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장 - 냉장고를 부탁해

프로 작가는 밖에서 소재를 찾고, 자서전 작가는 안에서 소재를 찾는다.

by 도파민

제4장 - 냉장고를 부탁해

"프로 작가는 밖에서 소재를 찾고, 자서전 작가는 안에서 소재를 찾는다."


나는 지금까지 다양한 교육기관에서 다양한 사람들에게 글쓰기를 가르쳐왔다.

대학 강단에서는 젊은 작가 지망생들을, 문화센터에서는 중장년층의 수강생들이 대부분이었다.
이 두 집단은 나이도 다르고, 삶의 방향도 다르며, 글을 쓰는 목적도 전혀 달랐다.


“작가가 되고 싶어요. 근데… 뭘 써야 할지 모르겠어요”

대학에서 만난 젊은 작가 지망생들은 대부분 "작가가 되고 싶다"는 의지만 있을 뿐, 정작 쓰고 싶은 이야기는 없는 경우가 많았다.
왜 그럴까?
단순히 그들이 게으르거나 열정이 부족해서가 아니었다.
그들은 아직까지 보고, 읽고, 겪은 것이 너무 적었기 때문이었다.

나는 선배 작가로서 창작의 기술, 구성의 공식, 플롯의 구조 같은 것들은 얼마든지 가르쳐줄 수 있었다.
하지만 나는 그들에게 삶을 체험시켜 줄 수도, 슬픔을 느끼게 할 수도, 사랑에 빠지게 할 수도 없었다.
그래서 내가 해줄 수 있었던 조언은, "연애를 되도록 많이 해봐라", "다양한 아르바이트를 해봐라" 정도밖에 없었다.

그들에게 과제를 내주고 작품을 평가하고 학점을 내주면서 나는 늘 무언가 아쉬운 마음이 남았다.
지금 그들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이야기를 쓰는 방법’이 아니라, ‘이야기를 가질 수 있는 삶’이었기 때문이다.


“글은 처음 써보는데… 하고 싶은 이야기가 많아요”

그러던 중 나는 문화센터에서 중장년층을 대상으로 글쓰기 수업을 진행하게 되었다.
처음에는 기대보다 걱정이 앞섰다. 대학생들과 달리 문장력이나 글쓰기 경험이 부족할 거라는 선입견 때문이었다.

하지만 첫 수업이 시작되자마자 내 생각은 완전히 바뀌었다.
그들은 글을 잘 쓰진 못했지만, 하고 싶은 이야기가 너무 많았다.

어떤 이는 부모님 이야기를, 어떤 이는 폐업한 가게에 대한 이야기를, 또 어떤 이는 죽은 반려견에 대한 이야기를 꺼내놓았다.
그들의 문장은 서툴렀지만, 감정은 진실했고, 이야기는 생생했다.
나는 교수라는 직함을 달고 있었지만, 그 순간에는 그들의 삶 앞에 겸허한 독자일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깨달았다.
‘이들에게 필요한 건 글쓰기 기술이지, 이야기는 이미 충분하다.’
나는 얼마든지 나의 창작 노하우를 가르쳐줄 수 있었고, 그들은 이야기를 가지고 있었기에,
문화센터에서의 수업은 대학 강의보다 훨씬 즐거웠고, 보람도 컸다.


전업 작가와 자아실현형 작가의 차이

대학에서 나는 작가 지망생들에게 이렇게 가르쳤다.


“작가는 자기 경험을 토양 삼아 그 위에 ‘소재’라는 씨앗을 심고, ‘작품’이라는 열매를 수확해서 세상에 내놓는 사람이다. 그런데 만약 그 토양 자체를 퍼다가 팔기 시작하면, 더 이상 거기서 아무것도 자라나지 않는다.”


실제로 내가 대학에서 강의를 하던 당시에는 그런 일이 많았다.

2000년대 초반, 웹툰 붐이 일며 ‘일상툰’이라는 장르가 유행하던 시절이었다.
많은 젊은 작가들이 자신의 연애담, 가족사, 학교 생활, 아르바이트 경험을 바탕으로 한 작품을 소소한 내놓았다.
이들 중 일부는 독자들에게 공감을 자아내며 큰 성공을 거두기도 했다.

하지만 대부분은 그 한 작품 이후 차기작을 내지 못했다.
왜냐하면 ‘경험담’을 팔아버린 작가는, 그 뒤에 쓸 이야기가 사라지기 때문이다.

게다가 워낙 젊은 나이에 작가가 되어버린 바람에 다양한 경험을 쌓을 기회도 부족했다.


공모전에서도 비슷한 경우를 숱하게 보았다.
자기 이야기를 풀어쓴 작품으로 당선되었지만, 두 번째 작품에서 소재가 부족해서 막히고 결국 데뷔작이 마지막 작품이 되며 사라진 수많은 신인 작가들.
나는 그들을 안타깝게 지켜보며, 학생들에게 조언했다.


“공모전에 목숨 걸지 마라. 작품은 삶을 바탕으로 만들어야 하지만, 그 바탕을 갉아먹는 방식으로 써서는 안 된다.”


그렇기 때문에 대학생들에게는 ‘자기 이야기’를 데뷔작으로 쓰지 말라고 가르쳤다.
‘작가’는 ‘자신의 삶을 가공하는 사람’이지, ‘삶을 날 것으로 드러내는 사람’은 아니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글을 써서 밥을 벌어먹는 전업작가가 되고 싶다면 '나 자신의 삶'보다는 '타인의 삶'에 집중하라고 가르쳤다.

'작가가 세상에 관심을 가지지 않으면, 세상도 작가에게 관심을 주지 않는다.'라고 말이다.


하지만 문화센터의 중장년 수강생들에게는 정반대로 가르치고 있다.
그들은 이미 직업이 있고, 가족도 있고, 이제는 인생의 후반전을 살아가고 있었다.
글쓰기로 돈을 벌거나 작가로 데뷔하는 것이 목표가 아니라,
자기 삶을 돌아보고 이해하고 정리하고 싶은 마음,
누군가에게 한 번쯤 내 이야기를 들려주고 싶은 마음이 그들의 원동력이었다.

그들에게는 작가로서의 상업적 성공보다, 자신의 삶을 이해받고 싶은 욕구가 더 중요했다.
나는 오히려 그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당신의 이야기를 써보세요. 지금 아니면 영영 쓸 수 없을지도 몰라요.”


요리사와 작가, 직업과 진심의 차이

이쯤 되면 이런 질문이 생길 수 있다.
전업 작가가 자아실현형 작가보다 더 뛰어난 존재일까?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요리사를 예로 들어보자.

식당에서 일하는 프로 요리사와 집에서 가족을 위해 요리하는 어머니 중 누가 더 뛰어난 요리사일까?

이 질문은 어리석다.
중요한 건 ‘누가 더 잘 파는가’가 아니라, ‘누가 더 진심을 담았는가’다.

어머니가 만드는 집밥이 자극적이고 기교만 가득한 외식보다 훨씬 따뜻하고 기억에 남는 이유는,
그 안에 삶이 있고, 진심이 있고, 사랑이 있기 때문이다.

작가도 마찬가지다. 이 책을 다 읽을 때쯤이면 당신도 '집밥' 같은 글을 쓸 수 있길 바란다.

냉장고를 부탁해

나는 대학에서 강의하던 시절 학생들에게 이렇게 가르쳤다.


“프로 작가는 메뉴를 정하기 전에 냉장고를 열지 않는다. 손님이 원하는 메뉴를 정하고, 그 메뉴를 만들기 위해 필요한 식재료를 주문한다. 반면, 아마추어 작가는 냉장고를 열고 무얼 만들지를 고민한다.”


전업 작가에게 필요한 것은 시장 조사와 소비자의 욕구이고,
자서전을 쓰는 사람에게 필요한 것은 자신의 내면을 향한 솔직한 시선이다.

자서전을 쓰는 당신은 이제 냉장고를 열 차례다.


당신의 삶이라는 냉장고 안에는 무엇이 들어 있는가?

가족의 갈등, 첫사랑의 기억, 직장에서의 좌절, 아이를 키우며 울었던 밤,
혹은 누구에게도 말하지 못했던 그 순간.

자, 냉장고를 정리하듯 그것들을 하나하나 꺼내어 보자.
언뜻 보기엔 시시하고 흔해 보일지 모른다.
하지만 당신만이 가진 재료이고, 당신만이 만들 수 있는 요리다.
당신만이 쓸 수 있는 자서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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