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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문광 Mar 16. 2018

잘 쓰는 것보다 일단 쓰는 것 자체가 중요하다 생각했다

움베르토 에코의 '논문 잘 쓰는 방법'을 읽고 쓴 뒤늦은 반성

논문 잘 쓰는 방법 / 움베르토 에코 / 김운찬 옮김 / 열린책들 / 2006.06.30


왼쪽부터 이탈리아판, 미국판, 일본판 책 표지. 제목 어디에도 '잘'이란 낱말은 없다. 다만 <논문 쓰는 방법>일 뿐.


만약 학부 졸업논문을 쓰기 전에 이 책을 읽었더라면 질적으로 수준이 다른 내용을 써낼 수 있었을지도 모르겠다는 헛된 기대를 품어본다. 나의 졸업논문(논문이라고 부르기에도 민망하다)은 주제가 참신하지도, 근거가 충실하지도, 정리가 정연하지도 못했다. 졸업은 못 하더라도 졸업요건은 채워야 하지 않겠느냐는 생각뿐이었다. 마감일에 맞춰 허겁지겁 글자수 늘리기에 바빴다. ‘내일은 또 어떤 동어반복으로 분량을 채우지.’ 막막하던 며칠간의 밤낮이 떠오른다. 너그러운 마음으로 논문을 통과시켜주신 교수님께 감사드린다.


어쩌다 한 번씩 알라딘 장바구니를 구경한다. ‘읽어볼까?’ 했다가 기억 저편으로 사라진 책들을 스크롤한다. 문득 1년6개월 전에 남긴 고민의 흔적을 발견했다. 제목부터 눈에 띄었다. <논문 잘 쓰는 방법>. 저자는 움베르토 에코(Umberto Eco). 


쓰는 법을 알아도 쓰기 어려운 게 논문이라지만 그래도...


도대체 논문이라는 것은 어떻게 써야 하는가, 라며 갈피도 못 잡고 머리를 쥐어짜다 내가 해낸 것이라고는 알라딘 검색창에 ‘논문 쓰는 법’이라고 입력하는 것뿐이었다. 검색결과 상단에 곧장 이 책이 떠서 얼마나 반가웠던지 모른다. 기호학 수업을 들으면서 수없이 들어야 했던 그 이름 움베르토 에코. 그의 이름을 장바구니에 담은 지 1년 반 만에 책을 펼쳐보게 됐다.


움베르토 에코(Umberto Eco). 1977년.


에코는 자상한 스승이었을 것이다. 졸업을 앞두고 생전 처음 논문이라는 것을 쓰게 된 학부생들을 위해 에코는 1977년 이 책을 냈다. 일종의 졸업논문 매뉴얼이다. ‘어떻게 도서 대출증을 얻는지조차 모르는 학생’에게도 유용한 조언을 에코는 아끼지 않는다. 때문에 목차도 세세하다. 졸업논문이란 무엇인지 개념 정의부터 최종적인 참고 문헌을 정리하는 방법까지 졸업논문 작성의 A부터 Z를 책 한 권에 담았다. 심지어 그는 시간에 쫓기는 학생의 입장에 빙의해 동네 도서관에서 자료 조사를 해보이기도 한다. 지레 겁먹고 포기하려는 학생들을 다독이는 듯한 모습이다.


졸업논문을 잘 쓰기 위한 대원칙은 간단하다. 무엇보다도 꼼꼼해야 한다. 연구주제는 촘촘해야 한다. 자료조사는 탄탄해야 한다. 글의 뼈대가 튼튼해야 한다. 대충 했다가는 누더기 같은 결과물만 탄생할 따름이다. 논문 작업에 최소한 6개월(6일이 아니다)은 활용해야 한다는 전제사항은 여기서 비롯한다. 졸업논문을 한 달 안에 쓰려고 작정한 사람에게 에코는 매몰차게 말한다. 차라리 대필을 맡기거나 다른 논문을 베끼라고.


움베르토 에코의 조언에 누군가는 ‘석사 논문도 아니고 고작 학부 졸업논문일 뿐인데. 나는 대학원에 갈 것도 아닌데’ 하는 반감이 들 법도 하다. 이에 대한 에코의 한마디가 솔깃하다. “논문의 기회를 활용하여(비록 대학의 나머지 기간이 실망스럽고 좌절을 주는 것이었을지라도), 학문 연구의 긍정적이고 진보적인 의미를 되찾을 수 있다.”(13쪽)


졸업논문 작성과 관련한 에코의 조언을 한 문장으로 종합하자면 다음과 같다. '이왕 하는 것, 최선을 다해서 자기 스스로에게 의미 있는 결과물을 만들어보는 게 어떤가.'


책에는 논문 쓸 일 없는 사람에게도 피가 되고 살이 될 만한 조언이 군데군데 있다. 논문 작성 팁보다도 이런 곁가지 이야기들에 주목하며 책장을 넘겼다. 대략 40년 전 움베르토 에코가 이탈리아 학부생들을 염두에 두고 쓴 문장들을 내가 왜 굳이 읽고 앉아 있어야 하나, 라는 생각이 고개를 들 때마다 주옥같은 문단이 나를 반겼다. 특히 아래 옮겨 적은 이야기 두 덩이는 두고두고 읽게 될 것 같다. ‘수집 현기증’에 빠져선 안 된다. 책은 절대 신성한 게 아니다.


"복사라는 알리바이에 빠지지 말 것!"


“복사라는 알리바이에 빠지지 말 것! 복사는, 도서관에서 이미 읽은 텍스트를 자기 가까이 두기 위해서든 아직 읽지 않은 텍스트를 집으로 가져 가기 위해서든, 필수불가결한 수단이다. 하지만 종종 복사는 하나의 알리바이로 이용되기도 한다. 수백 페이지의 복사물을 집에 가져 와서는, 그 복사된 책에 대한 간단한 수작업만으로 그 책을 소유했다는 인상을 받기도 한다. 복사물의 소유는 책 읽기를 방해한다. 많은 사람들에게 그런 일이 발생한다. 그것은 일종의 수집 현기증이며, 정보의 신자본주의다. 복사물에서 자신을 지키도록 하라. 일단 복사를 하자마자 읽고 곧바로 기록하라. 정말로 시간에 쫓기는 경우가 아니라면, 이전의 복사물을 소유하기(말하자면 읽고 기록하기) 이전에는 새로운 것을 복사하지 말라. 어떤 텍스트를 복사할 수 있었기 때문에, 사실은 내가 많은 것을 모르고 있는 경우가 있다. 마치 내가 그것을 읽은 것처럼 안심하고 있기 때문이다.”(156쪽)


"망설이지 말고 기록하라!"


“만약 책이 여러분의 것이고 골동품의 가치가 없다면 망설이지 말고 거기에 기록을 하라. 책을 존경해야 한다고 말하는 사람을 믿지 말라. 책들은 그대로 놔두는 것이 아니라, 사용함으로써 존경하는 것이다. 그 책을 다시 헌책방에 판다고 하더라도 서너 푼밖에 받지 못한다. 그보다는 여러분의 소유의 흔적들을 남기는 것이 더 낫다.”(15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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