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장 - 일본은 어떻게 자서전의 나라가 되었나?

일본 '지분시(自分史)' 붐과 기억의 공동체

by 도파민

제5장 - 일본은 어떻게 자서전의 나라가 되었나?

— 일본 '지분시(自分史)' 붐과 기억의 공동체


‘자서전’이라는 말 앞에서 사람들은 주저한다.
“내 이야기가 뭐 그리 대단하다고…”


하지만 한 나라가, 한 사회가, 지금 이 순간 수많은 개인에게

“당신의 이야기를 기록하세요”라고 손 내밀고 있다면 어떨까?

그런 일이 실제로 있다. 일본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이다.
그 나라엔 ‘지분시(自分史)’라는 문화가 있다.


지분시, 한 사람의 역사

‘지분시(自分史)’는 스스로(自分)의 역사(史), 말 그대로 자기 삶을 돌아보고 기록하는 글쓰기 활동을 뜻한다.
한국의 ‘자서전’과 유사하지만, 지분시는 더 가볍고 자유롭고 일상적인 기록문화다.
꼭 책으로 출판하지 않아도 되고, 꼭 잘 쓴 글일 필요도 없으며, 순서에 맞게 연대기를 따를 이유도 없다.

중요한 건 단 하나,
자신의 인생을 되돌아보고, 그 안의 의미를 찾아보는 것.

처음에는 시니어 대상의 복지 프로그램이나 지역 커뮤니티 행사로 시작되었지만,
지금은 일본 전역의 지자체, 도서관, 문화센터, 출판사까지 손잡고 만드는 하나의 문화 운동이 되었다.


일본은 왜 지분시에 주목했을까?

그 배경엔 고령화 사회의 진통이 있다.
일본은 이미 20년 전부터 초고령사회에 진입했고, 그로 인해 다양한 문제가 수면 위로 드러났다.

가장 큰 문제는 고립감과 삶의 의미 상실이었다.
퇴직 후 집에 머무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사회와 단절된 채 자신을 점점 투명한 존재로 느끼게 되는 노년의 고독.
지분시는 바로 그 고립감을 뚫고 세상과 다시 연결되기 위한 시도였다.

처음 펜을 잡게 된 사람들은 대부분 이렇게 말했다.
“쓸 얘기가 없어요.”
하지만 쓰기 시작하면 이상하게도 멈출 수 없었다.
아버지의 부재, 어머니의 밥상, 첫 월급, 상실, 회복, 포기, 화해…

삶을 살아낸 사람이라면 누구나 하나쯤은 이야기할 것이 있었다.
그리고 그것은 누군가에게는 다정한 교훈, 또 누군가에게는 같은 시대를 건너온 공감이 되었다.


기억을 공유하면 마을이 살아난다

특히 인상적인 것은 지자체와 도서관, 출판사 간의 협력 체계였다.

지역 도서관은 공간을 제공하고 지분시 워크숍을 운영한다.

자서전 전문 출판사나 POD 출판사는 결과물을 소책자 형태로 묶어준다.

마을신문이나 지역 소식지에서 이를 소개하고, 가끔 낭독회나 전시도 연다.


예를 들어, 도쿄의 고엔지 도서관은 ‘지분시 열람 서가’를 따로 만들었고,
가나자와 시는 ‘100인의 지분시’ 프로젝트를 통해 지역 원로들의 삶을 엮어 출판했다.
일본 전국에는 이미 수백 개의 자서전 전문 소출판사, POD 업체, 지분시 워크숍 강사가 존재한다.

이 모든 활동은 결국 한 가지 목표를 향한다.
“기억의 공동체”를 만들자.
단절된 개인들이 삶을 나누고, 그 공유된 기억이 하나의 사회적 자산이 되는 것이다.


우리도 지금 써야 한다

이제 우리는 이런 질문을 던져야 한다.

“왜 자서전은 유명인의 전유물처럼 여겨질까?”
“왜 우리는 자기 삶을 이야기하는 데 이토록 인색한 걸까?”


우리 역시 고령화 사회로 빠르게 진입하고 있다.
베이비붐 세대는 이미 70대를 향하고 있고, 1인 가구, 가족 해체, 퇴직 이후의 고립감은 점점 보편적인 문제가 되고 있다.
이제 ‘기록’은 선택이 아니라, 자기 삶을 지키기 위한 능동적인 실천이다.

자서전은 단지 과거를 정리하는 행위가 아니다.
현재의 나를 이해하고, 미래를 준비하기 위한 삶의 문해력이다.

누구나 자신의 이야기를 써야 한다.
아무도 그 이야기를 대신 써주지 않는다.
그리고, 한 사람이 자신의 이야기를 글로 남기면,
그 글은 ‘기억’이 되고, ‘유산’이 되고, 언젠가는 어떤 이의 삶을 바꾸는 문장이 된다.


자서전은 새로운 트렌드가 될 것이다.

이제 한국도 자서전의 시대를 준비할 때다.
일본처럼 지자체, 도서관, 지역 출판사가 협력하여
‘한 사람의 삶’을 기록하고 공유하는 체계를 만들어야 한다.

그리고 무엇보다 중요한 건 자기 삶을 쓸 수 있다는 믿음이다.
자서전은 글 잘 쓰는 사람이 아니라,
자기 삶을 진심으로 바라보는 사람이 쓰는 것이다.

한 줄도 좋고, 메모도 좋고, 낡은 사진 한 장으로 시작해도 좋다.
기억의 조각을 모아내고, 문장으로 길어올려라.
당신이 살아낸 그 모든 날들이 기록될 자격이 있다.
자, 이제 당신의 역사를 정리할 시간이다.

혹시 모르는 일이다.

당신이 써내려간 소박한 개인의 역사가 [국제시장]같은 영화가 될 수도 있고, [폭싹 속았수다]같은 드라마로 만들어질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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