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명을 판단하기엔 우리는 무지하다.
혹시 그런경험 있지 않나요? 예를 들어, 어떤 사람이 너무 싫어 할 수 있는 모든 방법을 다 동원해봤지만, 결국 그 사람보다 더 싫어하는 사람을 만난 경우 말입니다. 이같은 사례는 잘 생각해보면 누구나 한두번은 있는 것 같습니다. 그렇다면 무엇이 우리를 그러한 결과로(사람에게) ‘인도’했을까요? 그것이 바로 운명일까요? 거기엔 수많은 ‘우연’이 존재합니다. 예를 들어 길을 가다가 물웅덩이를 피하려고 점프를 했는데 강아지똥을 밟았다고 생각해봅시다. 그러기 위해선 웅덩이가 파일 수 있게 유독 그 부위가 침식과 부식이 많이 됐어야 했고, 하필이면 제가 외출하는 날 게다가 그 길을 걷기 전에 비가 왔어야 했습니다. 비가 오려면 또 얼마나 많은 요인이 작용합니까? 비가 온다고 해도 오지 않는 경우도 있는데 말입니다. 게다가 비슷한 시간대에 한 도덕심 부족한 견주가 강아지 똥을 제대로 치우지 않았어야 합니다. 어쩌면 그 견주는 매일 배변봉투를 챙기다가, 마침 오늘 챙기지 않았고 곧장 집으로 가 배변봉투를 가지고 나오는 중이였을수 도 있습니다. 이것은 운명이 아닐까요? 사실 우리 인간은 운명이라는 의미있는 단어를 붙이고 싶은 상황에 붙이는 경향이 있긴 합니다. 하지만 운명이 있고 없고와 무관하게 우리는 현실이라는 결과를 마주합니다. 이처럼 무수히 많은 확률이 만나 이루어진 결과 말입니다. 그것을 ‘운명’이라는 말로 부를지, 확률이라는 말로 부를지는 ‘이미 정해져있는가’의 차이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그것을 알 수 있는 방법이 없습니다. 전능한 누군가가 운명이 적힌 책을 우리에게 주지 않는다면 말이죠. (만약 그렇다면 그 책과 우리를 비교하며, ‘와 정말 운명대로 되는구나!’ 라고 할 수 있겠죠) (혹은 운명이 두려워 피해갈 수도 있지만요. 피할 수 있다면 운명이 아닐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운명일지도 혹은 수많은 확률의 결과일지도 모를 현실을 어떻게 마주해야 할까요? 제가 이 질문을 처음하게 된 건 오래전입니다. 저는 뭐든 완벽한 플랜을 원했습니다. 어떻게 하면 행복한 삶을 살지에 대해 완벽한 플랜을 세우고 싶었고, 그러기 위해 노력했습니다. 하지만 삶에는 수많은 변수가 있고, ‘행복’의 기준도 주관적이고 모호할 뿐더러, 지금 제가 생각하는 행복과 미래의 내가 생각하는 행복이 다를 가능성도 있습니다. 저는 오래된 여자친구와 결혼을 얘기하기도 합니다. 어떤 결혼이 행복한 결혼일까요? 제가 고려하는 많은 것들은 어디까지나 ‘가능성’의 영역입니다. 적어도 말이 통하는 사람. 경제관념이 비슷한 사람 등등, 하지만 어떤 삶이 행복한 삶이고, 어떤 결혼이 행복한 결혼인가는 ‘마음’에 달려있는 것 같습니다. 이 무슨 고리타분한 이야기냐구요?
마음이란 운명, 즉 나에게 다가온 현실을 마주하는 태도와 관련된 문제입니다. ‘테헤란에서의 죽음’이라는 이야기에 죽음의 신을 만난 하인은 그로부터 도망친다며 주인에게 부탁해, 멀리 떨어진 마을 테헤란까지 가장 빠른 말을 타고 도망갔습니다. 하지만 주인을 마주한 죽음의 신은 ‘그를 오늘밤에 테헤란에서 보기로 했는데, 여기 있어 놀라움을 나타냈을 뿐’이라 했습니다. 하인은 자신의 운명을 피하고자 했지만, 가장 빠른 속도로 자신의 운명과 부딪힌 셈이 됐습니다.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에서는 이런 구절이 나옵니다. ‘인간은 한번밖에 살지 못하기 때문에 자신의 감정에 따른 결정이 옳은지 판단할 수 없다’ 저는 이 구절을 조금 확대해 ‘인간은 삶에서 마주치는 어떠한 일에도 좋은지, 나쁜지를 판단할 수 없다’고 생각해보려합니다. 예를 들어, 오늘 제가 다리가 부러져 내일 있는 축구게임을 뛸 수 없다고 해보자. 얼마나 짜증나는 상황인가요? 게다가 곧 들어갈 훈련소 교육이수에도 차질이 생깁니다. 하지만 만약 내일 차를 타고 가다 교통사고가 나서 뇌성마비에 걸릴 운명이였다면? 너무 억지 아니냐고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알고있는 이야기들 중에 소설에도 나오지 않을 법한 이야기들이 많지 않나요? 결국 우리는 궁극적으로 현실의 ‘좋고 나쁨’을 알 방법이 본질적으로 없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만약’이라는 것은 현실이 되지 않았고, 가능성의 영역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지금 살고있는 현실은 얼마나 많은 확률들이 만난 결과인가요? 지금 이 순간을 한번 봅시다. 제 옆자리에 앉은 사람은 고민합니다. 이따 저녁으로 치킨을 먹을지, 피자를 먹을지. 그러다 치킨을 먹는다고 하면 치킨집 라이더분이 배달을 가야겠죠. 그러면 그 라이더분은 오토바이를 타고 도로로 나갑니다. 한 사람의 단순한 고민의 결과가 이같은 영향을 줍니다. 하지만 이 지구상엔 얼마나 많은 사람이 있고, 얼마나 많은 고민과 결정을 하나요. 셀 수가 없습니다. 만약 이 그 사람이 야식을 먹지 않기로 했다면, 도로는 그러지 않았을 때 보다 교통량이 적을 것이고, 운전자들의 마음은 조금 더 여유로웠을 겁니다. 이같은 영향을 어떻게 다 계산할 수 있나요? 조금 돌아온 듯 하지만 ‘만약’이라는 말이 얼마나 허무맹랑하고, ‘우리의 귀여운 허상’에 불과한지 알 수 있습니다.
결국 좋고 나쁨을 ‘판단’하는 것은 지금 우리의 ‘감정’입니다. 하지만 이 감정이라는 녀석은 이성적이지 못해, 순간의 쾌락과 불쾌에 영향을 많이 받습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당면한 현실이 우리에게 좋은지 나쁜지 알 수 없지만, 순간적인 쾌락과 불쾌에 영향을 받아 그 이유를 가장 직접적으로 영향을 준 것에서 찾아냅니다. 예를 들면, 위와 같은 상황에서 ‘아, 재수없게 다리 부러져서 다 망했어’ 라고 투덜거리는 거죠. 우리의 ‘무지’가 이처럼 단기적인 감각에 집중할 수 밖에 없도록 만든 것입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미래를 두려워하지 말고, 지금 마주하고 있는, 그리고 다가올 현실에 긍정적으로 부딪혀야 합니다.
본질적으로나 이론적으로 더 낫거나, 못한 상황은 있을 수 없으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