골목을 무섭게 했다. 비록 카더라 통신이지만 나름의 신빙성을 지니며 꾸준히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렸다. 전설이나 괴담의 속성은 사람들의 공포심을 유발해 계속해서 전해져야 비로소 생명력을 얻게 된다. 그렇다면 여기저기서 살이 붙거나 빠지면서 오랜 세월 떠돌게 된 괴담은 어떻게 만들어 질까. 누가 시작했을까. 영화는 도시의 괴담이 어떻게 만들어져 전설이 되는지를 주목한다.     


비주얼 아티스트인 안소니(야히아 압둘 마틴 2세)는 새 작품의 영감을 캔디맨에서 찾게 된다. 안소니는 여자친구이자 잘나가는 큐레이터인 그리아나(티요나 패리스) 덕분에 그룹전에 낄 수 있었다. 내심 스스로 작가적 명성을 쌓고 싶어 했기에 이번 기회에 캔디맨 시리즈로 성공하고자 다짐한다. 안소니는 캔디맨 괴담을 추적하며 다가가던 중 믿을 수 없는 충격적인 비밀을 알게 된다.     

영화 <캔디맨> 스틸컷

<캔디맨>은 클라이브 바커의 동명 소설을 원작으로 1993년 버나드 로즈 감독 연출로 만들어졌다. 과거 희생양으로만 등장했던 흑인을 주체적인 살인마로 내세운 기념비적인 영화다. 30여 년 만에 <겟 아웃>, <어스>로 대중과 평단의 호평을 받은 조던 필 감독이 원작을 바탕으로 새롭게 각본을 쓰며 제작에 참여했다. 13살 때 처음 오리지널 스토리를 접했던 공포심과 팬심을 듬뿍 담아 재해석했다.    


직접 연출하지 않고 <더 마블스>의 감독인 니아 다코스타를 내세워 미학적인 부분에 신경 쓴 흔적이 보인다. 흑인 아티스트의 세계를 들여다보면서도 빈민가이자 우범지역이었던 시카고 '카브리니 그린'의 슬프면서도 기이한 역사를 포괄했다. 인종차별, 젠트리피케이션 등 현재까지 이어지고 있는 사회적인 문제까지. 단순한 공포 영화 이상의 메시지를 부여한 아트 영화로 확장했다.     


오프닝부터 인상적이다. 원작의 오마주라 할 만한 미장센을 선보인다. 제작사 로고부터 거울에 반사된 대칭적인 이미지로 시선을 사로잡는다. 거꾸로 솟은 빌딩 숲은 훑으며 전복된 시각을 유지한다. 글씨는 거울을 대고 봐야 똑바로 보이도록 뒤집혀 있고, 도시 전체를 뒤집힌 화면으로 잡아 마천루가 하늘에서 땅으로 떨어질 듯하다. 


원작에서는 항공샷으로 도심으로 들어가는 고속도로 위의 자동차가 벌떼의 형상처럼 보인다. 원작에 비해 더욱 패셔너블해진 캔디맨은 노랑과 검은색을 매칭해 꿀벌을 떠올리는 비주얼로 사로잡는다. 환 공포증을 유발하는 온몸의 구멍도 벌집의 기괴한 형상으로 승화되었다. 끔찍한 살인 현장에 벌떼처럼 모여드는 백인 경찰의 형상도 캔디맨 전설을 뒷받침한다.



영화 <캔디맨> 스틸컷

<캔디맨>(1993)과 이어지는 유니버스 구축에 힘쓴 흔적이 보인다. 전 작의 헬렌과 1대 캔디맨(토니 토드), 앤 마리(바네사 윌리엄스)까지 등장해 리부트를 완성했다. 도시 괴담을 논문 주제로 삼았던 대학원생 헬렌(버지니아 매드슨)의 전사를 그림자 연극으로 자세히 설명한다. 실제 장면을 보여주지 않지만 음산한 분위기로 더욱 기괴함을 형성한다. 전편을 보지 않은 관객을 자연스럽게 끌어들이려는 시도다. 30년 이후의 이야기인 영화는 슬럼 지역이 재개발로 부촌이 되었다는 설정이다. 빈민가의 이미지가 지워지면서 캔디맨 괴담도 사라져 버렸다. 하지만 다시 괴담은 시작되고, 도시의 핏빛 행진도 멈출 줄 모른다. 


캔디맨은 본질적으로 도시 괴담이다. 거울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보고 미지의 존재 캔디맨을 다섯 번 외치면 소환된다. 오른손에 달린 갈고리로 잔혹한 짓을 저지르는 두려움의 대상이다. 1890년대 남북전쟁 시기의 1대 캔디맨의 억울한 분노가 해소되지 않고 사람들을 해친다. 해를 거듭해 희생된 흑인들의 역사가 고스란히 쌓여 현대의 캔디맨으로 만들어졌다.     


원래 노예 출신이었던 아버지가 신발 공장으로 부를 축적하며 엘리트 교육을 받으며 성장한 다니엘이란 남자다. 그림에 소질이 있어 부유층의 초상화를 그려주기도 했는데, 한 지주의 딸과 사랑에 빠져 임신까지 하게 된다. 이를 알게 된 지주는 캔디맨을 죽이라고 사주하고, 쫓기다가 카브리니 그린까지 도망하게 된다. 결국 오른손이 잘려 갈고리가 끼워지고, 근처 양봉장에 나체로 내던져서 벌에 쏘여 죽게 된다. 지주는 시체를 불태워 카브리니 그린에 뿌렸고 캔디맨의 억울한 원혼은 지역에 깊숙하게 뿌리내리게 된다.     


이후 헬렌이 캔디맨을 믿지 않자 희생양이 되어 존재를 과시하고 싶은 캔디맨이 그녀를 괴롭힌다. 캔디맨 스스로 사람들의 기억에서 잊히고 싶지 않아, 끊임없이 살인을 저질러 두려움을 양산하고 있다. 괴담에서 전설을 넘어 신이 되고자 했던 미스터리한 존재의 기원이다. 엘리트 백인 여성이 가난한 흑인 사회에 들어와 오랫동안 받아온 억압과 차별, 불안을 겪으며 사회의 진동을 유발하게 된다.    

영화 <캔디맨> 스틸컷

이 괴담은 백인이 만들어낸 인종차별적 행동의 기원이라고 할 수도 있으며, 도시 사회에 대한 두려움이 반영된 존재다. 빈민가 사람들은 비루한 처지를 비관할 대상을 캔디맨에서 찾기도 했다. 믿음을 의심하는 자에게 나타나 잔혹하게 해코지한 뒤, 기억 속 두려움을 먹고 영원히 살아가고 싶은 관종의 또 다른 형태로도 해석된다. 따라서 <캔디맨>은 시공간을 떠나 계속해서 돌고 도는 도시 전설이 어떻게 만들어지고 사장되는지를 담은 교본이라 볼 수 있다. 언제 어디서 또 다른 캔디맨이 등장할지 아무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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