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장혜령 Apr 14. 2022

<소설가의 영화> 많이 밝아진 홍상수스타일의 진화


소설가 준희(이혜영)가 오랫동안 글을 쓰지 못해 괴로워하다 잠적한 후배를 찾아 나섰다. 서울 근교에 작은 서점을 하는 후배 세원(서영화)을 보러 왔다가 다양한 사람을 만나며 관계를 쌓게 된다. 세원이 소개해 준 동네 타워에 올라 전망을 관찰하던 중 알은체하는 영화감독의 아내를 만나 그간 소식을 전해준다. 이야기가 길어지자 자리를 옮겨 본격적인 근황을 묻고 답하지만 이야기가 계속 겉돌기만 한다. 세 사람은 관계는 그리 유쾌하지 않아 보인다. 자꾸만 삐걱거리고 내내 불안하다.     


하지만 이유라도 있는 듯 영화감독 효진(권해효)과 아내 양주(조윤희)는 어색한 대화를 거듭 이어갔다. 사실 소설가는 감독과 영화 작업이 엎어져 몹시 불편한 사이가 된 지 오래다. 그런데도 꿋꿋하게 부부는 대화를 시도했고 언젠가는 풀고 가야 한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영화 <소설가의 영화> 스틸컷

타워에서 내려다본 공원을 걷고 싶다는 소설가의 말에 차로 이동해 산책을 하려는 찰나. 요즘 활동이 뜸한 배우 길수(김민희)를 만난다. 길수는 좋아하는 소설가를 만나 반가웠지만 아까운 재능을 낭비하지 말라는 감독 말에 살짝 감정이 상하려 한다. 


이를 눈치챈 소설가는 마치 자신에게 하는 말처럼 들렸는지 분위기를 싸하게 만들 정도로 감독을 면박 준다. 이후로 부부는 기분이 상해 퇴장하고 배우와 소설가는 시시콜콜한 대화를 나누다 감독 지망생이자 길수의 조카 경우(하성국)를 만나 이야기꽃을 피운다.     


소설가는 대뜸 공원에서 만난 배우와 감독 지망생에게 즉흥적으로 단편영화를 만들자며 부추긴다. 배우의 오랜 팬이었다며 함께 영화해 보지 않겠냐고 말이다. 시나리오는 쓰지 않았지만 출연 승낙을 받으면 금방 쓸 수 있다고 자부한다. 소설가는 이번에는 반드시 욕망을 이루어보겠다는 의지가 가득해 보인다. 누구보다 확고한 철학과 예술혼으로 열정을 갈아 넣을 것을 확신한다. 자리를 옮겨 다시 책방에 당도해 술자리가 이어졌다. 몇 달 뒤 47분가량의 단편이 드디어 완성되었다.     


누구보다도 마음 맞는 사람끼리 만나 즐겁게 만든 영화의 시사회 날. 지인의 도움으로 작은 영화관에서 영화를 보러 온 배우와 마주친 소설가. 배우를 홀로 들여보내고 옥상에서 초초하게 기다리기만 한다. 과연 어떤 영화가 탄생했을까?     


항상 같아 보이지만 매번 다른 홍상수 영화     
영화 <소설가의 영화> 스틸컷

27번째 홍상수의 영화답게 정해진 것보다 자연의 섭리처럼 즉흥적이며 우연한 만남과 결과가 계속된다. 한 도시에서 벌어진 반나절의 시간 동안 누군가를 만나고 헤어지는, 별거 아닌 사소함도 특별하게 만드는 마법 같은 이야기다. 그냥 그날은 이상한 날인 거다. 아는 사람을 우연히 거듭해서 만나게 되면서 꼬인 관계가 풀어지기도 하고, 더 꼬이기도 한다.     


2021년 3월부터 한국에서 2주 동안 촬영된 흑백 영화다. 각본, 촬영, 편집, 음악까지 혼자 담당했다. 조명 스탭이 없어 노출이 맞지 않아 배경이 날아가 있거나 포커스가 나가 있는 화면이다. 하지만 오히려 인물들은 명확해졌고, 표정과 몸짓 하나까지 온전히 집중할 수 있는 효과를 낸다.          


제72회 베를린 국제 영화제에서 은곰상인 심사위원대상을 받았다. 소감으로 한동안 흑백영화를 찍지 않았는데 이 영화는 흑백에 잘 어울린다고 생각해 결정했다고 답했다. 흑백영화를 좋아하지만. 관객이 영화를 볼 때 사실에 의존하는 경향이 있을 것 같아 조심했다며, 이제는 신경 쓰지 않고 찍어 보자고 생각한 결과치가 <소설가의 영화>라고 말을 이었다.     

영화 <소설가의 영화> 스틸컷

마치 극 중 소설가가 더 이상 글을 쓰지 않고 영화를 만든 것과 비슷하다. 내면의 무언가가 바뀐 순간을 놓치지 않고 영화로 담았다고 볼 수 있겠다. 눈에 보이지 않는 감정, 분위기, 아우라 같은 것들을 투영했다. 소설가는 홍상수 자신의 분신처럼 행동하고 말한다. 일과 작업, 삶에 대한 자기 변론이다. 유명인으로 사는 게 피곤해졌다는 준희의 입을 통해 작은 것도 부풀려야 하는 상황에 이력이 났고 영감도 떠오르지 않아 괴롭다고 말한다. 이제는 모두 잠시 접고 나답게 살고 싶다고 말이다. 소설가, 배우, 감독 모두가 조금씩 홍상수의 모습을 하고 있다.     


이러한 기시감은 이혜영 배우의 카리스마 있는 연기력으로 끌고 간다. 자기복제라는 말을 들어온 홍상수 영화에 방점을 찍는 신의 한수다. 그와 <당신 얼굴 앞에서>부터 작업한 이혜영의 분위기가 영화를 더 특별하게 만들어 준다. 냉소적인 시선은 거두고 경쾌한 풍자를 품은 홍상수의 변화를 맞이하는 즐거움이 무엇보다 크다.                              


매거진의 이전글 <공기살인>피해자는 있는데 가해자는 없는 살인 사건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