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스카 와일드
몇 년 전 아내는 어떤 책에 심취해 있었다. 아내는 소설 읽는 취향이 까다로워 웬만한 책으로는 만족하지 않았는데, 너무 재밌고 대단하다면서 감탄을 거듭했다. 나에게도 꼭 읽어보라며 추천해 주었다. 오스카 와일드의 <도리언 그레이의 초상>이라는 소설이었다.
이 소설은 도입부의 장황한 배경 설명과 풍경 묘사로 지루해 지기 쉬운 다른 고전들과 달랐다. 어떤 고전은 절반을 넘게 읽어도 무슨 내용인지 감을 잡기 어려운 경우도 있다. 하지만 이 책의 1장에 등장하는 두 인물의 대화는 두 페이지를 넘기기도 전에 나를 사로잡았다.
두 인물은, 주인공 도리언 그레이의 초상화를 그린 화가 바질과 그의 친구이자 쾌락을 즐기는 귀족 헨리경이다. 이들의 대화를 읽으면서 적어도 이 책의 ‘재미’만큼은 보장되었다고 느꼈다. - 아내는 자칭 쾌락주의자로 재미없는 소설은 소설로서 가치가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어느 정도 예상하고 있긴 했다.
두 사람의 대화는 비유가 풍부하고 의미가 넘친다. 헨리경은 지적으로 톡톡 튀고 매력 넘치는 화술을 보여준다. 그가 하는 말은 억지인 듯하면서도 반박하기 어렵다. 헨리경보다 투박하기는 하지만 바질도 만만치 않다. 헨리경을 중심으로 이루어지는 대화가 이 소설의 가장 큰 재미이자 아름다움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2장에 이르러 초상화의 주인공인 도리언 그레이가 등장하며 본격적인 이야기가 전개된다.
중반부까지의 줄거리는 이렇다. 바질은 도리언 그레이라는 매력적인 열아홉 살 청년의 초상화를 그린다. 도리언 그레이는 외적으로 아름다울 뿐만 아니라 내적으로도 순수함과 숭고함을 갖추고 있다. 바질이 그린 초상화는 도리언 그레이의 외적, 내적 아름다움을 완벽하게 표현해낸 그림이다.
바질은 도리언 그레이에게 초상화를 선물로 주는데, 그때 도리언 그레이는 한 가지 소원을 빈다. 자기 자신은 초상화처럼 늙지 않은 채 완벽한 젊음과 아름다움을 누리고, 그를 대신하여 초상화가 늙고 추해져가길 바란다는 소원이다. 그리고 어떤 일을 계기로 그 소원은 실제 이루어진다.
도리언 그레이는 어느 연극배우를 사랑하게 된다. 그녀가 아름다웠을 뿐만 아니라 셰익스피어의 작품에서 보여주는 연기가 훌륭했기 때문이다. 도리언 그레이는 그녀에게 구애하고, 그녀도 도리언 그레이를 사랑하게 된다.
결혼을 결심한 도리언 그레이는 헨리경과 바질에게 그녀를 보여주기 위해 그녀가 출연하는 공연에 그들을 데려간다. 하지만 그 공연에서 그녀는 최악의 줄리엣 연기를 보여주고 만다. 그녀가 현실의 사랑(도리언 그레이에 대한 사랑)을 알았기에 연극에서의 사랑은 거짓으로 느껴졌기 때문이다.
실망한 도리언 그레이는 그녀에게 “연기를 잘 하지 못하면 넌 예쁘장한 3류 배우에 불과하다”면서 그녀를 매몰차게 버린다. 좌절한 그녀는 스스로 목숨을 끊는다. 그 사실을 알고 괴로움에 몸부림치던 도리언 그레이는 어떤 놀라운 현상을 발견한다. 그의 초상화가 처음의 순결하고 숭고했던 모습과 달리 조금 추악한 모습으로 변해 있는 것이다. 그가 추상화를 선물 받았을 때 빌었던 소원이 이루어진 것이다.
변해버린 초상화를 보면서 그는 어떻게 살 것인지 고민에 빠진다. 초상화의 모습(즉, 그 자신의 영혼)을 원래대로 되돌리기 위해 회개하며 헌신적인 삶을 살 것인지, 아니면 그의 과오는 초상화에게 짊어지우고 젊음과 쾌락을 추구하면서(즉, 예술작품으로서) 살 것인지. 여기서 도리언 그레이는 ‘영원한 젊음과 은밀한 쾌락, 미친 듯한 기쁨과 거침없는 죄악’을 위해 영혼의 추함을 감수하는 거래를 선택한다.
흔히 인생은 짧고 예술은 길다고 한다. 예술작품은 오래도록 변하지 않으며 쾌락과 기쁨, 죄악을 모두 담고 있다. 도리언 그레이는 스스로가 초상화, 즉 예술이 되는 선택을 한다. 예술이 표방하는 지속성과 아름다움, 쾌락을 얻는 대신 영혼을 파는 악마적 거래를 한다. 그러한 결정에 오스카 와일드의 분신인 헨리경이 지대한 영향을 끼쳤음은 물론이다.
이어지는 소설의 전개 방향은 두 가지 갈림길에 설 수밖에 없다. 첫 번째는, 도리언 그레이가 언젠가는 잘못을 뉘우치고 회개하는 삶을 살 것인지의 갈림길이다. 두 번째는, 만약 회개하지 않는다면, 결국 파멸할 것인가 혹은 최종적인 승리를 거둘 것인가의 갈림길이다.
책장을 덮고서야 몇 년 전 아내가 했던 얘기가 생각났다. 결말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말이었다. 나 역시 그런 느낌을 받았다. 소설의 내용과 어울리지 않는 지나치게 정상적이고 도덕적인 결말이라고나 할까. 다른 결말은 불가능했던 것일까? 많은 사람들이 얘기하는 것처럼, 나 역시 이런 결말을 선택한 오스카 와일드의 의도가 무엇인지 궁금했다.
나는 소설을 읽을 때 개연성 혹은 필연성을 중요하게 생각한다. 주인공이 처한 상황에서 나 역시 주인공처럼 행동할 것인지, 그것이 아니라면 적어도 주인공의 성격(캐릭터)과 그 당시의 시대적 배경에서는 그러한 행동을 할 수도 있을 것인지 고민한다. 문학적으로 높게 평가받는 소설이든 대중적으로 인기가 많은 소설이든, 주인공의 선택과 행동의 개연성이 이해되지 않는 - 필연성까지 갖춘 경우는 드물다 - 소설에는 공감하지 못한다.
돌이켜 보면, <도리언 그레이의 초상>은 개연성이 떨어지는 종류의 소설이었다. 주인공 도리언 그레이가 초상화에게 '불명예의 모든 짐'을 대신 짊어지게 하고 '영원한 젊음과 거침없는 죄악'을 선택할 때나, 살인을 한 후 그것을 덮으려고 할 때, 사회적 비난에도 불구하고 점점 파멸의 길을 걸을 때, 살해 위협에도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고 반성하지 않을 때, 보통의 사람들은 그렇게 행동하지 않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럼에도 이 소설을 읽는 동안에는 개연성의 부족으로 인한 위화감이나 불편함을 느끼기 어려웠다. 보통의 사람들은 안 그랬을지라도, 헨리경의 영향을 받은 도리언 그레이라면 충분히 할 수 있는 행동이라 생각하며 책을 읽었다. 아니, 사실 소설을 읽는 동안은 개연성이나 필연성을 떠올리는 순간조차 거의 없었다. 그만큼 이 소설에 빠져들었단 얘기다.
이 소설은 1890년에 발표되었는데, 언론과 비평가들로부터 “폼 잡고 싶은 얼간이가 쓴 도덕적으로 타락한 위험한 작품”이라며 혹평을 받았다고 한다. 이에 오스카 와일드는 작품을 수정하고 새로운 내용을 첨가하여 1891년에 다시 소설을 출간하고, 여기에 ‘예술을 위한 예술’ 운동의 원칙이라 할 수 있는 ‘머리말’을 덧붙인다.
오스카 와일드는 머리말에서 이렇게 말한다.
예술가는 아름다운 것을 창조하는 사람이다. 예술은 드러내고 예술가는 감추는 것이 예술의 목적이다.
도덕적인 책이나 부도덕한 책은 없다. 잘 쓴 책, 혹은 잘 쓰지 못한 책, 이 둘 중 하나다. 그뿐이다.
예술의 도덕성은 불완전한 매개 수단을 어떻게 완벽하게 사용하느냐의 여부에 달려 있다.
진정으로 예술이 반영하는 것은 관객이지 삶 자체는 아니다.
<도리언 그레이의 초상>은 오스카 와일드의 유일한 장편소설이다. 그는 자신의 유일한 장편을 예술적으로 완벽하게 아름다운 작품으로 만들려고 했던 게 아닐까. 과하지 않으면서도 눈에 그려지는 듯한 묘사, 등장인물들의 재기발랄한 대화, 파멸로 점점 이어지는 주인공의 선택들, 그리고 결말까지 모두 '아름다움과 즐거움(쾌락)'이라는 미학적인 관점에서 쓴 것이 아닐까.
그의 관심사는 오로지 소설의 미적 아름다움이었다. 예술가는 아름다운 것을 창조하는 사람일 뿐이다. 도리언 그레이의 선택과 행동들은 그런 아름다움을 위해 ‘이미 선택되어져 있었던’ 것이다. 소설의 결말 역시 그가 추구하는 예술의 도덕성, 즉 불완전한 매개 수단을 완벽하게 사용하려는 것의 발현일 뿐 어떤 의도와 목적도 없었다.
그렇게 생각하면 이해가 된다. 오스카 와일드가 머리말에서 말한 것처럼 예술을 예술가로부터 떼어놓자. 순수하게 예술적인 관점에서만 보자. 그러면 도리언 그레이가 영혼의 추함을 감수하면서 쾌락을 택한 것, 살인을 한 것, 회개하지 않고 점점 몰락의 길을 걸어간 것, 자신을 파괴하기에 이른 것까지 다른 선택이 가능하지 않았을 것이다.
도리언 그레이가 처음부터 정직한 삶을 살거나, 어느 순간 반성하고 회개하는 것보다 점점 타락해 가는 것이 예술작품으로서 더 아름답고 재미있지 않은가? - 도덕적인 내용보다 비도덕적인 내용이 더 재밌고 쾌락적이다. - 도리언 그레이가 승승장구하여 최후의 승리를 거두는 것보다, 어떤 방식으로든 추락하는 것이 미학적인 관점에서 아름답지 않은가? - 일반적으로 희극보다 비극이, 승리보다 몰락이 아름답다.
내가 오스카 와일드의 입장에 있었더라도, 소설을 쓸 때 이러한 갈림길들에서 다른 선택을 하지는 않았을 것 같다. 그가 고민했던 부분은 오직 '도리언 그레이가 어떤 방식으로 파멸할 것일까?'가 하는 파멸의 방식이 아니었을까.
<도리언 그레이의 초상>은 그의 바람대로, 그가 머리말에서 희망한 것처럼 평가하는 것이 공정하다. 그의 인격이나 삶과 분리하여, 언어라는 불완전한 매개수단을 얼마나 완벽하게 사용했는지 보아야 한다. 도덕적이냐 부도덕적이냐가 아니라 잘 쓴 책, 혹은 잘 쓰지 못한 책인지 평가해야 한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도리언 그레이의 초상>은 미적으로 완벽에 가깝게 잘 쓴 책이라고 말하지 않을 수 없다.
오스카 와일드는 이 책에 대해 바질은 자기 자신이고, 헨리경은 사람들이 생각하는 자신이고, 도리언 그레이는 자신이 되고 싶은 모습이라고 말했다고 한다. 그렇다면 오스카 와일드가 어떤 사람인지 알기 위해서는 바질이 하는 말을 잘 보아야 한다.
다시 1장으로 돌아가 보자. 바질은 헨리경과의 대화에서 말한다.
“그들(추한 사람들과 우둔한 사람들)은, 우리가 추구해야 할 삶의 방식으로 삶을 사는 사람들이네. 방해받지 않고 무덤덤하게, 소란스러움 없이 살아가는 사람들. 그들은 다른 사람들에게 파멸을 가져다주지 않는 사람들이면서, 한편으론 낯선 무리의 손에 몰락해 가는 사람들도 아니야.”
위의 말을 반대로 해석하면 – 논리적으로 정합성이 있는 것은 아닐지라도 – “다른 사람들에게 파멸을 가져다주는 사람들, 한편으로는 낯선 무리의 손에 몰락해 가는 사람들은 아름다운 사람들이거나 지적인 사람들이다.” 그런 사람들은 바로 도리언 그레이나 헨리경 같은 사람들이다. 1장 초반에 등장하는 이 내용은 이 소설 전체 내용에 대한 스포일러이자, 도리언 그레이의 운명에 대한 전주곡이나 다름없다.
바질이 오스카 와일드가 자신의 모습이라면, 어쩌면 오스카 와일드는 아름답고 지적인 예술가로서의 자신의 숙명을 저주했는지도 모르겠다.