때로는 이해할 수 없는 아이들 마음. 그 중 가장 이해할 수 없는...
두 달 전 첫째가 그렇게나 좋아하던 발레를 그만두었다. 더 이상 다니기 싫다는 것이다. 뚜렷한 이유는 말하지 않았다. 아내와 나는 더 이상 흥미가 없나보다고만 생각했다.
얼마 전 아이가 발레를 하기 싫은 이유를 마침내 말했다. 바뀐 발레 선생님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것이다.
선생님이 마음에 들지 않는 이유가 더 뜻밖이었다. 선생님이 독일어를 잘 못해서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것이다. 바뀐 선생님은 동유럽 출신인데, 독일로 이민 온지 얼마 되지 않아 독일어가 서툴렀다.
독일어를 잘 못하는 게 마음에 들지 않는다니, 이 무슨 갑질인가. 아이는 자신 역시 독일어를 잘 못하던 시절이 있었음을 까마득히 잊은 것 같았다.
나에게 최고의 육아서는 <아이의 사생활>이다. 2009년 EBS에서 방송된 다큐멘터리를 책으로 엮은 것으로, 남녀의 차이, 지능의 여러 모습, 도덕성과 자존감 등에 대한 내용을 다루고 있다.
이 책은 내가 아이들을 이해하는 데 많은 영향을 미쳤다. 남자아이와 여자아이는 타고난 본능이 다르고, 지능의 발달 순서도 다르다. 아이들의 지능에는 논리적, 수리적 영역만 있는 것이 아니라, 자연친화적, 음악적, 공간적 영역도 있다는 것을 알았다.
아이들을 교육하는 방식에도 한결 여유를 찾고 원칙을 갖게 했다. 초등학교 입학 전에 무리해서 한글을 가르칠 필요가 없고, 어린 아이들은 그릇을 키워주는 게 보다 중요함을 깨달았다.
책의 내용은 현실에도 들어맞았다. 2년 전 한국 나이로 7살임에도 한글을 제대로 읽지 못하던 첫째는 이제 곧잘 책을 읽는다. 내년 초 한국으로 돌아가면 초등학교에 입학할 둘째가 한글을 잘 모르지만 별로 걱정하지 않는다.
하지만 <아이의 사생활>에 설명되어 있지 않고, 아내와 내가 종종 당황스러움을 겪곤 하는 문제가 있었다. 바로 아이들이 다른 사람과 관계를 맺어가는 방식이다.
아이들은 독립된 존재로서 하나의 고유한 인격이다. 각자 자신만의 능력과 성격을 타고 났으며, 부모는 아이들이 자신의 본성을 잘 발현할 수 있도록 돕는다. 이것이 육아 혹은 자녀교육의 기본적인 덕목일 것이다.
그러나 현실의 아이들은 혼자서 자라지 않는다. 형제자매와 함께 자란다. 외동인 아이들도 어린이집이나 유치원, 혹은 학교에서는 혼자가 아니다. 끊임없이 누군가와 관계를 맺고 비교된다.
독립된 존재로서의 아이들은 이해하기 비교적 수월하다. 나는 첫째가 수리적 사고력보다는 언어적, 시각적 능력이 뛰어나다는 것을 알고 있다. 고집이 세고 집요하며 궁금증이 많은 둘째의 성격을 이해한다.
그러나 다른 사람과의 관계에 있어서 아이들은 예측 밖의 존재가 된다. 첫째가 동유럽 출신의 발레 선생님을 마음에 들어 하지 않는 것 역시 생각지도 못한 일이었다.
그 뿐만이 아니었다. 올해 여름 2학년이 시작될 때쯤 첫째의 학교에 한국인 자매가 전학 왔다. 언니는 우리 아이보다 2살 위였고, 동생은 아이와 같은 학년이었다.
자매는 착한 아이들이었다. 아내와 나를 보면 꼬박꼬박 인사를 했고, 첫째에게도 친근하게 대했다. 하지만 첫째는 그 아이들과 어울리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다. 전학 온 자매들은 우리 아이와 자주 놀려고 했지만, 아이는 계속 피했다.
아내와 나는 아이의 그런 모습이 이해되지 않았다. 아이 역시 정당한 이유를 찾지 못했는지, 그냥 싫다고만 얘기했다. 굳이 이유를 찾자면 독일인 학교에서 한국인들끼리 아웃사이더로 지내지는 않겠다는 생각인 것일까.
다른 사람과의 관계에서 이해할 수 없는 모습은 둘째에게서도 발견할 수 있다. 둘째가 고집이 세고 말을 잘 듣지 않는 건 사실이지만, 집에서는 그럭저럭 통제가 된다. 하지만 이모네 집에서는 그렇지 않다.
둘째는 이모네 집에 있을 때면 더 고집을 피우고 말썽을 부린다. 하지 말라는 행동을 더더욱 열심히 한다. 우리가 이모네 집에서는 아이를 혼내지 않아서 그런 것이 아니다. 이모네 집이라도 아이들이 잘못하면 혼을 낸다.
둘째는 이모와 이모부 앞에서는 유달리 부모의 말을 듣지 않으며 고집을 피운다. 그런다고 이모와 이모부가 둘째 편을 들어주는 것도 아니다. 이모와 이모부가 함께 있다는 것이 아이의 어떤 스위치를 켜는 것인지 알 수가 없다. 다른 사람 앞에서는 자신의 존재감을 더 과시하고 싶어서일까.
이렇게 다른 사람과의 관계에서, 혹은 다른 사람과 함께 있을 때 달라지는 아이들의 모습은 뜻밖의 당혹스러움을 불러일으킨다. 그 모습은 지금까지 알고 있던 모습과 다르지만, 분명 아이들 성격의 한 축을 담당할 것이다.
아이들의 마음 중에서도 가장 이해할 수 없는 부분은 형제자매에 대한 태도이다. 발레 선생님이나 친구들은 내가 관리할 수 없는 영역이다. 이모네 집에서 벌어지는 상황은 가끔 가다 있는 일이다. 하지만 형제 관계는 그렇지 않다. 매일 살을 부딪쳐 가며 함께 산다.
아내와 내가 매번 고개를 흔들며 이해하지 못하는 점은 아이들의 서로에 대한 질투심과 경쟁심이다. 아내와 나는 몇 년 동안 아이들을 키우면서 질투심과 경쟁심이야말로 인간의 본성에 가장 가까운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했다. 사실 이 글을 쓴 이유가 여기에 있다.
“칭찬은 고래도 춤추게 한다.”는 말이 있다. 칭찬 듣는 것을 싫어하는 아이들은 거의 없다. 게다가 <아이의 사생활>에 나온 대로 그냥 “잘 했어.”라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 구체적 사실을 적시하며 칭찬을 한다면 아이들에게 더할 나위 없이 긍정적인 영향을 미칠 수 있다.
“오늘은 반찬을 골고루 먹어서 엄마가 참 기분이 좋아.”라는 이야기를 듣고 싫어할 아이가 어디 있겠는가.
하지만 “칭찬은 고래 옆에 있던 상어를 기분 나쁘게 한다.” 한 아이에 대한 칭찬을 듣고 있던 다른 아이는 왜 자기는 칭찬해 주지 않냐면서 삐진다. 우리는 매번 얘기한다. “누나가(동생이) 잘 했다는 거지, 네가 못했다는 게 아니야.” 하지만 아이의 마음은 조금도 풀리지 않는다.
질투심과 경쟁심은 단지 칭찬을 해주지 않았다고 화내는 것에 그치지 않는다. 같이 음식을 먹으면 조금이라도 더 많이 먹으려고 하고, 물 한 병을 두고 서로 마시겠다고 난리다. 꼭 누군가 한 명이 물을 마시겠다고 하면, 다른 한 명이 자기도 마시겠다면서 싸운다. - 이러한 이유로 유럽에서는 어른들은 물론 아이들 역시 각자 하나의 음식과 음료를 차지하는지도 모르겠다.
상대방이 관심을 보이지 않으면 자기도 흥미를 잃는다. 하지만 상대방이 어떤 것을 원한다는 것을 알면 괜히 자기가 그것을 갖겠다고 나선다. 역시 인간은 누구나 타자의 욕망을 욕망하는 것인가.
이런 질투심과 경쟁심은 단지 이해할 수 없는 측면 중 하나가 아니다. 이로 인해 아이들을 키우는 것에 회의를 느낄 때가 있을 정도다. 아이들의 그런 모습이 모든 아이들에게 공통적인 것인지, 아니면 우리 아이들이 유별난 것인지 모르겠다. 너무 지나친 게 아닌가 하는 싶을 때가 많다.
아내는 나보다 더욱 아이들의 그런 모습을 이해하지 못한다. “왜 자꾸 별 것도 아닌 일로 싸우고 샘내는지 모르겠어. 나는 어렸을 때 절대 안 그랬는데, 누구를 닮았는지.” 아내가 입에 달고 사는 말이다.
나는 가물가물하다. 그랬던 것 같기도 하고 아닌 것 같기도 하다. 정확히 말하면, 내가 어땠는지는 기억이 안 나고, 동생들이 이런 말을 자주 했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맨날 오빠가 다 차지하고, 엄마는 오빠만 좋아해.”
나는 어렸을 때 동생들과 많이 싸웠다. 내가 중학교에 들어간 이후에야 더 이상 싸우지 않았던 것 같다. 그때는 서로 ‘소가 닭 보듯’ 했다.
인터넷에서 아이들의 질투심 해결법 가이드를 찾아 본 적이 있다. 하지만 그러한 방법들을 써 봐도 소용이 없었다. 현실은 아이와 1대1의 관계가 아니기 때문에 마음대로 되지 않는다. 이론은 이론에 그쳐 버린다.
아이들 역시 언젠가는 서로에 대한 질투심과 경쟁심을 내려놓을 것이다. 이 또한 시간이 해결해 줄 문제겠지만, 사람의 본성이 원래 이러한 것인지 의문이 들 때가 있다. 아이들의 서로에 대한 질투심과 경쟁심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지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