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장혜령 Jun 08. 2022

<매스> 살인자를 키웠다는 말을 들어야 했던 부모

엉망진창인 마음, 어떻게 정리해야 좋을까. 제목 MASS가 주는 부정확하고 큰 덩어리의 혼란스러움과 무게가 느껴지는 제목이다. 네명의 대화를 통해 흩어진 마음 가닥을 잡아가는 시간이다. 프란 크랜즈 감독은 2018년 17명의 사망자를 낳은 파크랜드 고교 총기 사건 뉴스를 보고 영감받아 <매스>를 완성했다. 자연스럽게 1999년 콜럼바인 고교 총기 난사 사건이 떠올랐다. 사건의 가해자의 부모가 쓴 《나는 가해자의 엄마입니다》와 여러 책과 다큐멘터리를 참고했다고도 밝혔다.     

그중 가해자와 피해자의 부모 만남이 비영리 단체를 통해 있었으며 허심탄회하게 대화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모든 비난의 화살을 받고 죄인이 가해자 부모의 목소리를 듣고 싶어졌다.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을 테지만 작은 목소리에 귀 기울여 보기로 했다. 그들은 무슨 이야기를 하고 싶었을까.     


《나는 가해자의 엄마입니다》를 몇 해 전 접했던 필자는 충격에 사로잡혔다. 많은 사상자를 내고 스스로 목숨을 끊었던 가해쪽 엄마의 말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사랑스러운 아이를 잘 알지 못했던 내 잘못임을 인지하고 속죄하며 살아갈 것을, 그리고 이와 같은 일이 반복되지 않기 위해 이 책을 썼노라는 참회였다.     

영화 <매스> 스틸컷

대체 어디서부터 잘못 된 걸까. 부모의 가장 큰 잘 못 중 하나라면 내 속으로 낳은 자식을 세상 누구보다 잘 안다는 착각이다. 행여 부모라 해도 자식을 다 알 수 없고 부모와 자식은 서로 다른 인격체로 봐야한다. 히틀러의 어머니도 세상에서 가장 사랑스러운 아기였을 테니까.     


<매스>는 마음이 답답하다 못해 착잡해지는 영화다. 조용하고 한적한 교회에서 네 사람이 심각한 주제로 예민한 이야기를 나눈다. 무거운 주제는 입 밖에 내기도 어렵다. 누구 하나 선뜻 화제로 올리지 못하고 빙빙돈다. 그저 말을 쏟아내면 사라져버릴까 봐 삭히고, 속 시원해질 수 있을까 싶어 퍼붓고만 싶다. 슬픔, 절망, 후회, 그리움, 책임감, 자책 등 오만가지 생각이 들어 쉽게 꺼내지 못하고 맴돈다.     


총기 사고로 죽은 두 아이의 부모가 한자리에 모였다. 듣기만 해도 어떤 위로와 말을 꺼내야 할지 가늠이 가지 않는다. 돌이킬 수 없는 사고는 일어났고 아이들은 돌아오지 않는다. 한쪽은 피해자이고 한쪽은 가해자이다. 때린 놈은 다리 못 뻗고 자도 맞은 놈은 다리 뻗고 잔다는 속담이 떠오른다. 두 입장을 듣다 보니 조금 다른 시선이 필요해 보인다. 부모가 기억을 거슬러 천천히 복기하는 내 아이를 함께 떠올려 보는 시간이다. 과연 관객이 동참할 수 있을지 궁금해진다.    

 

"살인자를 키우셨잖아요..."     

영화 <매스> 스틸컷

영화는 6년 전 동시에 자녀를 잃은 2쌍의 부부가 한 테이블에서 나누는 대화다. 아이를 잃었다는 공통점이 있지만 가해자와 피해자로 명확히 구분되어 있다. 어색하고 긴장감이 흐르는 날 선 자리다. 처음에는 어떤 말을 해야 할지 입을 떼기 어려웠지만 자식에 대한 추억을 공유하며 그날에 다가간다. 대화는 중구난방이다. 이 자리에 오기까지 용기를 내어야 했다. 결혼생활도 무너지고 있었다. 만남에 절박한 쪽은 오히려 피해자일지도 모른다. 흩어져 있던 유리 조각을 조금씩 주워 담는 것처럼 서서히 맞춰 나가야만 한다.     


처음에는 한적한 교회에 모인 4명의 사람이 어떤 의도로 만나는지 관객은 알 수 없다. 30여분 동안 교회의 평화로운 오후를 내내 보여주기 때문이다. 참석자들의 관계가 불편하다는 점만 살짝 인지하도록 했다. 대화가 시작되고 일정 시간이 흐르면 사건의 실체를 마주하고 무거운 실내 분위기에 잠식당하고야 만다. 빠져나가지 못한 감옥에 갇힌듯 무기력하다.     


"저도.. 사실 아이가 무서웠어요"     

영화 <매스> 스틸컷

가해자 엄마는 어두운 면을 미리 알았다면 막을 수 있었을까 자책한다. 사랑으로 키운 아이가 괴물이 되어갈 동안 뭐 했는지 모르겠다며 회의감도 든다. 하지만 너무 늦었다.죄를 지었지만 내 아이도 죽었다는 자명한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 부모에게 자식의 죽음은 절망 그 자체다.     


미움과 사랑은 늘 같이 움직인다. 깊이 속죄하면서도 사랑을 버릴 수 없는 양가적 감정. 책임을 회피하고 부정하려는 게 아니다. 나도 무서웠지만 사랑으로 용기 내어 고백해 본다. 피해자 쪽 부모에게 감히 용서를 구하려는 행동이 아니다. 서로의 멍울을 함께 보고 진심으로 치료하려는 목적이 드디어 드러난다.     


용서와 화해를 예상했다면 의도가 흐려지고, 없어진 슬픔을 공감하고 위로하는 쪽으로 기운다. 이미 벌어진 일을 향한 후회보다 앞으로의 삶을 응원하는 태도다. 오히려 절절하다기보다 담백해서 여운이 짙어진다. 아무리 마음의 준비를 해도 어지러워지는 상황을 담담히 다가서는 연출이 결국 빛을 발한다. 관객은 충분히 설득당했고 공감할 수 있었다.               


매거진의 이전글 <카시오페아> 30년 만에 쓰는 아빠의 육아 일기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