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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doowondo Jul 16. 2019

자식이자 사람인 청년을 위해

『다중격차, 한국 사회 불평등 구조』를 읽고


“넌 부모 아니면 아무것도 아니야.” 머리끝까지 화난 아버지한테서 들은 말이다. 왜 아버지가 화가 났는지는 잘 기억이 안 난다. 내가 대들었던 것 같다. 저 문장을 아무리 머릿속에서 지워보려 해도 잘 안 된다. 아버지 말이 맞다. 나는 부모가 아니면 아무것도 아니다. 분명히 최선을 다해 살아왔는데도 부모가 없으면 못 산다. 아마 차가운 곳에서 굶어 죽을 것이다. 몇 년 전, 친구 아버지는 술을 마시고 들어와서 “앞으로 용돈 없다”며 가위를 들고 친구 지갑에 들어있는 카드를 모두 잘라버렸다. 오늘 또 다른 친구는 페이스북에 ‘탈가정에 성공한 사람’의 조언을 구했다. 글의 요지는 그의 애인이 어렸을 때부터 가정폭력에 시달려 집을 나와 살지만 방값, 생활비, 학원비 등 경제적 상황 때문에 탈가정에 매번 실패했다는 이야기였다. 이런 폭력적인 사례뿐만 아니라 주변의 많은 친구들이 부모의 은근하고 또 직접적인 경제적 자립 요구에 압박감을 느낀다. 부모로부터 경제적 지원을 받으면서 죄책감과 부채감을 느끼고, 시간을 쪼개 몇 푼 안 되는 아르바이트도 한다. 청년이 부모로부터 자립하는 것은 가능할까.


 <다중격차, 한국 사회 불평등 구조>라는 책에서는 1997년 외환위기로부터 고착화된 한국의 경제적 불평등 구조를 분석한다. 외환위기 이후 한국은 신자유주의 체제를 따라 불평등을 제어하는 기제들을 풀었다. 노동시장은 대기업과 중소기업으로, 또 정규직과 비정규직으로 나누었다. 주택은 투기의 대상이, 교육은 불평등 재생산의 도구가 됐다. 이는 곧 ‘다중격차’ 사회를 낳았다. 소득, 자산, 주거, 교육, 문화, 건강 등 사회의 여러 차원들이 서로 상호작용하면서 불평등을 계속 재생산하는 구조와 현상을 뜻한다. 제4장에서는 ‘다중격차와 청년세대’를 주목한다. 현재 20대들이 노동시장에 편입되기 위해 생활하는 과정에서 겪는 빈곤을 서술한다.


저자는 청년들을 ‘밑바닥계급’으로 호명하며 청년 세대가 늘 불평등 관련 이슈에서 패자였다고 서술한다. ‘밑바닥계급’이란 자본주의 체제에서 억압받고 배제되는 다수를 부르는 말이다. 현재 한국 사회 청년들은 경제활동인구로 편입하기 위해 불가피하게 높은 대학 등록금, 월세, 식비, 학원비 등을 지출한다. 사회가 해결해주지 않기에 개인이 감당해야 한다. 비용 부담 방법으로는 가족 지원, 대출, 아르바이트가 있다. 가족 지원은 소득격차로 애초에 불평등하며, 대출은 경제적으로 이미 취약한 청년을 이른 나이에 채무자로 만들고 심지어 금리 또한 높다. 또 학교에 다니며 아르바이트로 생계를 유지하기엔 한계가 있다. 


나는 여기서 첫 번째, 부모의 지원을 받는 경우다. 가장 쉽고 안정적이다. 부모님은 자녀를 대학까지 책임져야 한다고 생각했다. 학자금 대출을 받아 등록금을 내주고, 생활비도 다달이 보내준다. 나 또한 당연하다고 느꼈다. 그러나 대학에서 한 친구를 만나며 생각이 달라졌다. 그는 부모로부터 생활비를 전혀 받지 않으며 주말마다 낮부터 밤까지 아르바이트를 했다. 우리에게 주어지는 여가 시간은 너무나도 달랐다. 나는 주말에 책을 보고 과제를 할 수 있지만, 그에게는 그럴 시간이 없었다. 또 다른 친구는 학비를 스스로 마련해야 하기에 방학마다 공사판을 뛴다. 그의 친구는 반찬 없이 소스에 밥을 비벼 먹는다고 한다. 불평등은 너무나 가깝고, 명확했다. 주제넘지만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청년으로서 청년 문제에 관심을 가지고 무엇이라도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혼돈이 찾아왔다. 내가 말하는 청년 문제엔 내가 없었다. 부모로부터 지원을 받기 때문에 생활하는 데에 아무 지장이 없는 것처럼 느껴졌다. 그렇다면 부모님이 가난하지 않은 나는 ‘청년 문제’를 외칠 수 없는 걸까. 


부모님은 교사공무원이라 소득이 안정적이고 평생 보장을 받는다. 국가장학금을 신청했더니 가장 높은 소득분위인 10분위가 떠서 일절 받지 못했다. 그런데 나는 한 번도 집이 안정적이라고 느낀 적이 없다. 내가 태어나자마자 외환위기가 터졌고, 외할아버지 회사는 부도가 났다. 부모님은 맞벌이로 일하며 대신 빚을 갚아야 했다. 또 빚으로 집을 샀고, 오빠와 나를 교육시켰다. 대출 이자가 줄어들지 않는 반면 집은 점점 크기가 줄어들었고, 아버지는 매일 술을 마셨다. 분명 다른 친구들에 비해 우리 집은 소득분위가 높다. 그러나 집은 빚에 기대어 생활을 유지하고 있고, 나는 이런 집에 기대어 생계를 유지해왔다. 빚이 있으면 집안이 화목하기 어렵다. 아버지의 폭력성은 언제 터질지 몰랐다. 그 때문에 어릴 적부터 집을 떠나 살았지만, 생활비와 교육비 때문에 매 순간 부모님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했고 부채감을 느꼈다. 


물론 앞서 말했던 사정이 어려운 친구들보단 훨씬 여유 있고, 또 안정적일 것이다. 당장 생활비를 직접 벌지 않아도 괜찮기 때문이다. 그러나 나 또한 자유롭다고 말하기 어렵다. 부모님이 언제 생활비를 끊을지도 모르고, 계속 받는다고 해도 불편하고, 부채감이 가득하다. 지금과 같은 제도가 유지되는 한 가족으로부터 자유로울 수가 없다. 현재 복지제도는 이런 복합적인 상황을 보지 못한다. 국가장학금과 주거 등 여러 복지제도는 개인을 개인이 아니라 그가 속한 가정의 소득으로 따지고 복지혜택을 지급한다. 개인은 가족이라는 사회제도를 벗어나지 못한다. 자본주의와 가부장제가 중첩되는 지점이다. 복지국가는 가장을 중심으로 그가 부양하는 한 가정을 지원하는 데에만 초점을 맞췄기에 성별, 연령, 세대에 따라 개인들이 겪을 수 있는 불평등한 상황은 세심히 고려하지 못하고 있다. 


 제7장에서는 “복지국가가 사회적 보호 역할을 다하고 다중격차에 효과적으로 대처하기 위해서는 복지급여에 보편주의를 도입하고 수급단위를 ‘개인화’하는 것이 필요하다”며 “보편적 서비스와 보편적 현금급여 중에서는 전자를 우선적으로 추진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결론 내린다. 여기서 말하는 복지의 보편주의와 개인화는 기본소득, 청년수당, 아동수당과 같이 가정의 소득과 상관없이 개인에게 지급되는 보편적인 사회급여를 뜻한다. 그리고 보편적 서비스로는 의료서비스와 공교육제도 확대가 있다. 이처럼 사회 공공서비스 자체를 늘리고, 선별적 복지가 아닌 보편적 복지로 나아가야 가족단위 급여가 낳는 사각지대 문제로부터 벗어날 수 있다. 실제로 독일, 프랑스, 핀란드, 덴마크, 슬로베니아를 비롯한 유럽 국가들은 교육을 평등한 공공재이자 사회의 성장을 이끌어낼 인재를 키우는 토대로 여긴다. 따라서 대학을 포함한 모든 교육을 무상으로 제공한다. 또 독일, 오스트리아, 벨기에는 18세 미만에게 아동수당을 주지만 학생, 구직자일 경우 만 25세까지도 수당을 지급한다. 이 속에서 청년과 학생은 경제적인 어려움에 쫓기기보다 부모로부터 독립해 자신의 진로를 주도적으로 탐색하고 학업에 열중할 수 있다. 그러나 현재 한국처럼 부모에게 자녀의 모든 경제적 상황을 책임지게 하는 상황에서는 자녀는 부모에게 부채감을, 부모는 자녀에게 부담감 혹은 미안함을 느낄 수밖에 없다. 천주희는 <우리는 왜 공부할수록 가난해지는가>에서 부모와 자식 사이에서 비싼 대학 등록금을 가지고 서로 미안해하지 말자고 제안한다. 그런 마음을 모아 오히려 국가에 따져 물어야 한다는 것이다. 우리는 세금으로 충분히 교육비를 지불하고 있으며, 대학 등록금 인하와 더 나아가 대학 무상교육을 요구할 권리가 있다고 주장한다. 


1인 가구, 부모와 떨어져 지내는 청년이 늘어나고 있다. 더 이상 부모의 소득을 기준으로 복지 제도를 운용하는 것에는 한계가 있다. 국가는 청년이 부모의 우산 속에 있는 게 아니라 자립할 수 있는 건강한 성인이 될 수 있도록 다른 방식으로 복지를 접근해야 한다. 나를 포함한 많은 친구들은 부모에게 얼마만큼의 지원을 받아야할지, 얼마만큼 내가 벌어 써야할지, 혼란스러워하고 있다. 각각 부모의 철학에 따라 자녀의 경제적 상황이 달라진다. 게다가 경제적으로 종속되어 있기 때문에 성인으로서 독립하기 어렵다. 청년이 자립하기 위해 국가는 무상교육, 기본소득을 나서서 실현해야 한다. 이미 안산시에서는 반값등록금을, 경기도와 서울시에서는 청년수당을 실행하고 있다. 이와 같은 정책들을 더 확대해야 한다. 청년 복지의 보편화가 실행되면 부모자식은 돈에 종속된 관계로부터 벗어나 자율적인 관계를 형성할 수 있다. 즉, 내가 ‘부모가 아니면 아무것도 아닌 존재’에서 벗어날 수 있다. 현 상황은 자식의 탓, 부모의 탓이 아니라 제도의 탓이다. 부채감, 죄책감, 미안함에 빠지지 말고 변화를 만들어야할 곳이 어딘지 콕 짚을 필요가 있다. 청년 빈곤을 둘러싼 여러 감정들에 가려져 그간 안 보였던 실제 사회 제도를 바라보아야 한다.  



*참고문헌


“아동수당 해외사례는…선진국 3분의 2 고소득층에도 지급”, 연합뉴스, 2017년 12월 11일 수정, 2019년 6월 15일 접속, https://www.yna.co.kr/view/AKR20171210050000017

전병유·신진욱 편,『다중격차, 한국 사회 불평등 구조, 페이퍼로드, 2016.

천주희, 『우리는 왜 공부할수록 가난해지는가』, 사이행성, 2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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