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억 소환
부모님 시절도 아니었다.
불과 십 수년 전에 사람들은 도토리를 모으기 시작했다.
그것은 신드롬이었다.
도토리는 음악과 앙증맞은 캐릭터, 심지어 누군가에게 줄 선물로도 바꿀 수 있었다.
어느 노래가사처럼,
어떤 이들은 도토리의 노예, 어떤 이들은 방문자수의 노예가 되기도 했다.
그래도 좋았다.
수많은 블로그의 조상격이라 할 수 있는 미니홈피는 사람들의 참 많은 것을 대신해주었다.
기본적으로 소통 공간이었고, 일기장이었으며, 작은 앨범이 되어주었다.
그리고 누군가에겐 한 사람을 위한 매개체이기도 했다.
때때로 바꾸는 배경음악은 내 심정을 대변할 수도 있고, 그냥 듣고 싶거나 듣게 하고픈 음악일 수도 있다.
클루에게도 10곡이 넘는 리스트가 있었다. 조장혁 [Remember], 가을의 전설 OST [The ludlows],
박효신 [눈의 꽃], SG워너비 [사랑하길 정말 잘했어요]... ...
미니홈피 대문글이나 미니미 캐릭터는 자신의 현재상황을 표현하는 도구일 수도 있다.
선의로 맺은 일촌들은 인맥과시용으로 변질되기도 한다.
사진첩은 성장과정 또는 하루하루 살아가는 일상을 보여주고, 게시판은 하고 싶은 말이나 들려주고 싶은 이야기를 담아내며, 방명록은 그 취지와는 다르게 공감과 오해가 공존하는 장이 되기도 한다.
사람들의 관음과 단순 호기심 영역 사이를 아슬아슬하게 줄타기 하며, 당시 젊은이들의 일상을 대변해주었던 미니홈피는 그야말로 시대의 필요충분조건이었던 셈이다.
2006년, 여자친구와 아주 멀리 떨어져 지내게 되었다.
같이 있을땐 당연히 필요가 없었지만, 소통을 하기 위해선 어쩔 수 없었다.
가끔씩 하는 채팅으로는 갈증을 느꼈던 나머지, 아직 일촌이 아닌 그녀의 미니홈피를 방문했다.
재밌게 사진첩을 구경하던 중, 댓글 속 불길한 이름을 발견했다. 여자친구의 前 남자친구였다.
내키진 않았지만, 좌클릭 두번이면 나를 초대할리 없는 그의 미니홈피를 쉽사리 방문할 수 있었다.
믿고 싶지 않았지만, 내가 멀리 떠나고 시작된 여자친구의 의미심장한 왕래.
나름 어린 나이에 적잖은 충격을 받았고, 아닌데도 마치 불륜의 현장을 마주한 것처럼 가슴이 콩닥거렸다.
허락없이(?) 여자친구의 미니홈피를 방문한 것이 딜레마였지만, 이성적으로 판단하고자 했고,
며칠간의 고심 끝에 그녀에게 조심스레 다음과 같은 요지의 이메일을 보냈다.
- 분명 중요한 사람이었겠지만, 이제는 클루에게 집중해주길.. -
하루만에 돌아온 답장은 예상 혹은 바람과 달리, 이별통보였다.
당시엔 읽고 또 읽어봐도 납득이 가지 않는 내용이었고, 난 그대로 무너져버릴듯 허무했다.
그러나 훗날 돌이켜봤을때 나 역시 성급했었다고 스스로 인정하게 되었다.
관점의 차이가 발생할 가능성이 있다고 생각되는데,
그녀의 말대로 그 상황에서 클루는 기다릴줄 알아야 했나 보다.
찌질하다고 해도 어쩔 수 없지만,
그 후 X-girlfriend가 된 그녀의 미니홈피는 어김없이 변화가 생겼다.
미니홈피 대문글과 배경음악이 바뀌었다.
그런 사소한 것일 수 있는 것 조차 의미를 부여해서, 무언가를 알아내고자 했던게 그때는 자연스럽지 않았나.
볼품없고 미련한 미련이었겠지.ㅎㅎ
신기한 경험을 하게 된다.
나 또한 그녀의 미니홈피 대문글의 의미가 무엇일까 문득문득 생각해봤다. 도저히 감을 잡을 수 없는 문구였다.
그런 문구도 희미해져 잊혀질만큼 거의 한달 정도의 시간이 흐른 시기였다.
내 나름대로의 힘든 시간을 극복, 아니 어쩌면 시간죽이기로 찾은 곳은 도심에 자리잡은 알버트공원이거나 오클랜드 시립도서관이었다. 공원에서는 광합성을 하며 시를 썼고, 누구나 출입 용이한 도서관에서는 책을 읽었다. 영어책이 읽힐리 만무하다. 고맙게도 한국어 도서 코너가 있었다. 책을 하나 골라 도서관 바닥 카펫 아무데나 기대어 앉아 며칠을 느릿느릿 읽고 있었는데, 그 문구를 그 책 속에서 발견하게 된다.
무라카미 하루키의 소설 [해변의 카프카]에서였다.
그때는 이미 문구의 의미를 찾는다기보다, 그 문구 자체를 우연히 발견했다는 사실이 놀랍고 신기하여, 잠깐의 부질없는 생각을 하기도 했었다.
나와 헤어지고 난 직후, 왜 하필 그 문구를 미니홈피 대문글에 남겼을까.
단지 그녀도 당시 해변의 카프카를 읽어서였을까. 그러나 그녀는 그 책을 구할 수 있는 환경이 아니었다.
클루는 끝내 그 의미를 알수는 없었고, 쓴 웃음과 함께 미니홈피도, 그녀도 그렇게 잊혀져 갔다...
다만, 미니홈피의 바뀐 배경음악은 그 후로도 오래오래 듣게 되었다.
마치 그 사람이 내게 해주고 싶은 말을 노랫말로 대신하는 것처럼 느껴졌기 때문일까.
그 노래 또한 내가 일찍이 소장하고 있는 음반 수록곡이라서 놀랐지만, 그 전에는 그런 노래가 있는지 조차 몰랐다는 사실이 더욱 나를 놀라게 했다.
* 어느날 문득 눈을 떠보면 바뀌어있는 세상을 보죠.
사랑이란 늘 소원처럼 이뤄질순 없는거에요.
그래요. 나 이제 알아요. 사랑이란 늘 그런 꿈인거죠. *
1999년, 이승철 6집 수록곡. <사랑이란> 中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