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딩에는 Ctrl+Z가 있지만, 인생은 실시간 서버다.
통장 잔고는 넉넉한데 표정이 어두운 사람들을 종종 본다. 겉보기엔 화려하고 세련된 UI(사용자 인터페이스)를 갖췄지만, 그 이면의 서버는 언제 터질지 모르는 버그로 가득 찬 듯한 불안감.
AI 서비스를 만들며 코딩을 배우다 보니,
사람의 삶에도 '기술 부채'가 존재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기술 부채란 당장의 빠른 개발을 위해 완벽한 설계 대신 헐겁고 쉬운 방식을 택했을 때 생기는 빚을 말한다. 지금 당장은 프로그램이 잘 돌아가는 것처럼 보이지만, 갚지 않은 빚에 이자가 붙듯 엉망인 코드들은 시간이 갈수록 서로 엉켜 수정하기 어려워진다. 결국 나중에는 새로운 기능을 하나 추가하려 해도 시스템 전체를 뜯어고쳐야 하는 파산 상태에 이른다.
나는 이 논리가 비단 소프트웨어에만 적용된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우리가 인생에서 부를 쌓고 관계를 맺는 방식에도 똑같은 부채의 논리가 작동한다.
주변에 자산은 많은데 만나는 사람마다 의심부터 하는 지인이 있다. 누가 호의로 다가와도 "돈을 빌려달라고 할까 봐" 혹은 "사기를 칠까 봐" 늘 방어 태세다. 처음에는 가진 게 많으니 당연한 경계심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지켜볼수록 그건 신중함이 아니라, 쫓기는 자의 공포에 가까웠다.
물론 나는 아직 그들만큼 큰 부를 가져보지 못해서, 그 왕관의 무게가 얼마나 무거운지는 모른다. 하지만 적어도 그 왕관을 쓴 사람의 얼굴이 행복해 보이지 않는다는 건 알 수 있다. 내 눈에 그의 삶은 전형적인 ‘스파게티 코드(Spaghetti Code)'처럼 보였다. 면발처럼 복잡하게 뒤엉켜서, 어디서부터 시작되고 어디서 끝나는지 알 수 없는 구조 말이다.
어쩌면 그는 부를 쌓는 과정을 제로섬 게임으로만 경험했을지도 모른다. 누군가의 것을 빼앗거나, 남보다 싼값에 사서 비싸게 넘기는 차익 거래로만 돈을 벌었다면, 그에게 세상은 언제든 내 것을 다시 뺏으러 올 수 있는 약탈의 정글일 것이다. 그래서 돈이라는 결과값은 훌륭하게 출력되지만, 그 결과를 만들어낸 내부 로직은 엉망진창일 지도 모른다. 사람을 믿지 못하는 감옥에 스스로를 가둔 것이다.
만약 그렇다면 이것이 바로 그가 짊어진 거대한 기술 부채다.
기술 부채가 무서운 진짜 이유는 원금이 아니라 이자에 있다. 엉망으로 짠 코드를 방치하면, 나중에 작은 기능 하나를 고치는 데도 처음에 들었을 노력의 10배, 20배가 든다. 과거에 빌려 쓴 시간을 갚느라 현재의 시간을 압류당하는 것이다.
인간관계와 평판도 마찬가지다.
나는 이것을 '정서 부채'라고 부르고 싶다.
당장의 이익을 위해 약속을 어기거나, 파트너를 쥐어짜거나, 고객을 기만해서 돈을 벌 수도 있다. 하지만 보이지 않는 곳에는 '신뢰 상실'이라는 부채가 차곡차곡 쌓인다. 한번 믿을 수 없는 사람, 같이 일하면 피곤한 사람으로 인식되면, 그 이미지를 바꾸는 데는 엄청난 비용이 든다. 나중에 그가 개과천선해서 좋은 제안을 들고 와도, 사람들은 색안경을 끼고 본다.
돈을 벌었지만 사람을 잃었다면,
그것은 진정한 수익이 아니라 평생 갚아야 할 악성 대출이다.
코딩과 인생은 많은 부분이 닮았지만, 결정적인 차이가 하나 있다. 코드의 세계에는 강력한 무기, 리팩토링이 존재한다. 나쁜 구조로 짠 코드라도 마음만 먹으면 싹 뜯어고칠 수 있고, 실수했다면 실행 취소(Ctrl+Z)를 눌러 되돌리면 그만이다. 하지만 인생은 로컬 환경이 아니라 라이브 서버다. 한번 뱉은 말, 한번 저지른 행동, 한번 깨진 신뢰는 되돌릴 수 없다. 엔터키를 누르는 순간 이미 세상에 배포되어 버린다.
그래서 요즘 화두인 'XAI(설명 가능한 인공지능)'의 철학은 우리 삶에도 시사하는 바가 크다. AI가 내놓은 결과가 아무리 훌륭해도, 왜 그런 결과가 나왔는지 설명하지 못하면 - 즉, 랙박스라면 우리는 그 AI를 온전히 신뢰하기가 어렵다.
그래서 "나 돈 많이 벌었어"라는 결과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그 부가 어떤 과정을 통해 축적되었는지, 내가 누구에게 가치를 제공하고 어떤 문제를 해결했는지 설명할 수 있어야 한다. 설명 가능한 부만이 정당성을 얻고, 설명 가능한 삶만이 타인의 존경을 받을 수 있다.
완벽한 코드는 없다.
나 역시 AI 서비스를 기획하며 매일 타협의 유혹에 시달린다. "일단 이렇게 짜면 당장은 돌아가는데..." 하는 생각이 들 때마다 모니터 너머의 미래를 상상하려 애쓴다. 지금의 편안함이 미래의 나를 옥죄는 족쇄가 되지 않기를 바라면서.
우리의 하루하루는 거대한 시스템을 만드는 코드 한 줄과 같다. 당신은 오늘 어떤 코드를 짰는가. 누군가의 호의를 당연하게 여기며 관계의 빚을 지지는 않았는가. 당장의 이익을 위해 원칙을 우회하지는 않았는가. 아니면, 조금 느리더라도 서로에게 도움이 되는 단단한 논리를 쌓았는가.
부채 없는 삶, 혹은 감당할 수 있을 만큼의 건강한 부채만 가진 삶. 그것이 내가 지향하는 '리팩토링이 필요 없는 인생'이다. AI를 배우는 학생으로서, 그리고 한 인간으로서 나는 오늘도 버그 없는 하루를 꿈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